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디올’.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디올 하우스에 부임해 선보인 첫 번째 크루즈 컬렉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캘리포니아의 원시적인 초원을 배경으로 무슈 크리스찬 디올이 선보인 1951년 컬렉션에서 힌트를 얻은 이번 컬렉션이 베일을 벗은 순간, ‘치우리의 디올 레이디’는 보다 선명하고 강력한 힘을 품게 되었다.

“WE SHOULD ALL BE FEMINISTS.”
설레는 이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모델 어맨다 구그가 걸치고 가장 파워풀한 하이패션 하우스 중 하나인 디올 런웨이에 등장한 순간은, 2017 S/S 패션위크 기간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아프리카 출신 유명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집필한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강렬한 문구는 2017년 현재 전 세계적 화두인 ‘여성’ 그리고 ‘여성성’을 정면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 슬로건을 자신의 디올 하우스 데뷔쇼에 당당히 내건 디자이너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역시 ‘여성주의’와 ‘여성의 힘’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러한 성향은 그녀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한 이후 디올 하우스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로 자리매김했으며, 지난 8개월간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지난 5월 12일 베일을 벗은 디올의 2018 크루즈 컬렉션 역시 그녀의 이러한 뚜렷한 기조를 담고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대표적인 부분은 아티스트 조지아 오키프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점이다. 오키프는 본연의 여성성을 자유롭게 표현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페인팅 아티스트. 지난 3월 3일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브루클린 뮤지엄의 전시 <Georgia O’Keeffe: Living Modern>을 찾은 치우리는 오키프의 작품 세계와 일평생 스타일리시했던 그녀 자체로부터 쇼 영감을 얻었고, 이번 컬렉션을 준비하는 동안 무드보드에는 앤설 애덤스, 세실 비턴 등이 촬영한 오키프의 사진이 빼곡히 스크랩되어 있었다. 동반자였던 사진작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가 세상을 떠난 뒤(오키프는 긴 결혼 생활 동안 끝까지 스티클리츠의 성을 따르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뉴멕시코 사막에서 여생을 보낸 조지아 오키프의 주체적인 모습은 광활한 ‘어퍼 라스 버진스 캐니언 오픈 스페이스 보호구역(Upper Las Virgenes Canyon Open Space Preserve)’을 배경으로 펼쳐진 이번 컬렉션에 등장한 모델들 그 자체였다. 그뿐 아니라 오키프의 시그너처 아이템인 반다나와 챙 넓은 모자의 조합이 장인 스테판 존스의 손끝에서 재탄생해 모델들의 머리 위를 장식했으며, 오키프의 대표작인 <Ram’s Head>가 프린트로 차용되어 검정 코트 위에 안착했고, 즐겨 입던 클래식한 워싱의 데님은 비즈 장식 데님 룩으로 재해석됐다.


이번 컬렉션을 준비하며 치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성은 오키프뿐만이 아니다. 현존하는 여성 아티스트 비키 노블의 작품 세계 역시 컬렉션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었는데, 비키 노블은 1970년대에 여성주의에 입각한 타로 드로잉으로 유명세를 얻은 작가다. ‘마더피스 타로’의 시초이기도 한 그녀의 페인팅이 티셔츠와 바이커 재킷 뒷면에 더해지는 식으로 컬렉션 전반에 걸쳐 신비롭고 쿠튀르적인 장치로 활용되었다. 이와 관련해 우아한 패션 하우스와 점성술의 관계에 의문을 품는 이도 있을 수 있지만, 알고 보면 디올 하우스와 점성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무슈 디올은 열네 살 시절 우연히 만난 점쟁이를 통해 점성술에 매료되었고, 한평생 점성술에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고 알려진 인물이 아닌가. 이를 현대의 아티스트와 협업해 디올 하우스의 쿠튀리에 정신이 담긴 예술적 장식으로 풀어낸 것은, 발렌티노 하우스 재직 시절부터 유서 깊은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현명하게 활용해온 치우리다운 해법이다.
이번 컬렉션과 관련해 짚고 넘어가야 할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장소다. 최근 2~3년간 유수의 패션 하우스들이 경쟁적으로 크루즈와 프리폴 컬렉션을 4대 도시가 아닌 색다른 장소에서 선보이고 있는 가운데, 치우리가 첫 크루즈 컬렉션 발표 장소로 택한 곳은 바로 캘리포니아다. 캘리포니아 칼라바사스 지역의 ‘어퍼 라스 버진스 캐니언 오픈 스페이스 보호구역’은 할리우드와 멀지 않고, 카다시안 가족의 저택이 위치한 유명한 지역. 하지만 정작 군용 SUV를 타고 험한 모래 산길을 따라 쇼장으로 향한 참석작들은 과연 자신이 우아한 패션쇼장으로 향하고 있는지, 야생 동물 관찰을 위한 사파리 투어 길에 오른 것인지 헷갈렸다. 그러나 긴 여정 끝에 광활한 대지 위에 설치된 드라마틱한 텐트, 그리고 ‘디올 소바주DIOR(Sauvage, ‘야생의’라는 뜻의 프랑스어)’라는 컬렉션 명칭이 새겨진 대형 애드벌룬을 마주한 순간, 모든 이들은 치우리가 클라리사 핀콜라 에스테스의 책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에게서 영감 받았다고 귀띔한 쇼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을 터다. 게다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니, ‘치우리의 디올’과 관련해 ‘스칼렛 오하라’를 떠올린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 예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사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이토록 ‘대지의 여신’이 떠오르는 강렬한 컬렉션을 원시적 아름다움이 가득한 장소에서 선보인 데에는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무슈 디올이 1951년 선보인 ‘오벌(Ovale)’ 컬렉션의 영향이 크다. 1940년 프랑스 라스코 동굴에서 구석기 시대의 벽화가 발견되는 세기적 사건이 있었다. 이는 고고학과 인류 문화 예술사를 새롭게 써야 할 만큼 획기적인 발견이어서 당대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무슈 디올 역시 마찬가지. 그는 암벽화의 이미지를 프린트로 재해석해 1951년 이를 주제로 곡선 실루엣 위주의 오벌 컬렉션을 발표했고, 이는 66년이 지난 2017년, 새로운 디렉터인 치우리가 첫 크루즈 컬렉션을 준비하는 데 핵심적인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컬렉션 영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모계 사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치우리의 여성 본연의 아름다움에 관한 찬미를 포착할 수 있다. 남성의 눈으로 바라본, 극대화된 섹슈얼리티를 강조한 의상이 각광받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강인하며, 자신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있는 여성이 주인공인 시대다. 현시대의 여성이 가장 원하는 이미지를 아름답게 구현해낸 이번 컬렉션을 보고 나면, 치우리가 가장 인상 깊었다는 비키 노블의 책 구절에 대해 공감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신성한 내 중심에 있는 나 자신을 알고 싶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디올 ‘여성’ 컬렉션은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치우리의 <디올과 나> 다큐멘터리 필름이 제작된다면 전작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그 안에 가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