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한 해가 어느새 흘렀다. 다사다난이라는 상투적인 단어가, 올해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돌아보니 새삼스럽다.

9.다시 시작하는 아이돌의 이야기
젝스키스 재결성젝키
과거의 한 풍경을 공유하며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는 세대 사이에서도 꽤 나이 차 나는 경우가 있다. 80년대생과 60년대생이 서태지를 두고 모두 ‘내 세대 가수’라고 하는 순간도 봤다. 젝스키스와 같은 소위 1세대 아이돌 그룹을 말할 때 가장 파노라마가 활발하게 스쳐가는 이들은 사춘기 전후 즈음에 ‘그 시절’을 맞았던 세대라고 짐작한다. <무한도전> 제작진은 젝키 재결성에 공을 들였고, 3주를 할애하여 젝키 관련 방송을 내보냈다. 이미 그 힘이 증명된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기획에 1세대 아이돌이 드디어 등판한 것이다. 젝키 재결성은 ‘그땐 그랬지’만으로 추억할 수 없는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대중가요 시장을 주름잡은 90년대 아이돌은 제대로 된 계약서나 시스템 없이 기획사의 뜻에 따라 하루하루를 소화해야 했던 존재들에 가깝다. H.O.T의 대항마로 한 획을 그은 젝키가 활동한 기간은 겨우 3년. 어느 날 갑자기 ‘해체한다’는 선언과 함께 그 이름이 공중분해됐으니, 적어도 팬들 마음 한구석엔 온전한 작별을 하지 못했다는 찝찝함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을 보며 아주 가끔은 왠지 모를 격세지감도 느꼈다. 젝키가 16년 만에 컴백한 것은 흐지부지 연재를 마친 소설의 한 챕터가 이제야 다시 운을 떼려는 것과 비슷하다. 계속 읽고 싶은 이야기가 지속되지 않을지언정, 개운치 못한 ‘끝’이 ‘시작’으로 가시화됐다는 점에서라도 의미가 있다. 더구나 다시 시작하는 둥 가 탄탄한 YG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또 하나, 과거의 아이돌 팬들은 <콘서트 7080>을 보면서 흐뭇해하는 이모와 삼촌이 비로소 남 이야기 같지 않은 때를 맞았다. H.O.T와 지오디, S.E.S와 핑클의 팬이었던 세대가 학생 신분을 벗어나 사회로 진출하고, 곳곳에 스며든 그들이 직장인으로서 ‘덕질’ 내공을 바탕으로 한 콘텐츠를 생산하고(예를 들면 좋아했던 아이돌을 섭외하여 방송 내용을 구성하는 작가들), 이젠 지난날을 추억하고  회에 젖기도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젝키가 재결성 후 10월에 발표한 ‘세 단어’는 팬들에 대한 마음을 담은 미디엄 템포 곡이다. ‘다신 볼 수 없을 것만 같던 그대가 내 앞에 서 있네요 / 지금, 여기, 우리, 세 단어면 돼요’. 다 좋은데, 작사는 왜 타블로가 했을까?


10.갖고 싶은 (싶었던) 올해의 물건

저예산 영화들의 굿즈
굿즈 제작 러시에 불을 지핀 건 <캐롤>. 마케팅 일환으로 아이돌 굿즈를 방불케 하는 영화 관련 굿즈가 나왔고, 관객 증정용이었던 그것들을 모으기 위해 여러 차례 영화를 보는 이들의 인증이 이어졌다. 영화의 색감과 감성을 고스란히 담은 <라우더 댄 밤즈>의 에코백과 문구류, 포스터의 분홍 스웨터 그대로 만들어진 <할머니의 먼 집> 브로치 등등 갖고 싶은 영화 굿즈들을 만난 한 해다. 주객전도라는 우려의 시선도 있지만, 저예산 영화의 개봉관 확보조차 쉽지 않은 영화사들이 바이럴에 효과적인 아이디어를 발견한 것은 틀림없다.

금수저
명성과 파워에 대해 익히 들었더니, 제작해서라도 하나 모셔두고 싶은 그것.

갤럭시노트 7과 아이폰 7
폭발, 리콜, 기내 반입 금지 등의 소란을 겪은 갤럭시노트 7이 출시 50여 일 만에 단종됐다. 갤럭시노트 7에 비교할 수 없는 소수지만 아이폰 7도 폭발했다는 증언이 미국, 호주, 중국 등에서 터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린피스 서울사무소는 ‘이미 생산된 430만 대의 갤럭시노트 7을 단순 폐기할 경우 엄청난 자원 낭비와 환경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지속 가능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갖고 싶고, 궁금했고, 출시일을 손꼽아 기다렸던 ‘신상’이 폐기 대상으로 전락할 줄이야. 남의 폭발 보고 놀란 가슴, 열 받은 내 배터리 보고 또 놀란다.


11. 잡고 싶었던 너
포켓몬 고와 닌텐도의 부활

NEW YORK, NY - JULY 25:  Pokemon Go Craze Hits New York City on July 25, 2016 in New York City.  (Photo by Mike Coppola/Getty Images)

밀레니얼 세대는 진심으로 빨간 공을 들고 몬스터를 잡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올해 ‘포켓몬 고’가 이렇게까지 세상을 뒤흔들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 즐겼던 게임 ‘포켓몬’을 진짜 세상에서 스마트폰으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이 게임은, 7월 출시된 이후 숱한 기록을 갈아치웠다. 출시 후 석 달 동안 이 게임이 다운된 숫자가 무려 5억 건이고, 벌어들인 돈은 약 6억 달러에 달한다. 게임 캐릭터의 승리, 추억의 승리, 위치 기반 게임 개발사의 승리다. 인류는 출시 한 달 만에 1440000000000걸음을 더 걸었다. 만보에 약 400kcal가 소모된다고 가정한다면 36억kcal를 더 소모한 셈이다. 증강현실(AR)을 재미 요소로 사용한 덕분에 AR에 대한 관심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국에선 구글 지도 반출 문제로 속초 같은 곳에서만 제한적으로 할 수 있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에게 속초 여행을 할 핑계가 되어주기도 했다. 사고도 여러 번 났다. 사유지 무단 침입, 계단 실족은 기본이고, 운전 중 포켓몬 고를 하다 인명 사고도 많이 나서 운전 중에는 아예 게임을 할 수 없도록 설정이 바뀌었다. 일정 속도 이상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게임이 작동하지 않는 방식 탓에 지하철을 타고 포켓몬 고를 하는 유저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열기가 조금 식는가 했더니, 핼러윈 이벤트 덕택에 다시 매출1위 자리를 탈환했다. 덕분에 웃는 회사는 닌텐도다. 계열사 포켓몬 컴퍼니에서 포켓몬 라이선스 비용으로 벌어들인 예상 수익이 약 100억 엔. 거기에 12월에는 아이폰 게임 ‘슈퍼마리오 런’이 출시된다. 슈퍼마리오를 아이폰으로 즐기기 쉽게 바꾼, 마리오의 모바일 데뷔작이다. 내년에는 휴대용 게임기도 되고 거실 게임기로도 사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게임기 ‘스위치’도 내놓을 예정이다. 망해가고 있었는데, 스마트폰 시대를 받아들이면서 상황이 싹 바뀌고 있다. 얼마 전까지 닌텐도가 모바일 게임으로 인해 위협받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글 | 이요훈(IT 칼럼니스트)


12. 뻔뻔한 중년남들의 자기애
‘아재’들의 셀프 우쭈쭈

후회하고 있다. 오세득 셰프가 JTBC 〈냉장고를 부탁해>와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아재 개그’를 할 때 웃어준 것을. 어떻게 알았겠나. 그 약간의 방심을 비집고 수많은 남성들과 미디어가 동원되어 ‘아저씨’의 비하어인 ‘아재’를 뭔가 귀엽고 위트 있는 중년을 수식하는 말로 바꿔놓을 줄. 덕분에 올해 3월 한 매체에서 사용한 이후 영화, 예능, 드라마,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홍보에 동원되는 ‘아재파탈’이라는 정체불명의 개념에 1년 내내 시달렸고, 오늘도 회사 메일함에 쌓인 보도자료에는 한 남성 중년 배우에 대해 ‘떠오르는 아재 예능 원석’이라는 표현이 나를 괴롭힌다. 아, 제발 아재요, 쫌!
‘아재’를 국어사전적 의미로 안 쓴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멸칭으로서의 ‘아재’가 어느 순간부터 중년 남성들의 자기 모에화를 위해 재의미화된 과정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기울어진 권력 구도를 너무 명징하게 보여준다. 당장 길 가는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여자는 ‘아줌마’, 남자는? 바로 ‘아저씨’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아줌마’가 ‘아주머니’의 비하어이며, ‘아줌마’에 대응하는 건 ’아재‘라는 의미론의 저울
은 제대로 작동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다 지난 1, 2년 동안 대중적인 무브먼트가 된 공격적인 페미니즘을 통해 무례한 중년 남성에게 ’개저씨‘라는 적절한 이름이 붙자 갑자기 그동안 사용된 적 없던 ’아재‘가 호출됐다. ’개저씨‘는 아니다, ’아재‘라 불러다오. 그리고 상당수 매체는 ’개저씨‘는 부정적이지만 ’아재‘는 친근하고 재밌는 의미라고 전파했다. 심지어 중년 남성에 대한 전에 없는 관심이라는 분석까지 나왔다. 아니, 그딴 거에 관심없어, 라고 외치고 싶지만, 이것은 정신 승리가 아닌 진짜 승리다. 자신들에 대한 공격을 튕겨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없는 것처럼 취급할 수 있을 만큼 힘 있는 중년 남성들의 승리.
다시 말하지만 후회한다. 잘나가고 허우대도 멀쩡한 스타 셰프가 자신의 썰렁한 개그에 대한 상대방의 싸늘한 반응으로서의 ‘아재’라는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게 꽤 긍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아재’라는 말을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자체가 평생을 멸시당한 ‘아줌마’들에게는 불가능한, 딱히 손해볼 것 없는 남자들의 여유라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2016년의 ‘아재’는 딱히 더 귀여워진 것도 더 사랑스러워진 것도 아니다. 그냥 조금 더 뻔뻔해졌을 뿐이다. 글 | 위근우(<ize>기자)


13. 가성비 시대의 취미
원데이 클래스의 유행

인스타그램에는 #원데이클래스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33만여 개 검색된다. 어린이들을 위한 학습에 주로 붙던 ‘체험’이라는 단어는 이제 요리, 꽃다발, 향초, 천연비누, 왁스 태블릿, 프렌치 자수 등 어른을 겨냥한 다양한 수업에적 용된다. CJ E&M 리서치센터에서 펴내는 트렌드 리포트에서는 이런 원데이 클래스를 찾아다니는 일 자체가 취미가 된 현상의 배경에 20대의 소비 욕구가 ‘갖고 싶다’보다는 ‘한번 해보고 싶다’로 옮아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원데이 클래스의 유행 현상을 “소유가 아닌 체험과 경험에 만족하는 소비, 묵직한 소비보다는 필요할 때 스치듯 체험하는 가벼운 소비”로 분석한것 이다. 이런 1회 강좌는 부담스러운 비용이나 꾸준한 시간 투자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그 분야에 대한 기초 지식과 성취감을 주고, 재료비만큼의 결과물을 가져갈 수 있어 실용적이기도 하다. 물론 SNS에 멋진 라이프스타일을 인증하고 ‘좋아요’를 받을 수 있는 포스팅 거리도 되어준다. 결국 원데이 클래스가 흥하는 이유는 2016년 한국에서 사람들이 재화와 용역을 소비하는 방식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두 가지 기준을 만족시키기 때문인 듯하다. ‘가성비 높을 것’, 그리고 ‘인증 가능할것’.


14.두 팔 벌려 환영하는 올해의 등장

쉐이크쉑 버거 7월 강남대로에 드디어 상륙한 버거는 여전히 줄 서서 기다려야 맛볼 수 있는 분위기다. 한번 맛 보고 다시 버거킹이나 맥도날드의 품으로 돌아간다 해도, 버거 선택지가 하나 더 생겨서 나쁠 건 없다. 특히 국내에 쉐이크류나 아이스크림 메뉴가 있는 버거 체인점이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쉐이크쉑의 쫀득하고 죄책감 드는 커스터드는 반가웠다. 12월 또 다시 강남대로에 2호점이 오픈한다니, 뉴욕 발 버거의 서울상륙작전, 성공적 .

카카오프렌즈의 라이언 2016년 1월생인 이 캐릭터는 갈기 없는 게 콤플렉스인 수사자다. 누구보다 여리고 섬세하며, 꼬리가 길면 잡히기 때문에 짧은 꼬리가 특징이라고. 경쟁사 라인프렌즈에서도 소녀 곰 캐릭터 초코를 론칭했지만 좀더 인기가 많은 쪽은 라이언이었다. ‘표정 없음’에 가까운 그 표정과 ‘수사자라면서 갈기 없음’의 요소 때문인지 왠지 돌봐줘야 할 것 같은 사자 한 마리가 온라인과 오프라인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15. 지극히 평범한 세상을 위하여
페미니즘이라는 뜨거운 이슈

‘잔인한 5월’이었다. 강남역 앞 공용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끔찍하게 살해된 사건으로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30대 남성이었던 범인은 “여자들에게 무시당해서 화가 났다”는 범행 동기를 밝혔고, 언론은 이 말을 자극적으로 부풀려서 범죄의 원인이 피해자에게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 마치 여자들이 남자를 무시하기 때문에 변을 당한다는 듯이, 그러니까 여자가 행실을 조심해야 한다는 듯이. 여자가 여자라는 이유로 아무 죄 없이 살해당하는 것도 모자라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큰 파장을 몰고 왔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여성 대상 범죄를 규탄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는 여자들의 안전과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실질적인 문제라는 경각심이 일어났다. 참담한 현실이었지만, 그 현실을 똑바로 마주 보는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는 그만큼 거세어졌다. 게임업계에서는 여성 성우가 ‘메갈리아’ 티셔츠를 입고 페미니즘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해고되는 사건이 일어나, 페미니스트들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사상 검증과 불이익에 대해 격렬한 항의가 일기도 했다. 출판계에서는 페미니즘 관련 도서들이 쏟아져나왔고, 지난해에 비해 136%나 치솟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최근에는 서브컬처,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의 분야에서 SNS를 통한 대대적인 성폭력 고발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각종 문화계에서 쟁쟁한 권위자로 통하는 남성들이, 같은 업계 안의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자행해온 사실이 숱하게 폭로되고 있다. 잇따른 고발 운동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알려준다. 그동안 그럭저럭 정당한 줄 알았던 세상이 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진실을. 사실 페미니즘이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세상일 것이다. 여성들이 어떤 업계에서든 성폭력의 위험 없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평범한 세상. 여성들이 살해당할 공포에 떨지 않고 길거리를 걸어 다닐 수 있는 평범한 세상. 글 | 김지현(소설가, 번역가)


16.외로워도 슬퍼도
혼밥, 혼술의 유행
StellaGlobalChaliceHero_CMYK_OPTtvN 드라마 <혼술남녀>는 고시촌을 배경으로 매 회 등장인물이 혼자 술을 마시는 장면과 내레이션으로 시작했다. 1인 가구가 늘어나고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회식이나 모임이 줄어드는 대신 혼자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풍경은 어색하지 않은 그림이다. 대한 지역사회 영양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혼자 밥을 먹는 이유에 대해 40대는 시간이 없어서, 30대는 같이 먹을 사람을 찾기 어려워서라는 답이 가장 많았던 반면 20대의 답변은 ‘여유롭게 먹을 수 있어서’가 1위였다. 30대 이상이 혼밥을 피할 수 없다면, 20대는 즐긴다.


17. 불편해도 괜찮아, 위로하지 않아도 돼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많은 이들이 놀랐다.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한국 시인이 있어서인지, 특히 시인들 반응은 꽤 즉각적이었다. 수상을 축하하는 글과 반대하는 의견 등이 SNS를 통하여 수없이 올라왔다. 시인이나 화가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지만 밥 딜런은 분명히 문인이 아닌 가수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인들 반응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내 예상보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물론 자조적인 반응도 적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여러 시인들이 그의 수상 소식에 기뻐하였다. 밥 딜런 불멸의 히트곡인 <Blowin’ In The Wind>와 <Knockin’ on Heaven’s Door> 등에 대한 새삼스러운 상찬도 이어졌다.
나는 중학교 시절, 건즈 앤 로지스가 리메이크한 <Knockin’ on Heaven’s Door>로 밥 딜런의 음악을 처음 접하였다. 그리고 그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액슬 로즈의 퇴폐적이고 끈적한 보컬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곡이었으나, 학원 영어선생님의 도움으로 해석을 마친 뒤에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 가사에 더욱 매료되었던 것 같다.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뒤에 다소 뜬금없이 이어지는 “Mama, put my guns in the ground.”에 이런저런 어설픈 해석(다분히 중학생다운)을 붙여가며 밥 딜런의 원곡을 정말 열심히도 들었다. 당시 나에게 밥 딜런의 노래는 충분히 시적이었다. 매번 영어사전을 펼쳐야 했음에도 그의 가사들은 사춘기의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전적으로 기뻐하진 못했다. 변명하자면 꼭 속이 좁아서만은 아니다. 문학은 우리에게 ‘불편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모던 포크, 록, 컨트리 등 특정한 음악 장르에 대한 막연한 불편함과는 다른 것이다. 또한 전쟁광 혹은 반상업주의자가 딜런의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불편함과도 조금 다르다. 나는 문학 작품의 불편함이 오히려 문학의 근본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이나 쉼보르스카와 김수영의 시는 독자를 전혀 위로하지 않는 순간에도 분명히 문학적이다. 어떤 좋은 문학은 인간이라는 틀 자체, 세계라는 구조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문학이 다 그런 건 아니고 전부 그래서도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밥 딜런의 음악은 노벨문학상을 받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이는 전혀 거짓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와 우리가 사는 사회가 문학적인 불편함과 어긋남에 조금씩 더 관대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떤 문학은 어디선가 계속 그런 일을 해내는 중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 글 | 김상혁 (시인)


18.여성들의 설 자리를 찾아서
남초 한국 영화 속의 분투

w02_저해상<아가씨>는 ‘남초’로 무장한 한국 상업영화 시장에서도 페미니즘 영화가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입증한 구원 투수였다. 나약하고 억압받던 여성의 연대가 기존의 남성 중심적 사고를 처참히 무너뜨리는 쾌감의 순간을 명쾌하게 기록한 영화는 4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극장으로 유입시켜주었다. 기록할 만한 흥행작이 없었던 여배우와 인지도 낮은 신인 여배우의 ‘위태한’ 만남이 이룬 쾌거였다. 올해 개봉한 10위권의 영화 중 여성이 조연이 아닌 전면에 나선 영화는 〈아가씨〉를 포함해 〈덕혜옹주〉,〈귀향〉단 세 편에 불과했다. 복수를 감행하는 여성(손예진)을 그린 스릴러 〈비밀은 없다〉가 평단의 호응을 얻었지만 흥행에는 역부족이었다. 상업영화 신에서 여성 캐릭터가 전면에 나서는 기획은 여전히 모험이자,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스토리의 흐름에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식물 캐릭터’가 되는 대신, 여배우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저예산 영화로 대거 이동했다. 올해의 영화는 그 필요성과 흐름을 인식하게 해주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선택’의 해였다. <아가씨>가 오염된 ‘아가씨’라는 호칭에 반격을 가했듯이, 아줌마(박지영)가 나서서 범죄를 수사하는 독특한 탐정물 <범죄의 여왕>은 무대포에 교양 없는 ‘아줌마’라는 이름에, 불의를 참지 않는 진취적인 성격을 부여해주었다. 은희(한예리)가 사귀었던, 사귀고 있는, 사귀면 좋을 것 같은 세 남자와 맞닥뜨린 하루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남자들의 시선 아래 갇힌 ‘예쁘거나’ ‘속을 알 수 없는’ 여자가 아니라, 은희의 꿍꿍이에 오히려 초점을 두고 세 남자와 벌어지는 사건을 전개시킨다. 성매매를 하는 노인이라는 충격적 소재를 다룬 <죽여주는 여자> 속 소영(윤여정)은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거쳐온 여성의 고통을 통해 여성이 처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걷기왕>의 만복(심은경)은 선천적 멀미증후군으로 왕복 4시간의 거리를 느리지만 씩씩하게 걸어간다. 그리고 여성 캐릭터의 독특한 걸음을 그린 드라마가 웃음과 감동을 겸비한 한 편의 영화로 기획되고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입증해낸다. 그렇게 올해는 적어도 저예산 영화에서는 여성도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다분히 드러난 한 해로 기록해야 한다. 이제껏 신경 쓰지 않았던 여성이라는 시선의 발견이자, 여배우의 설 자리가 구축되는 움직임이었다. <죽여주는 여자>에 출연을 두고 윤여정은 그 선택을 ‘사치’라고 명명했다. 적은 개런티나, 여배우라는 이미지에 개의치 않고, 하고 싶은 좋은 작품을 선택할 자유를 그렇게 표현했다. 부디 내년에는 수많은 여배우들이 ‘괴물 같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만나는 일이 ‘과소비’가 아닐 수 있도록. 여성 캐릭터도 사고할 수 있고, 특이할 수도 있고, 멍청할 수도 있고, 악당일수도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활용하는 다양한 작품이쏟아지길 기대한다. 글 | 이화정(<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