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Sweet Dreams (유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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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불허의 배우 유아인의 꿈결 같은 시간, 그리고 그 꿈속에서 조우한 송혜교와의 망중한.

페이지ㅣ헤링본 울 트위드 코트, 점프슈트, 셔츠는 모두 Burberry, 안경은 Trity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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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Korea> 최근에 집을 리모델링하고 있다고 들었다. 당신의 공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인가?
유아인 시어터룸이다. 친구들과 영화 보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고, 잠도 거기서 잘 때가 많다.

주로 어떤 영화를 보나? 친구들과 서로 좋았던 것을 추천하기도 하나?
선택의 주도권은 늘 나에게 있다. 요즘은 골치 아픈 것을 멀리하는 대신 대중적인 오락 영화를 섭렵하는 편이다. 내 또래 힙스터들이 그러듯이 뭔가 지성과 사유와 통찰을 담은 영화를 접하려 애쓰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좋은 영화란 뭐일까 하는 질문이 많아졌다. 누군가는 2시간 동안 시간을 지워버리려고 영화를 본다면, 우당탕탕 깨고 부수며 시간이 잘 가는 영화가 좋은 영화일 거다.

당신의 영화 취향이 달라졌다는 뜻일까?
그보다는 취향으로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생각 자체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나의 취향과 선호에 집중하면서 자존감을 갖고, 내 스타일을 알리던 단계를 지나왔다고 할까. 요즘은 나라는 사람의 기능과 쓸모에 대해 더 생각하는 거 같다. 한 인간, 누군가의 친구, 사회인으로서 나의 다양한 역할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수행해낼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내가 설정했던 나에 더는 발목 잡히지 않게 되었달까.

스스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설정을 세워두는 편이었나?
“너의 노선은 좀 다르잖아, 너는 자유로운 비주류잖아.” 이런 이야기를 내내 들어왔으니까. 내가 그런 사람이 맞다면, 그 선상에서 어디까지 가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프레임을 만든 것 같다. 이제는 커리어적으로 불안해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거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같고. 영화계라는 세계 안에서 내가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 사람들이 나의 어떤 새로움을 보고 싶어할지를 더 열어놓고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로맨틱 코미디든 액션이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뭔가 도를 깨친 사람의 말처럼 들린다. 그런가?
요즘은 무엇에도 욕구가 별로 없다. 옷장에 쌓여 있는 옷을 보면서도, 이게 그렇게까지 필요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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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에 대한 욕구는?
그거 하나는 있다.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일상생활에서도 친구들과 있을 때 장난으로 상황극이나 역할극을 즐긴다.

그건 엄청난 재능의 낭비인데.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야말로 ‘잉여’의 시간을 보내는데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재검을 받고 하면서 몸이 아프기도 해서 외부 활동을 하기가 어려웠던 기간이지만,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것마저도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눈치가 보인다고 할까? 자신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편인가?
가끔은 내 삶보다 더 앞장선 내가 나를 계속 끌어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게 벅찬 순간이 있다. 좋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칭찬받으려 애쓰다가 눈치 보며 불안해지는 것의 차이는 한 겹인 것 같다. 연예계를 봐도 ‘제발 나 좀 사랑해주세요’ 하고 온몸으로 발산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한 마리 호랑이 같은 사람도 있다. 방식의 차이인 거지 뭐가 더 좋은 삶이라는 판단은 안 하려고 한다. 그런 잣대를 들이대서 스스로의 특별함을 세우거나 주장하거나 하는 건 교만한 태도일 거다.

스스로 교만해질까봐 경계하나?
결국 모두의 본성에는 그런 면이 있을 것이다. 남들에게 박수받고, 돈을 많이 벌고, 빨리 더 높은 곳에 도착하고 싶은 욕망 말이다. 나는 겸양의 미덕이 있는 사람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 나라, 이 도시, 내 나이, 내가 일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특히 젊은 배우가 가져야 할 덕목으로 여겨지고. 그를 감안하더라도 나는 유독 심한 면이 있었다. <사도> 메이킹 필름 같은 것을 보면 감독님의 연기 칭찬을 선선히 듣지 못하고 진저리 칠 정도니까.

도덕적 우월감은 나쁜 게 아니라고 본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동력이 되어주기도 하니까.
세상에 대해 갑갑함을 많이 느끼지만, 나는 아직 질문을 던지는 단계일 뿐이다. 내 안의 모든 고민과 질문에 답을 내려버리고 완결짓는다면 그게 바로 오만이고 교만일 거다. 늘 경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고개 숙이지 않고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전체를 바라보면서 나의 위치를 더 섬세하게 파악하고 싶고,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고 싶다. 나를 더 잘 사용하고 싶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부당함에 맞설 만큼 강인한가 떳떳한가 하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며 그런 단련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이런 얘기 하는 걸 보면 군대나 가라고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웃음).

로프 장식 케이프, 오버사이즈 이브닝 셔츠, 팬츠, 레이스업 슈즈는 모두 Burberry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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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정해놓기보다 찾으며 산다는 건 누구나 그럴 거다. 하지만 좋고 싫음의 영역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답이라면 분명히 존재하는 것 아닐까?
요즘은 옳지 않은 것의 역할마저도 떠올려보게 된다. 예를 들어 트럼프의 여러 발언은 충격적으로 옳지 않지만, 그가 세상에서 수행하는 몫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어쩌면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겨왔던 여러 진보적이고 기본적인 가치를 다시 확인하고 결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직후, “기왕에 뽑혔으니 잘 해달라”고 SNS에 썼던 게 기억난다.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태도였다.
진심으로 그랬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해서 실수하고 잘 못하길 바랄 건가? 단지 내 생각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그건 괴물을 더 괴물로 만드는 일이다.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무조건 1번을 지지하는 사람들 틈에서 자랐다. 많은 의문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환경이었다면 나도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보수적인 지역에서 나고 자라 정치와 진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라든지, 아까 얘기한 ‘옳지 않은 것들의 역할’에 대한 언급을 보면 당신의 관점은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세계가 진보한다고 한 헤겔의 역사관과 닮은 것 같다.
나는 진취적인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진보 진영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가치를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진보적이기를 원한다. 보수 정당을 바꾸기 위해서 그곳에 입당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일부의 인터넷 활동을 보면 그들이 비판하는 반대편과 무엇이 다른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연예인이 정치 얘기 한다고 욕하는 사람도 많고, 정치에 관심없는 내 친구도 많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네가 지금 마시는 물, 사용하는 샴푸, 네가 사는 집과 이용하는 대중교통… 이런 것들이 모두 법이나 규제, 정치와 닿아 있어. 이 순간을 불태우며 살아가는 것만이 멋진 젊음이 아니야”라고. 나도 물론 뭔가 대단히 이룩하면서 살고 있진 못하지만 적어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많은 담론이 오갔으면 좋겠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이 합리적이고 건강하게 세상에서 흐르고 서로 침투하기를 원한다.

얼마 전 SNS에 골든글로브 시상식 메릴 스트립의 스피치 영상을 올렸다. 할리우드 배우들의 다채로운 인종적·국가적 배경에 대해 언급하고, 장애인 기자를 흉내 내던 행동의 비열함을 비판하며 트럼프를 공격하는 내용이었는데, 어떤 부분에 가장 공감했나?
물론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런 내용을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그곳의 분위기와 공기 전체이기도 했다. 셀레브리티는 이 시대의 확성기이자 대변인이 될 수 있는 존재다. 요즘 어떤 옷이 새로 나왔는지, 무슨 머리 스타일이 유행하는지 이런 것 말고도 알릴 수 있는 게 많은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가스비 걱정 안하고 살 수 있는 내가 따뜻하고 안온한 내 집 안에만 갇혀 버린다면 과연 세상을 위한 것인가 싶다. 많은 연예인들이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거 같고. 우리나라 시상식은 딱딱하고 재미없다고들 하는데, 전반적으로 ‘남들과 다른 것’에 대한 허용치가 너무 낮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가 조금만 튀어도 너무 힘들게 만드니까. 요즘 드라마를 보면 배우들의 피부가 하나같이 뽀얗다. 잡티를 지워달라는 요청 때문이다. 마네킹들처럼 주름도 모공도 없어지는 건 배우나 대중만의 문제도 아니다. 사회의 흐름 자체가 뭔가 규격화된 삶의 틀을 깨지 못하고 안전함에 들어가버리고 있다. 나는 아티스트고, 사람들의 의식을 흔들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런 것이 고민이다.

유아인이 입은 러셋 프린트 이브닝 셔츠, 송혜교가 입은 코튼 러플 레이스 톱, 드레스는 모두 Burberry, 크리스털 비대칭 귀고리는 Numbering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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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이고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을 활발하게 드러낸다면 세상이 좀 더 유연해질 거다.
말쑥함만 보여주는 건 재미없지 않나? 대중에게는 조금만 더 너그럽게 봐달라는 말씀을, 동료들에게는 조금 용감해져서 재밌게 살면 어떠냐는 말을 건네고 싶다. 외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동지가 필요한 순간이 많다. 후배들에게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한다.

터무니없는 적의가 난무하는 포털 댓글 같은 걸 보면 조용히 안전하게만 살아가려는 연예인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예전에는 선배들을 탓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들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까지 사과하고 순응하면서 재미 없는 세상을 만들어놨다고. 하지만 누구도 개인의 고통을 강요할 수는 없다. 대중을 상대로 씨름한다는 건 몹시도 힘든 일이니까. 앞으로는 조금씩 더 재밌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쇼비즈니스 안에서도 저마다 수행하는 역할이 다르니까. 예를 들어 10년 전의 나였다면 연습생들을 모아놓고 처절하게 경쟁시키는 <프로듀스 101>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욕했을 텐데, 이제는 그런 장르의 미덕을 인정한다. 대신 저 아이들이 시스템 안에서 더 건강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생각한다. 이런 게 오지랖이라면, 나는 기꺼이 오지랖퍼인 거 같다. 세상에, 사람들에 관심이 많고 그 안에서 나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사람이니까. 근데 그러려면 계속 용감해야 하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건데. 요새는 집에만 있다(웃음).

트위터에 당신이 쓰는 글들 하나하나가 연예 뉴스로 뜨고 논란이 되면서, 요즘은 업데이트가 뜸해졌다.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 같은데, 다른 데다 따로 기록을 하나?
아이폰에 쓴다. 일기라면 일기고 아이디어라면 아이디어고. 내가 발견한 것, 내 삶의 진리. 별걸 다 쓴다. 책으로 묶어보자는 제안도 있는데 꼭 책이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내가 책을 잘 안 읽기 때문에.

자기 생각을 담아내기에 인스타그램은 어떤가? 시대마 다 사람들이 소통하는 매체는 계속 변화하는 거 같다.
요즘은 점점 관심이 없어지는 편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되는 게 아닌가 싶고. 감당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인스타그램에 전시되는 화려한 삶과 상대적 박탈감 같은것을 보면 세상을 온라인으로만 받아들이는 태도가 위험하다는 생각도 든다.
과거의 체계와 다른 어떤 것이 등장하면 늘 그런 시각의 입장이 있었던 것 같다. 만나지 않고 전화 통화만 하는 것에 대해서도 나쁘게 본 시대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손으로 쓰는 연애 편지가 더 가치 있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진 않는다.통화든 문자든 소통의 기준이 맞는 사람끼리 어울리면서 잘 지내면 되는 거니까. 이런 세상에 문자로 이별 통보 못할 게 뭔가, 요즘 VR 게임기도 사서 하고 있고, 근미래에 일어날 법한 에피소드들을 다루는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시리즈도 재미있게 봤다. 우리 라이프스타일에 더 큰 혁명이 일어날 거고, 점점 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질 거다. 그걸 관찰하며 그려보는 일이 즐겁다.

프린트 재킷, 프릴 장식 셔츠는 Kimseoryong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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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0대다. 당신도 기성세대가 될까?
이미 나를 구세대, 꼰대라고 하는 뉴제너레이션이 존재할 거다. 더 어릴 때 내가 설정한 유치한 목표는 좋은 어른이 되는 거였다. 내가 바로 좋은 선배가 필요했던 어린 친구였으니까. 지금은 그런 역할을 하고 싶지만 애들이 잘 받아주진 않는 거 같다(웃음). 젊은 세대에게 너무 명확하게 어떤 역할을 강요하거나 힘을 꺾어놓곤 하는 세상에서 내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어른, 다른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꿈을 위해서는 기꺼이 가난해져라’ 이런 소리 말고,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일러주면서도 단 하나만의 가치가 절대적이라 주입하지 않는 선배면 좋겠다. 무엇보다 어린 사람들이 타인에게 자기 자신을 의탁하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남들의 평가에 치명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이지만 바깥에 있는 것들은 가짜인 것들이 많다. 그것을 진실로 수용하며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공허함을 맞딱뜨리게 된다. 자신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다.

후배들, 동생들과 얘기하면서 세대의 차이도 느끼나?
어린 세대들이 거침없이 명확한 것 같다. 예뻐지고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고 남들에게 대접받으며 산다는 목표를 심플하게 추구하는 태도를 본다. 다만, 그것이 한편으로 속물적인 가치일 수도 있다는 양면에 대한 숙고가 없어 보여 안타깝다. 때로는 그들이 사회의 룰 안에서 더 잘 플레이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살아가는 게 타당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인간이 그리 단선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너무 복잡한 유기체이고 스스로 복잡함을 어떻게 형성해 갈지 잘 결정해야 할 것이다. 다들 세상이 뭣 같다고 느낀다면, 그 분노를 그저 증발시킬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접근하고 표현할지 고민해봐야 할 거고.

청소년 드라마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연기를 했다. 그 시절의 자신을 만나게 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
도망가도 된다는 이야기. 나에게도 치명적인 결핍이 있었고, 내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시기가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자신이 처한 불행이 전부라고 믿는 순간이 있고 어릴수록 더 그렇다. 가정사의 불행, 학교 폭력, 성적 비관… 그런 건 조금만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당시에는 온 우주인 거 같지 않나? 최근 <우리들>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시작한 지 30초 만에 울었다. 스무 살 초반 무렵이 떠올라 어린 날의 나를 마주한 것처럼 감정이 요동을 치더라. 어린아이가 맞닥뜨리는 세상의 폭력성,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심연 같은 것들에 깊이 공감했다. 나는 연예인이 되겠다며 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친구도 별로 없이 지냈다. 고통이라는 자극을 찾아 들어간 애였던 것 같기도 하다. 절망 같은 화려한 단어로 그런 걸 포장하기도 하고. 그런 순간이 있었다.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그 시절의 나는 굳이 안 만나도 될 거 같다. 그땐 그걸 겪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된 거니까. 내가 가진 삶의 철학은 책에서 얻거나 누구에게서 배운 건 아닌 거 같다. 거리에서, 내 집에서, 내가 일했던 곳에서, 운 좋게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즐겼던 곳에서, 침대 위에서 연인과 함께…그 시간에 충실하면서 얻어온 것들이다.

연인으로서의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환자다.

혼자서는 못 지낸다는 뜻인가?
혼자인 건 약간 부족한 데가 있는 느낌이라는 뜻이다. 다리가 네 개, 팔이 네 개인 게 자연스러운데 두 개만 갖고 살아가는 느낌 같은 것.

영화 <헤드윅>의 ‘Origin Of Love’에도 인용된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이야기 같다. 원래 한 몸이던 인간들을 신이 벌주려고 찢어놓았고, 잃어버린 서로를 찾아 헤맨다는.
맞다, 그 영화를 보고 예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감상을 올리기도 했다. 영화 평론도 대단하게 해놓고 그랬던 시절이다. 나는 언제나 연인이고 싶다. 그건 내가 숨을 쉬는 한 생명체고 내 가족의 구성원이고 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 혹은 강박을 가지고 있는 일이다. 연애를 안 하게 될 때는 하려고 애도 써보고, 친구들 속에 있거나 카사노바같이 지내며 굳이 오랫동안 한 사람에게 머무르지 않으려고도 해봤지만. 결국은 연인인 내가 자연스럽다. 그런 의미에서 멜로를 좀 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구축할 수 있는 캐릭터가 있다고 생각한다. 난 되게 재밌게 연애하는, 재밌는 사람이니까.

송혜교가 입은 트윌 랩 코트, 블랙 레이스 드레스, 화이트 레이스 톱은 모두 Burberry, 담수 진주 귀고리는 Numbering 제품. 유아인이 입은 개버딘 트렌치코트, 이브닝 셔츠, 팬츠, 레이스업 슈즈는 모두 Burberry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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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연애하는 이야기는 피해왔나? 필모그래피에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가 잘 없었다.
좋은 배우가 되려고 기피했고 특별함을 만들려고 멀리했다. 20대 배우가 스타의 허울을 쓰려면 그런 장르는 필수 요건인데, 어떻게 안 하면서도 잘 살았던 거 같다. 드라마 시스템 안에서의 클리셰 범벅인 로맨스를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내 몸이 못 견디겠는 지점도 있었다. 이제 와서는 덜 오그라들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장르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확신이 생긴 것 같다. 군대가 걸려 있긴 하지만 그 이전이든 후든 가능한 한 많은 작품을 하려 하고,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성일 평론가가 당신의 연기에 대해 쓴 크리틱을 읽었나? 김윤석, 황정민, 김희애처럼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를 선택해서 깨지고 부서지면서 뭔가를 배우며 강해지는 복서 같은 배우라고 썼는데.
물론 읽었다. 내 연기에 대해 본격적인 평가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서 봤다. 그 비판마저도 내가 셰어한다면 쿨하게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하지만 그 글은 허당이었다. 편협했다. 이 말은 꼭 써줬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 인터뷰를 통해서 나는 그분과 토론을 하고 싶으니까. 복싱의 비유를 차용하자면 나는 얻어터진 적이 없고, 다만 내 상대들이 놀랄 정도로 그들을 때린 적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 평론뿐 아니라 매번 영화 홍보 문구에도 ‘지지 않는 연기를 펼쳤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싸움이 아니고, 연기는 오디션이 아니다. 그런 구도로 바라보는 시각은 세련되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배우들이 영화를 선택할 때 그렇게 계획적으로 의도를 가지고 하진 않으며, 계획한 대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20대 배우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흥미롭거나 재미있는, 관심이 가는 일을 선택해왔고 그런 게 내 자신을 성장시킨다고 생각한다. 내 취향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까부는 걸 별로 안 좋아했던 거고, 그렇다면 20대 배우에게 주어지는 기회란 선배들과 부대끼는 쪽이 많지 않았겠나. 그들과 연기하면서 나는 많이 관찰했고, 알게 됐고, 배웠다. 나는 연기를 잘하고 싶다. 좋은 연기가 무엇인지에 더 고민하면서 연기하고 싶다. 물론 내 연기가 그분이 기준으로 삼을 만한 클래시컬한 연기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좋은 연기라는 건 그 시대, 어떤 시간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연기라는 것이 갖는 가변성, 시대성, 시간성이라는 것을 내 감각으로 충분히 느끼고 파악하면서 연기하려고 한다.

당신은 더블유가 최초로 만드는 ‘맨’ 에디션의 커버 모델이 되었다. 어떤 남자가 멋지다고 생각하나?
가장 남자다운 건 가장 인간다운 것이고, 자신다운 것이다. 여자다운 것도 마찬가지다. 자기다움을 알고 추구하는 사람이 매력적인 남자, 매력적인 여자다. 우리는 모두가 다른 개개인이다. 그 명확한 차이에 집중하면서, 또 하나로 뭉칠 수 있기를 바란다. 좌와 우, 색깔, 지역으로 서로를 나누고 싸우는 것처럼 서로 선을 긋고 무색한 씨름을 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모두가 평등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누구든 자신의 특질로 인해 소외되거나 핍박받거나 상처받지 않는 세상을 원하기 때문에 기꺼이 페미니스트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그 길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열병을 겪는 거 같다. 자신이 옳다는 걸 알리는 목적이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원해서라면, 서로 더 포용하면 좋겠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한 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신념을 칼날로 사용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잘못하고 실수한 사람을 모조리 사형에 처한다면 세상에는 아무도 남지 않을 거다.

당신은 세상에는 차갑게 분노하면서도 사람에 대해서는 따뜻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모두 이상을 추구하지 않나. 그 과정에서 기꺼이 실수하고 너그러워지고, 하지만 더 나음을 추구하고, 반성할 줄 알고, 수치심을 알고. 그런 것들이 인간다움인 거 같다. 나는 정치인도 운동가도 아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아티스트로서 이 정도 얘기를 공유하고 싶다.

세계 평화까지 걱정하는 오지랖 말인가?
정답이다. 가장 최근의 생일 케이크에 초를 끄면서 빌었던 소원이 바로 그거였다. 세계 평화.

포토그래퍼
KIM HEE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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