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클래식한 방법을 지켜왔기 때문에, 베트멍의 뎀나 바잘리아와 리한나 같은 동시대 패션 아이콘들의 러브콜을 받는 73세의 신발 장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마놀로 블라닉이다.

런던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마놀로 블라닉. 그의 앞에 선 모델이 신은 것이 바로 베트멍과 협업한 화제의 장화 스타일 사이하이 부츠다.

런던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마놀로 블라닉. 그의 앞에 선 모델이 신은 것이 바로 베트멍과 협업한 화제의 장화 스타일 사이하이 부츠다.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마놀로 블라닉은 정말 훌륭한 슈즈 브랜드다. 그렇지만 마놀로 블라닉이 패션 신에서 이토록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아, 한번은 그랬던 것 같다. ‘캐리의 후광’, 그러니까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효과 말이다. 뉴욕 길거리 한복판에서 강도를 맞닥뜨린 무시무시한 상황에서도 캐리가 ‘마놀로 블라닉만큼은 냅두라’고 소리칠 정도였으니 얼마나 대단한 신발이기에! 물론 캐리는 마놀로 블라닉 웨딩 슈즈를 신고 결혼에 성공하며 ‘좋은 신은 여자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경구를 실천했다(결혼이 과연 그 ‘좋은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캐리와 마놀로 블라닉의 밀월 관계가 패션계에 단단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어언 20년 가까이 흘렀는데, 이 정도면 패션계에서는이브닝드레스가 찢어진 후디로 환골탈태할 정도의 엄청난 시간 흐름이라 마놀로 블라닉이 여전히 동시대적으로 쿨한 위치를 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만도 하다. 형태의 파괴와 스트리트 신이 대세인 요즘 패션에서 지나치게 클래식한 모양새에 집중하는 마놀로 블라닉은 말하자면 요즘 애들에게는 호텔에 밥 먹으러 갈 때, 결혼식 갈 때 외에는 꺼낼 일이 없는 구닥다리로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

그런데 올해 마놀로 블라닉을 둘러싼 몇 가지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졌다. 먼저, 베트멍의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와 그의 동생인 구람이 직접 찾아와서 2017년 봄 컬렉션을 위해 새틴 소재의 펌프스, 그리고 허리까지 올라오는 긴 장화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왜 꼭 마놀로 블라닉이어야 했느냐고 묻자, 바잘리아 형제는 아무런 고민 없이 이렇게 답했다. “하이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니까요.” 언뜻 생각하기에 베트멍과 마놀로 블라닉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대척점에 위치한 듯도 하다. 블라닉은 균형미에 집착하는 사람이고 베트멍은 일부러 프로포션을 파괴하면서 불균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스타일이다. 무작정 블라닉을 찾아온 바잘리아 형제도 보통이 아니지만, 더 대단한 건 이들을 받아들인 70대 노인인 블라닉 쪽이다. “걔네들이 말하는 걸 들었을 때 그냥 짜릿한 거예요. 슬라브족 특유의 괴팍한 기질 같은 것도 느껴지고.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자! 했죠.” 블라닉이 보기에는 너무 망가뜨렸나, 혹은 너무 DIY같이 보이나, 싶은 것일수록 뎀나가 좋아하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오랜 기간 ‘마놀로 블라닉교’의 독실한 신도를 자처해온 사람이 하나 더 있다. 패션 여제, 리한나다. 지난 5월 리한나는 마놀로 블라닉과 협업하여 데님 위에 시퀸을 엄청나게 장식한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그중 거의 팬츠처럼 보일 정도로 기다란 사이하이 부츠를 공연뿐만 아니라 스트리트에서도 즐겨 신어 ‘블라닉’ 신드롬에 불을 붙였다.

마놀로 블라닉을 동경하며 성장한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의 러브콜 역시 끊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떠오르는 신진 뉴욕 레이블인 케이트(Khaite)와 협업하여 근사하게 리본이 늘어지는 스웨이드 소재의 코트 슈즈를 만들었고, LVMH 프라이즈 수상자인 그레이스 웨일스 보너의 가을 컬렉션을 위한 샌들과 부츠 작업도 했다. 그렇다고 ‘젊은 애들’하고만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현명한 노인은 자신을 위한 시간도 충분히 내고 있다. 먼저, 마놀로 블라닉의 회고전이 열린다. 쇼에 등장한 220점의 슈즈를 비롯해 영국 배스의 본가에 소장하고 있는 3만여 점에 이르는 작품을 모두 내놓는 방대한 규모의 이번 전시는 내년 1월 밀라노에서 시작해 상트페테르부르크, 프라하, 마드리드, 댈러스, 토론토로 이어질 계획이다. 패션 저널리스트이자 아티스트인 마이클 로버츠의 최신 다큐멘터리인 <마놀로>의 촬영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힙스터 중의 힙스터’로 재조명되고 있는 마놀로 블라닉을 아끼는 사람으로서는, 73세인 그에게 홍삼이라도 보내어 지치지 않기를 바라야 하나 싶을 정도로 격한 스케줄이다. 이런 우려에 블라닉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신발 만드는 사람 중에 일흔셋이면 최고 늙은이 맞아요. 그런데… 발렌티노나 아르마니나 라거펠트는 80이 넘었잖아요! 난 그 ‘애들’보다도 어리다고요.” 그러니, 당분간 마놀로 블라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