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 후 말리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는 화가, 권혁근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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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는 그것을 대면하는 사람들에게서 제각각의 연상을 부른다. 화가 권혁근의 그림을 멀리서 봤을 때, 기암절벽의 표면이 먼저 떠올랐다. 물살이 센 순간의 풍경 같기도 했다. 가까이서 본 그림에는 유화 물감의 거칠고 두툼한 질감이 살아 있었다. 그는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다. 한 번 그리고 오래도록 말린 후, 그 위에 다시 그리며 겹겹이 반복한다. 바람을 따르듯 그저 어떤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며 그려간 하나의 캔버스는 권혁근이 그때그때 느끼고 몰입한 시간이 쌓인 결과다. 권혁근 개인전 <바람이 손을 놓으면I(f The Wind Let Go)>이 청담동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에서 7월 8일까지 열린다. 한 화가의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시간이 모여, 감각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W Korea> 캔버스에서 물감이 묻어 있지 않은 빈 공간을 보니 일반 캔버스와 생김새가 좀 다르다.
권혁근 물감을 반복해서 칠하려면 보통의 캔버스보다 면이 훨씬 두툼해야 한다. 안 그러면 캔버스가 축축하고 두툼한 물감을 감당하지 못한다. 작업을 위해 캔버스를 특별히 제작한다. 단색화 대가 중엔 상당한 비용을 들여 캔버스를 직접 짜는 경우도 있다.

동양화를 전공했는데, 어떤 계기로 서양화를 그리게 됐나?
동양화 작업을 할 땐 그림이 빨리 마른다. 나는 한 작품을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디게 마르는 유화를 선택했다. 2012년부터 지금과 같은 스타일로 작업하기 시작했는데, 유화보다 더 천천히 마르는 재료가 있었다면 그걸 택했을 것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하나?
한 번 그린 후 수개월에 걸쳐 말린다. 그 시간 동안 그림을 바라보며 지금 이게 옳은가, 여기서 더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나 등등을 생각한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6개월이 걸리기도 하고, 대형 작품을완전히 말려가며 하려면 2년이 걸리기도 한다. 다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칠하는 일의 반복이니까, 하나를 완성한 후 다음 작품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몇 작품을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한다.

혼란스러운 이미지의 그림도 있고, 패턴이 비교적 일정한 그림도 있다. 이런 스타일은 작품의 주제에 따라 달라지나?
어느 순간의 감정에 나를 맡기고 그 느낌에 몰입되어 그린다. 색깔 역시 직관적으로 선택한다. 어떤 이미지나 감정을 갖고 시작하지만, 막상 그릴 때는 내 손이 물감을 짜서 바르는 행위만 반복할 뿐이다. 사랑에 관한 어느 작품은 무수한 레이어를 쌓아 2년 만에 완성했다. 사랑이 식었다, 불이 붙었다, 이 과정을 하도 반복하는 바람에(웃음). 완성된 작품은 크게 선과 면의 움직임이 일률적인 것, 방향성이 있는 것, 아주 정신없는 것으로 나뉜다. 내 안에 그 세 가지가 다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런 꼴이 나온다.

그럼 완성된 작품을 바라볼 때마다 작업하던 시기의 감정과 기억이 떠오르는가?
그렇다. 완성 후 시간이 흘러 작품을 봤을 때 해당 감정이 안 느껴지는 작품은 그냥 버린다. 대신 과거의 기억과 심상이 선명한 작품은 팔지 않고 내 곁에 둔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아주 충격적이었거나 아주 행복했던 사건에 관한 것이다. 작업이란 내게 배설일 때도 있고 치유일 때도 있는데, 대개 치유의 과정이다.

작품을 가까이서 보면 두툼한 물감을 손으로 밀어낸 흔적과 손가락 자국이 보인다. ‘핑거 페인팅’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단지 몰입한 순간의 감정을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그려내고 싶어서다. 한 번 그릴 땐 밤을 새워 집중해서 휘몰아치듯이 그린다. 한 손가락으로 문지르기도 하고, 다섯 손가락으로 박박 긁듯이 그리기도 하고.

순간의 감정에 자신을 맡기고 몰입하는 건 ‘필’을 받으면 저절로 되는 일인가, 집중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일인가?
우선 나를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 작품 활동이란 한마디로 내려놓는 과정을 연습하는 일과 같다. 연습하는 게 곧 나의 공부이고, 갈수록 많이 내려놓음으로써 집중력을 키워가는 셈이다. 내려놓고 싶은 이유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나를 그리고 싶기 때문이다. 의식을 거의 배제한 상태에서의 느낌만 표현한다면, 그게 바로 나라는 사람 본연의 모습이고 제일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캔버스마다 오랜 시간과 기억을 층층이 쌓아 납작하게 완성했으니, 작품들이 모인 갤러리는 한 개인의 무수한 세월과 사건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징글징글하다고 해야 할까?(웃음) 전시장이 권혁근이라는 사람의 기억의 아카이브이기도 하겠다.
징글징글하기도 하고, 또 사랑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 이번 전시를 위해서 고른 작품 중 사랑에 관한 것이 많다(웃음). 놀라운 건 작품 각각이 지닌 사연이나 감정은 나만 아는 것임에도, 그림에 투영된 내 감정을 비슷하게 알아채는 분이 많다는 점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느껴진다고들 하더라. 관람객의 감상평을 듣고 나서 내 그림이 새롭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 노랑이 주조색인 그림인데, 함께 섞여 있는 흰색이 여백처럼 보이면서 몽유도원도 같다고 하는 분이 있었다.

작가로서의 화두는 뭔가?
‘내일 내가 그릴 그림’. 이번에는 어떤 그림이 나올까, 어떻게 나를 더 버려야 할까 같은 호기심 말이다. 내일의 내가 어떨지 궁금해서 잠 못 이룰 때도 있다. 그런데 자신의 미래가 궁금한 건 모든 이가 마찬가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