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현지의 술을 마신다는 건 그곳의 문화와 대화하는 아주 중요한 방식이다. 음주의 기억과 더불어 더 강렬해지고 때로 미화되는 여행의 추억을 술꾼들이 회고한다.

_155157047스페인 라 혼케라 _ 슈냅스
불쑥 장난기가 발동했다. “우리 아무 데나 가볼까?” 눈을 감고 버스 노선표를 짚었다. ‘라 혼케라(La Jonquera)’라는, 들어보기는커녕 검색 결과도 전무한 곳이 걸려들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해보니 화물 트럭이 끊임없이 먼지를 일으키는 황량하고 쇠락한 동네였다. 신혼여행 가운데 이틀을 이렇게 날리나 싶었지만 저녁을 먹으러 간 작은 스낵바가 모든 불만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음식은 하나같이 맛있고, 싸고, 가게 전체에 활력이 넘쳐 흘렀다. 양껏 먹고 마신 뒤 일어날 채비를 하니 가게 주인이 식후주를 내왔는데 이때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대개 식후주는 작은 잔에 따라 주기 마련인데, 여긴 세 종류(코코넛럼, 피치, 애플)의 슈냅스를 병째로 테이블에 놓고 가버리는 게 아닌가!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몇 잔이고 마시면서 뭉개고 있는 듯했다. 우리도 물론 그렇게 했다. 여행 중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달고 독한 그 술을 그때만큼 맛있게 마신 적이 없어서, 지금도 스페인 하면 와인도 셰리도 맥주도 아닌, 복숭아 맛 싸구려 슈냅스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 미깡 (<술꾼 도시처녀들> 저자)

미국 뉴올리언스 _ 허리케인
뉴올리언스는 칵테일의 발상지라고 한다. 물론 여러 도시가 서로 자신이 원조라고 주장하고, 실제로도 다른 곳에서 발명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뉴올리언스가 칵테일을 가장 사랑하는 도시인 것만은 분명하다. 확실히 다른 도시와 다르게 어딜 가나 사람들이 와인이나 맥주 대신 칵테일을 마신다. 뉴올리언스에서 제일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칵테일은 허리케인이다. 1940년대에 이 칵테일을 처음 만들었다는 프렌치 쿼터의 유서 깊은 바 ‘팻 오브라이언(Pat O’Brien)’에 가서 한 잔 주문했다. 당시 재고가 넘쳐났던 럼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 칵테일은 패션프루트와 라임, 오렌지 과즙에 그레나딘(Grenadine) 시럽이 들어가 약간은 인공적인 빨간색을 띤다. 사실 맛도 럼 베이스의 딱 눈에 보이는 그 느낌 정도다. 아주 섬세한 칵테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행객의 기분을 내기에는 이만한 것도 없다. 적당히 먹고 일어나려고 하자 바텐더가 “드시던 음료는 테이크아웃을 해드릴까요?”라고 묻는다. 그렇다. 뉴올리언스는 합법적으로 길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다. 남부의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칵테일 한 잔 들고서 어느 골목에서나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프렌치 쿼터의 거리를 걷는 일은 이 도시에서만 가능한 산책이다. – 신현호 (식도락 애호가)

페루 아타카마 사막_ 피스코 사워
그 커다란 남미라는 땅덩이를, 비행기로 슝 날아가기보다는 땅에 붙어 가고 싶었다. 점에서 점으로가 아니라 땅에다 선을 그리며. 그래서 칠레에서 페루로 넘어가는 길, 장장 23시간짜리 버스를 타고 아타카마 사막에 도착했다. 그곳은 거대한 공사판 같았고 흙먼지로 가득했다. 내가 좋아할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3일을 머무르며 생각이 바뀌었다. 사막 한복판의 거짓말 같은 호숫가에서 신비한 노을과 별을 마주했다. 그리고 피스코 사워를 마셨다. 칠레와 페루의 와인 산지에서 나는 증류주인 피스코와 과일주스를 섞은 진정 그곳의 칵테일. 목이 턱턱 막히는 건조한 사막에서 노을과 함께 마신 피스코 사워는 마법의 물약 같았다. 두 잔을 마시고 갑자기 풍경에 감격해버린 나는,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찍어줘!”라며 카메라를 던지더니 석양을 향해 달리기 시작해 순식간에 점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피스코 사워의 맛이 떠오른다. -김하나 (브랜드라이터,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 저자)

프랑스 노르망디 _ 칼바도스
프랑스 보르도나 부르고뉴 지방에 가면 포도밭에서 나는 포도 향 때문에 와인 코르크를 따기도 전에 취하곤 하는데, 서북부 노르망디 지역에 가면 곳곳에서 나는 향기로운 사과 향에 취한다. 겨울이 춥고 여름에는 습기가 많아 포도 재배에는 적합하지 않은 대신 사과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사과즙으로 만든 술이 시드르이고, 사과주를 증류한 뒤 이를 몇 년간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것이 바로 칼바도스다. 코냑처럼 두 번 증류를 거쳐 40도가 넘는데, 독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노르망디에서 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 <개선문>에서 두 주인공 라비크와 조앙 마두가 만날 때 마신 술. 도빌에 갔을 때 칼바도스 양조장 크리스티앙 드루앵을 찾았다. 프랑스 대통령이 주는 최고상을 비롯해 570여 개의 메달을 받은 곳이다. 노르망디의 서늘한 밤, 호텔방에서 양조장에서 사온 칼바도스를 땄다. 칼바도스는 다른 술과 달리 단숨에 털어넣고 삼키는 것이 좋다. 짜릿하고 향긋한 뜨거움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알큰하게 취기가 올랐다. 거칠고, 변화무쌍한 노르망디와 잘 어울리는 술이다. 지금도 노르망디의 깊고 푸른 밤이 떠오를 때면 칼바도스를 가끔 마신다. 소심하게 ‘살루트’라고 외치며. – 여하연 (<트래블러> 편집장)

프랑스 루르마랭 _ 파스티스
알베르 카뮈에 푹 빠져 지내던 20대의 어느 날, 나는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목적지는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 루르마랭(Lourmarin). 알베르 카뮈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도착한 한여름의 그 작은 마을 노천 카페에서 나는 마침내 파스티스를 주문했다. 남프랑스에 관련한 책에는 빠지지 않는 그 술. 지중해의 정수를 담았다는 바로 그 술. 차가운 파스티스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알아챘다. 이 맛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음식 카테고리 안에 없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자면 크레파스 맛. 더 친절하게 말하자면 검은색 젤리빈 맛이다. 그러니까 내가 결코 좋아할 수 없는 맛. 그러나 이곳은 남프랑스. 나는 지중해의 정수를 온몸으로 맞이하기로 결심했다. 다 마셔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니스 향으로 가득한 그 술을 사랑하게 되었다. 몇 년 후, 다시 남프랑스에 갔을 때도 파스티스부터 주문했다. 내게 뜨거운 지중해의 맛이란 바로 차가운 파스티스의 맛이니 말이다. -김민철 (카피라이터, <모든 요일의 여행> 저자)

스페인 카디스 _ 셰리
그것은 친구의 여행 배낭에서 시작되었다. 도토리처럼 작고 도토리 같은 머리 모양을 한 친구의, 자기 몸만큼 큰 배낭이다. 이 배낭은 남미와 북아프리카를 거쳐 스페인까지 반년간 친구의 움직이는 집이었다. 배낭의 마지막 여정이 하필이면 헤레스(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셰리 산지. 셰리는 스페인어로 헤레스다)였기에 당연한 운명처럼 배낭에서 셰리가 나왔다. 여행을 가득 담아 돌아온 가장 작은 바. 처음 마셔봤지만 홀랑홀랑 들어가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나중에 내 바를 차리면 이 술을 팔겠다고 허풍을 떨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와 친구들은 거짓말같이 헤레스를 포함한 안달루시아 여행을 했다. 셰리를 가장 맛있게 마신 건 카디스였다. 호방한 대서양의 바람을 맞으며 해산물 요리와 같이 먹은 티오페페(가장 대중적인 셰리로 드라이한 식전주. 티오 삼촌, 티오 아저씨라는 뜻이다)는 인생 최고의 마리아주로 꼽는다. 그 여행과 허풍이 지금 서울의 바르셀로나를 만들었으니… 무차스 그라시아스 페페 아저씨. 그리고 나의 술꾼 여행자들이여, 살루트! – 황영주 (서촌 ‘바르셀로나’ 대표)

일본 도쿄 _ 편의점 맥주
혼술에 최적의 시공간이 있다면, 나에게는 일본의, 특히 도쿄의 호텔방이다. 우선 지하철역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사이 편의점에 들러 장을 본다. 플라스틱 바구니를 하나 들고, 커다란 냉장고 유리문 앞에 서는 순간 두근대는 기분은 기대한 전시를 보러 간 미술관이나 좋아하는 브랜드의 매장에서 느끼는 감흥 못지않다. 서울에 흔하지 않은 에비수나 가격이 비싼 코에도, 은하고원맥주, 온갖 타이틀을 붙여 시즌마다 나오는 한정판이나 수상작 맥주, 또 삿포로, 교토, 유후인 등 어디든 있는 로컬 맥주인 ‘지비루’를 고르는 과정 자체가 가뿐하게 즐겁다. 소중히 안고 귀국해야 할 위스키나 와인이라면 고민이 깊겠지만, 그날 밤 마셔 없앨 맥주니까 거품처럼 가볍게. 명란 오니기리나 에다마메 같은 주전부리를 몇 가지 골라 상을 차리면 좁은 호텔방에서 나만의 만찬이 벌어진다. 거미줄같이 복잡한 도쿄 지하철에서 놓여나 마침내 혼자 쉴 수 있다는 해방감과 함께. 매번 거를 수 없는 이 의식은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커다란 도시 속에서 혼자 있기 가장 좋은 곳을 찾아가는 일본 여행을 그대로 축소한 정수 같기도 하다. 에디터 | 황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