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남 앞에서 할 말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았던 한국의 문화 지형. 이곳에서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자기 의견을 밝혔다가 손해 보는 경우도 허다했다.

Two businessmen in meeting
한국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 기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외국인의 모습에 놀란 적이 있을 것이다.
말 잘한다는 기자의 세계에서도 그런 일은 벌어진다. 해외 셀렙들의 기자회견 현장에서는 셀렙이 기자의 질문에 반박하거나 면박을 주고, 기자는 맞받아치며 재차 묻는 상황이 곧잘 벌어진다. ‘이거 싸움 났다!’ 싶은데 지켜보면 싸움 같기도 하고 그저 생각이 다른 경우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반박하든,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 생각을 분명히 밝히든, 한국인은 그것을 튀는 행위로 여기는 문화 속에서 자랐다. 내 할 말 하고 살면 성격이 모가 났다거나 되바라졌다는 반응을 감내해야 했다. 토론이란 대립하는 의견이 있고, 판단과 결정에 앞서 서로 다른 의견을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을 때 일어난다. 토론이라고 해서 꼭 거창한 일만도 아니다. 한 나라의 대권 주자들이 사안을 두고 자기 생각을 밝히는 중차대한 자리부터 사무실 직원들이 모인 회의 테이블까지, 서로 의견을 나누거나 상대를 설득해야 할 일은 세상에 많다. 혼잣말을 하는 게 아닌 이상 우리는 말하거나 듣거나 묻는다.

한국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하는 사람은 영어로 업무 메일을 쓰거나 컴플레인을 할 때, 스스로가 더 똑 부러지게 말한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언어권에 따른 차이가 이런 현상을 만들어내는 걸까?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의 언어학자 연규동에게 물었다. “주어를 밝히는 언어인지 아닌지에 따라 말이 좀 더 논리적으로 구조화되는 인상에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영어에선 주어가 있어야 문장이 완성되는데, 한국어에선 때로 말하는 주체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문맥으로 파악하도록 하죠. 게다가 한국어는 종결어미가 발달한 언어예요. 영어나 기타 언어에선 주어 다음에 바로 동사가 나와서 말의 속성이 초반에 파악됩니다. 독어의 경우 중성 명사까지 총 세 가지 성별이 있고, 이에 따른 동사형도 제각각이고요. 반면 한국말에선 문장의 맨 끝에 가서야 이 말이 서술형인지 명령형인지 알 수 있어요.” 밥 먹었니, 밥 먹어라, 밥 먹었다… 사람 말 끝까지 들어봐야 정체가 분명해지는 언어. 그리고 ‘나’라는 주체를 당당히 밝히는 언어와 뒤로 숨을 수 있는 언어. 언어권과 조리 있게 말하기의 관계란 분명 있을 것 같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검증하긴 쉽지 않다. “언어 속성으로 그 관계를 따지기엔 인간의 뇌나 심리 문제, 기타 요인이 작용하는 걸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죠.”

플라톤은 문답과 대화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변증술’을 제창한 철학자다. 그런데 플라톤의 <국가>를 보면 그가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들은 의외의 조언이 등장한다. “젊은이들에게 논증의 맛을 알려주지 말아야 하네. 아직 젊은 사람이 논리의 맛을 알게 되면 재미 삼아 그것을 남용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데 그 논리를 써먹게 된다네. 그리고 사람들이 상대방을 공격할 때 따지는 것을 흉내 내어 자기도 다른 사람을 공격하게 되지.” 그놈의 문답 때문에 세상이 무법천지가 된다는 것. 플라톤 역시 논리적 토론이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일정 수준의 인격과 소양을 갖춘 사람만 선별해 예비 훈련을 시켰고, 그 사람들이 30세가 된 후에야 변증술을 가르쳤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는 논리의 맛은 몰라도 공격의 맛을 아는 ‘키보드 워리어’가 판친다는 사실을.

tvN <대학토론배틀>은 올해 일곱 번째 시즌을 맞은 장수 프로그램이다. 대학생 지원자들은 조를 이뤄 토너먼트식 대결을 거칠 때마다 낙태, 기여입학제도, 청년 구직, 혼전 동거 문제 등을 두고 찬반 토론을 벌였다. 남 앞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도 긴장되는 일이지만, 그보다 앞서야 할 것은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다.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은 생각 중 상당수는 진정 내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 인터넷상의 자료나 남의 의견일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김기현 PD가 말했다. “토론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봤던 부분은 ‘진짜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가’, 그리고 ‘상대방의 주장을 얼마나 경청하고 있는가’였어요. 자기 생각을 말할 때는 일방적으로 상대를 설득할 게 아니라 잘 듣기부터 해야 수준 높은 토론이 이뤄집니다. 그렇게 서로 간에 공감을 형성하고 절충점을 향해 가는 거죠.” 할 말 많은 시대, 혼란스러운 극단의 시기엔 경청과 공감이라는 토론의 본질이 더욱 중요해진다. 김기현 PD는 처음 실망스럽기도 했던 지원자들의 수준이 점점 눈에 띄게 발전하는 것을 느꼈다. 진짜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달라는 제작진의 조언과 설득 논지를 펼치는 경험을 통해, 대결을 벌이는 학생들도 그 안에서 훈련을 거듭한 셈이다.

세계 최고의 지성이 모인 자리는 어떨까? 캐나다에서 봄과 가을, 연 2회 열리는 ‘멍크 디베이트’는 사회적, 경제적, 지정학적 쟁점 등 뜨거운 국제 현안을 두고 각 분야 정상급 지식인들이 청중 앞에서 벌이는 토론의 장이다. 2015년 11월에는 ‘인류는 진보하는가’라는 거대 주제를 놓고 21세기 가장 유명한 심리학자일 스티븐 핑커, 작가 알랭 드 보통, 베스트셀러 <아웃라이어>를 펴낸 말콤 글래드웰, 과학 저널리스트 매트 리들리가 모였다. 이들이 펼친 주장과 근거만 모아놓아도 인문학적, 과학적인 면에서 한 신이 완성되니, 토론을 기록한 책(<사피엔스의 미래>)도 국내 출간됐다. 그러나 지성은 지성이고 감정은 감정이다. 토론이 지속되자 누군가는 토론 시작 전 대기실에서 나눈 사적 대화를 들추며 꼬투리 잡는다. 알랭 드 보통은 다소 욱하는 성질도 보여준다. 토론의 경우와 결이 조금 다르지만, 논리와 뗄 수 없는 법의 현장 역시 진흙탕이 되곤 한다. 3월 10일 우리나라 대통령의 탄핵이 선고되기 전 17차례에 걸쳐 열린 탄핵 심판 과정은 모두 동영상으로 공개됐다. 법 전문가들이 첨예한 언변을 겨루리라 기대한 헌법재판, 과장 좀 보태자면 목소리 큰 중년 남성이 가게에서 컴플레인하는 모습과 별다를 바 없는 풍경이 종종 연출됐다. 재판관과 변호인 사이에 “모욕적 언사를 참고 진행중인데 그렇게 삿대질하면서 헌법재판관씩이나 하느냐는 말을 합니까?” “제가 뭐라 그랬는데요?”처럼 믿기지 않는 대화의 순간도 있으며, 이 심판이 토론 현장이었다면 진행자 격이었을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장내를 진정시키다가 뒷목을 잡기도 한다.

토론의 장이 격렬해지게 만드는 건 거기 있는 사람들의 말과 태도다. 다시, 언어학자 연규동이 말한다. “우리 토론 문화가 제대로 꽃피지 못한 건 언어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정서의 문제가 더 크다고 봅니다. 여전히 위계질서에 발목 잡혀 있죠. 근현대사 50년 동안, 한국인은 자기 의견을 밝힘으로써 피해를 보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을 거고요. 그 과정에서 공개적 발화를 꺼리는 DNA가 생겨난 것만 같아요.”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도 싸우고, 법이라는 명문화가 존재해도 싸움은 일어난다. 먼저 필요한 건  다 같이 어우러진 자리에서 제대로 말할 수 있는 분위기다. 태도에 대한 논의는 말할 수 있는 문화부터 조성된 후에 이야기해야 한다. 한때 일본 교육계에서 읽기와 쓰기 같은 글자 중심 교육뿐 아니라 말하기와 듣기 같은 음성 언어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한 것처럼. 여러 인종이 모인 탓에 사고방식도, 행동과 습관도 제각각이었을 미국 땅에선 상대에게 자신의 생각을 확고히 표현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할 말을 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세상과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이심전심’을 기대하다가 상처받고 사는 세상, 어느 쪽이 더 건강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