‘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라는 어린 왕자의 메시지는 쿠튀르에도 통용된다. 꿈과 환상을 패션에 대입하며 그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몽상가들이 선사하는 환희의 순간은 아틀리에에서 펼쳐지는 진중한 마스터들의 인고의 시간에서 탄생하는 법이니까. 더구나 장인들의 손길이 닿은 오쿠 쿠튀르의 특별한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특권은 이제 더 이상 VIP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누구나 오트 쿠튀르의 우아한 환상을 엿볼 수 있는 시대. 꿈의 영원한 가치를 믿고 하이패션의 특별함을 동경해온 이들이 선뜻 나서 자신의 미학을 나누고자 하는 시대의 한가운데 우린 살고 있다.

FEN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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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디의 오트 쿠튀르 쇼는 ‘오트 푸뤼르(Haute Fourrure)’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전 세계 유일무이한 퍼의, 퍼에 의한 오트 쿠튀르 쇼인 것이다. 그러니 펜디 오트 푸뤼르 쇼는 ‘이번에는 칼 라거펠트가 어떤 신기술을 이용해 마법사처럼 퍼를 다뤘나’에 시선이 집중된다. 퍼를 마치 면이나 실크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의 능력은 가히 마법에 가까우니까.

쿠튀르 도비라 펜디
지난 7월 쿠튀르 기간에 선보인 2017 F/W 오트 푸뤼르 쇼의 주제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꽃들’. 라거펠트는 다른 세계에서 온 꽃의 그 낯설고 신비한 아름다움을 다채로운 색상의 퍼를 통해 오색 찬란하게 표현해냈다. 푸르른 정원에서 피어나는 상징적인 봄부터 비현실적인 겨울에 이르기까지, 퍼를 입은 이국적인 식물이 정교한 기술을 통해 꽃망울을 터뜨렸다. 가죽 끈과 퍼를 정교하게 엮는 직조 방식으로 붓꽃, 데이지, 크로커스, 양귀비 등을 피워낸 것.


그뿐일까. 혁신적인 퍼 직조술을 통해 밍크를 레이스 직물처럼 재조립했는데 일례로 장인이 밍크를 색종이 조각처럼 원반 모양으로 오린 다음 실크 오간자에 대고 밍크 조각을 바느 질해 달았다. 또 깎은 밍크와 속이 비치는 실크에 후기인상주의풍의 그림을 손으로 그려 넣었고, 그 표면은 깃털과 금빛 니들포인트의 자수, 밍크 실을 사용해 정교한 아플리케로 장식했다. 한편 화분 클러치에는 가죽 나뭇잎을 장식했고, 뾰족한 스웨이드 뮬에는 실물 크기의 꽃이나 모피 분첩을 장식했으니… 그 독창적인 심미안과 퍼에 대한 열정에 경탄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퍼에 꽂힌 노장의 열정 투혼이 아닌 지난해 90주년을 지나 백주년을 내다보는 이탤리언 하우스의 퍼에 대한 대담한 실험과 장인들의 마스터 정신이 빚어낸 눈부신 성취인 것이다.

Dior
디올의 첫 여성 아티스틱 디렉터인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칭할 만큼 여성의 권리와 파워에 대해 고심하는 디자이너다. 그런 그녀가 디올 하우스의 70주년을 맞이한 이번 쿠튀르 쇼에서 전 세계 5대륙의 여성들을 위한 룩을 고심했다. 이를 위해 한 손에는 세계로 진출한 디올 하우스의 발자취를 추적한 디올 아카이브의 1953년도 지도를, 또 다른 한 손에는 무슈 디올의 자서전인 <디올 바이 디올>을 든 채 컬렉션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완전한 컬렉션이란 모든 나라, 모든 타입의 여성에 대해 고심해야 한다’는 인류애적인 메시지를 담은 컬렉션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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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인 감성의 쇼 디렉터인 베탁이 설치한 무대에 아티스트 피에트로 루포가 디자인한 지구와 천구를 표현한 쇼장엔 우아하고 서정적인 디올 시그너처 별 모티프와 야생 동물 작품들만으로도 특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특히 이번 오트 쿠튀르는 남성복에서 차용한 요소를 에스닉한 무드와 결합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남성복 패브릭을 반짝이는 질감과 명암이 돋보이는 에이비에이터 스타일의 재킷과 코트, 블라우스와 점프슈트, 나아가 플리츠 장식의 퀼로트 스커트로 변모시킨 룩을 입은 모델들이 걸어 나온 것. 특히 밀리너리 스티븐 존스가 남성적인 페도라를 재해석한 헤드피스를 선보이며 프레야 스타크와 같은 여류 탐험가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전반적으로 신선한 상상의 지도 안에서 전 세계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남녀와 문화를 넘어서는 인류 보편적인 스타일을 탐구한 디올은 오늘날 보다 진취적인 하우스의 탐험 지도를 그리며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렸다.

Chanel
샤넬의 쇼에서 긴장과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쇼의 피날레가 아닌, 쇼장에 들어서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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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2017 F/W 시즌의 샤넬 오트 쿠튀르 쇼장에 들어선 이들은 파리의 에펠탑이 쇼장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아름다운 장면을 목도하며, 그랑팔레 유리 천장 아래 38미터 높이로 재현된 장엄한 에펠탑에 압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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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변을 파리의 여러 공원에서 가져온 의자로 에워싸듯 꾸며 모델들이 아름다운 가을날 에펠탑 주변을 서성이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파리의 여성이 되살아난 듯 하죠. 컷과 형태, 실루엣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답니다. 그래픽적인 형태에 라인이 분명하게 드러나 는 모던한 아름다움이죠”라는 칼 라거펠트의 설명에 딱 부합했다.


그가 완성한 파리지엔들은 모자를 쓰고 단추를 끝까지 채워 올린 사이하이 부츠나 부티를 신고 무대에 등장했다. 특히 트위드 재킷을 롱 튜닉 형태나 크롭트 형태에 더블 브레스트 재킷 형태로 표현한 룩은 클래식한 감성을 물씬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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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를 장식한 이브닝드레스 퍼레이드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지막으로 화이트 더블 페이스트 새틴 소재에 카멜리아 부케를 닮은 깃털로 된 띠 장식을 두른 드레스를 입은 황홀한 모습의 신부가 무대로 들어섰다. 이 환상적인 장면에 프런트로를 채운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퍼렐 윌리엄스, 카라 델러빈, 틸다 스윈턴 등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관중들은 그 감동을 누구보다 빨리 공유하려는 듯 #CHANELTower 해시태그를 단 쇼 사진을 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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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고풍스러운 살로몬드 로스차일드 호텔에서 진행한 발렌티노 오트 쿠튀르 쇼. 이번 시즌의 주제 는 미노디에, 즉 7가지 죄악이었다. 이 주제만으로도 현실을 넘어선 성스러운 영역에 대한 탐구의 흔적이 느껴지는 컬렉션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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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발렌티노는 교만, 질투, 탐욕, 색정, 분노, 탐식, 나태와 같은 요소를 미노디에 백에 상징적으로 응축해 표현했다. 아티스트 하루미 클로소브스카 드 롤라와의 협업으로 완성한 컬렉션은 각각의 죄악을 다양한 문화가 반영된 도상학적 의미가 있는 동물 형상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특유의 아름다운 빛깔과 자수 장식을 정교하게 더한 쿠튀르 드레스와 어우러진 강렬한 사자, 치타, 부엉이, 원숭이, 황소, 뱀, 해골 모티프의 미노디에 백이 탄생했 다. 또 쇼 중반을 넘어서 장내에 울려 퍼진 비욕의 ‘라이언송’은 쇼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키면서 쇼의 주제를 강렬하게 드러냈다.


나아가 몸을 감싸는 진중한 케이프와 베일, 검정에서 붉은색으로 차오르는 색감 등 오트 쿠튀르의 진정한 가치는 눈으로 볼 수 없다는 하우스의 메시지를 전하듯 철학적인 주제와 쇼 분위기를 이끄는 음악이 디자이너의 심미안과 어우러져 공감각적인 감정을 전했다. 아틀리에에서 보낸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이상의 신선한 가치, 즉 오트 쿠튀르의 신성한 개념을 새롭게 발현하며 현실을 넘어서는 의미를 부여하려는 피에르파올로 피촐리의 의지가 밀도 있게 투영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