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마주친 들꽃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셔터를 누를 여유가 있다면, 모든 여행은 똑같이 찬란한 젊음이자 황홀한 이벤트다. 꽃길을 걸으며 여행의 설렘이 배가된 순간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작년 3월부터 4월까지 42일간 남편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 900km를 걸었다. 우리의 결혼식 대신이었다. 프랑스 국경과 맞닿은 스페인 동쪽 끝부터 이베리아 반도 서쪽 끝 바닷가까지 걷는 도보 여행이 우리에게 버진 로드였고, 걸음 걸음이 결혼 행진이었다. 챙겨 간 면사포와 나비 넥타이를 등산복 위에 걸치고 웨딩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3월의 어느 날, 푸엔테 데 라이나에서 에스테야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진 내가 땅만 보고 걷고 있을 때, 내 코앞으로 들꽃 몇 송이가 훅 들어왔다. 남편이 길가에 핀 들꽃을 꺾어 건넨 것이다.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쩌면 시간이 지난 후 그리워지는 것은, 아주 작고 사소한 들꽃 같은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길 자체가 명소다. 길을 걸으며 직접 부딪치고 만나게 되는 상황이 그 길의 매력이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도 하고, 스스로나 함께 간 일행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사실 계획은 필요 없다. 입국일과 출국일 외에는 컨디션, 날씨, 길의 난이도에 따라 즉석에서 정하고, 도착한 마을에서 숙소를 찾는다. 정신없이 굴러가는 일상에 지친 사람, 그래서 ‘잠시 멈춤’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곳에 가볼 것을 권한다. 평생 함께하고픈 누군가와 정말 평생 함께해도 될지 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적극 추천한다. -이혜민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행진> 저자)

김동영 (1)아이슬란드 올라스빅
2014년 2개월간 혼자 아이슬란드를 여행했다. 한국과 모든 것이 다른, 아주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서였다. 매일 같은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전에도 이름을 몰랐고, 앞으로도 알 길이 없는 꽃을 만난 것은 올라스빅에서였다. 여름날의 아이슬란드에서는 백야가 계속된다.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다.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햇살 때문에 잠에서 깬 이른 새벽, 다시 잠들지 못하고 숙소 근처를 마냥 걷다가 본 적 없는 꽃을 발견한 것이다. 마치 내가 태초의 지구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사방은 고요했고, 무척이나 고독했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너무 잦은 만남을 갖고, 너무 바쁜 사람들에게 그 나라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김동영 (여행 작가)

스페인 카다케스
스페인의 바닷가 작은 마을, 달리의 집 주변은 올리브 나무로 가득했고 정원에는 핑크색 제라늄이 피어 있었다. 소담스러운 제라늄이 내게 ‘Bienvenido!(환영합니다)’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두 달 남짓의 스페인 여행은 시공사에서 출간된 책 <스페인 소도시 여행>을 위한 것이었다. 돌이 갓 지난 딸아이를 데리고 아기띠와 유모차를 동반한 여행은 쉽지 않았다. 부지런히 책에 쓸 자료를 모으고 육아를 병행했다. 달리의 집이 있는 카다케스, 사랑하는 갈라에게 선물한 성이 있는 푸볼 등 달리와 관련된 곳은 모두 달리 박물관이 있는 피게레스에서 버스로 갈 만한 동선에 모여 있다. 살바토르 달리는 존경하던 선배의 아내 갈라와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를 하고, 이로 인해 아버지와 의절까지 하면서 평생 갈라와 함께한 인물이다. 그러니 사랑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분명 흥미로울 것이다. 물론, 달리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도. -박정은 (<스페인 소도시 여행> 저자)

황효진 (1)일본 도쿄
지난해 12월, 정확히 크리스마스 바로 전주에 남자친구와 도쿄에 다녀왔다. 시부야에서 이케지리오하시, 나카메구로, 다이칸야마까지 천천히 걷거나 야나카, 네즈, 센다기, 일명 ‘야네센’이라 불리는 지역을 돌아다녔다. 잡지에서 가보고 싶은 카페나 잡화점, 식당을 체크해두긴 했지만, 걷다가 문득 들어가고 싶은 곳을 선택하는 쪽이 더 많았다. 낮은 주택 화단에 핀 꽃을 발견한 것은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기 어려울 만큼 고요한 네즈에서였다. 아마도 장미가 아니었을까? 바람 한 점 없이 햇빛이 쨍쨍하고 맑았던 날로 기억한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긴 꽃이 집 벽에 드리우는 그림자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필름 카메라와 휴대폰으로 몇 번이고 찍어둘 만큼. 유텐지 역에 내려 가쿠게이다이가쿠 역까지 걸어가는 코스는 골목골목 볼거리가 많았다. 유텐지 역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블루보틀 카페가 있고, 가쿠게이다이가쿠까지 가는 동안 허름한 백엔숍이나 유럽풍 인테리어의 작은 식당, 단정하고 귀여운 일본 주택을 구경할 수 있다. 가쿠게이다이가쿠 역 근처에는 ‘써니 보이 북스’나 ‘북 앤 손즈’처럼 소규모 서점, 스트리머 커피는 물론, 예쁜 그릇을 저렴하게 파는 가게도 있다. 하루 종일 머물러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을 오밀조밀 사랑스러운 동네다. -황효진 (웹진 <아이즈> 기자)

일본 후쿠오카
지난해 가을, 후쿠오카에서 동네 어귀의 꽃들을 내 유일한 필름 카메라인 라이카 미니 2로 촬영했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은 지는 3년 정도 됐다. 필름 한 통에 담기는 37~38개의 장면은 모두 내가 꼭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다. 지나치지 못하고 멈춰 서서 한 방을 누르는 것이다. 필름 사진을 찍던 초창기엔 두서없이 사진을 찍었지만,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걸 안 뒤부터는 정말 담고 싶은 순간에만 셔터를 누르게 됐다. 집중해서 그리고 선택적으로. 후쿠오카는 도쿄와 완전히 다른 도시다. 도시보다는 ‘동네’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시골이라면 시골이고, 항구 도시이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프가 된 온천 마을이 있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작고 예쁜 꽃나무가 아주 많다. 후쿠오카의 꽃들은 왠지 전에도 본 것처럼 그 자리에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후쿠오카는 정말 작은 도시라서 사흘쯤 있다 보면 갈 데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후쿠오카가 가진 최고의 매력이다. -강국화 (브랜드 큐레이터 & 프리랜스 스타일 에디터)

이탈리아 로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시기의 로마는 비교적 더운 편이었다. 그날도 걷다 조금은 지쳐 있었는데, 코너를 도는 순간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는 멋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국내외로 여행을 다니며 덩굴을 많이 봤지만 분홍빛 도는 꽃이 문을 위아래로 감싸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분명 아름다운 문이었다. 나는 어느 여행지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궁금하다.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모습으로 다니는지 관찰하곤 한다. 석 달 가까이 혼자 유럽을 여행하던 당시에도 무작정 걸으면서 거리마다 필름 카메라로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었다. 그 어디든 떠나면 좋고 멋진 장소이지만, 로마는 도시 자체가 매력적이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고대 건축부터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엿보기에 최적이다. 젤라토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강영규 (‘스토리지북앤필름’대표)

이탈리아 포지타노
포지타노에는 열 손가락을 다 꼽을 정도로 여러 번 갔다. 첫발을 디딘 순간 계속해서 오게 될 것을 직감하는 여행지를 아주 가끔 만나는데, 포지타노가 그랬다. 바다만큼 자주 찍게 되고 또 자연스레 찍히는 것이 이곳의 꽃과 나무다. 부겐빌레아는 수백 송이와 눈을 맞추고 정이 든 뒤에야 현지 사람에게 이름을 물어본 꽃이다. 덩굴식물이라 무리를 지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봉오리를 열어젖힌다. 호텔로 향하는 좁은 골목에도, 바다로 내려가는 길 양옆에도, 꼬아 감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리 잡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여행지에서 매일 스치는 꽃이라니, 황홀했다. 파란 바다에 몸을 담그고, 황금빛 태양에 물기를 말리고, 부겐빌레아의 쨍한 보랏빛을 마주한 여름날은 완전하고 충분했다. 갈 때마다 매번 혼자였고, 늘 ‘그날 일어나 내키는 것’을 했다. 장을 봐 이것저것 만들어 먹고, 책 한 권 들고 나가 해변에서 뒹굴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과 밤 낚시를 나가 오징어를 잡아서 튀겨 먹고, 결혼식에 초대받기도 했다. 로마에서 당일치기 남부 투어로 오는 사람이 무척 많은데, 버스에서 내려 메인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오면 보이는 그란데 해변이 포지타노의 전부가 아니다. 걸어서 찾기 어려운 근처 해변에는 카약을 빌리거나 보트를 불러 갈 수 있다. 포지타노에서 소렌토, 아말피, 라벨로, 카프리 섬까지는 각각 1시간 남짓 걸린다. 아말피 해안가는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 -맹지나 (여행 작가, 작사가)

박현구 (1)제주도
제주에 가면 우선 먹는다. 먹고 또 먹는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경치를 감상하며 운전하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 있다. 먹고 나면 바로 또 다음 목적지를 입력하는 것의 연속이다. 서울에도 맛집이 많지만, 맛있는 음식과 자연이 어우러진다는 점에서 제주는 특별하다. 꽃이 피어 있는 제주는 말할 것도 없다. 위미리 마을의 동백을 바라보는 것은 한 번쯤 꼭 경험하고 싶었던 제주의 순간이었다. 겨울에 핀 꽃은 처음이었다. 예상대로 좋았고, 나무들이 어떤
마음으로 가꿔져왔는지 느껴지는 듯했다. 제주의 자연이 계속 지켜지길 바란다. 야자수 숲이 있는 금능으뜸해변도 마찬가지. 사람들을 피해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곳으로, 언제 들러도 한가하고 이국적이다. 야자수 아래 텐트를 펼치고 종일 여유를 만끽하고 싶을 정도다. -박현구 (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