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아니면 늦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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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패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능동적으로, 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SNS로 소통하는 리얼타임 시대를 사는 이들을 위해 쇼 직후 인스타그램에 오른 이미지를 바로 살 수 있는 욕망 충족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른바See Now, Buy Now가 이번 패션위크의 화두로 떠올랐다. 패션의 중심에서 ‘ 보았지만 기다려라’가 아닌 ‘보았노라, 가졌노라’를 외칠 수 있게 만든 기민한 브랜드들의 즉구 서비스가 벌이는 흥미진진한 패션 나우!

BURB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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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말부터 이어진 파리 패션위크 기간, 한 쇼장의 프런트로에 앉은 게스트 중 눈에 띄는 옷차림이 있었다. 바로 며칠 전, 런던 패션위크를 달군 버버리의 F/W 시즌 룩. 러플 장식 이너에 고풍스러운 프린트의 스웨트셔츠를 레이어드하고, 검은색 레이스 시스루 스커트에 레이스업 부츠까지, 쇼에 나온 풀 룩을 그대로 차려입은 그 여인은 마치 영화 <백투더퓨처> 속 여행을 즐기고 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패션 캘린더는 4~6개월 정도 앞선 시즌에 발표되었으니, 이 가을에 런웨이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내년 봄 컬렉션인 2017 S/S 시즌이어야 했다. 하지만 당차게 그 스케줄을 비켜 간 이들이 생겼다. 버버리나 랄프 로렌처럼 지난 시즌에 이어 2차 2016 F/W 시즌의 셉템버 컬렉션을 선보이거나, 톰 포드처럼 지난 2월에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던 쇼 를 돌연 취소하고 이번 쇼 기간에 F/W 컬렉션을 선보인 이들 말이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 제레미 스콧이 모스키노의 수장이 되며 선보인 첫 캡슐 컬렉션이 떠올랐다. 스콧은 맥도날드라는 대중적인 소재를 도입해 쇼 다음 날 바로 밀라노 모스키노 플래그십 스토어의 쇼윈도를 캡슐 컬렉션으로 채웠다. 안나 델로 루소를 비롯한 스트리트 패션 신의 여왕들이 그 룩을 놓칠 리 없고, 다음 날 모스키노 캡슐 컬렉션을 입고 쇼에 참석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스트리트에서 포착되어 빠르게 화제에 올랐던 일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규모 자체가 다르다. 버버리, 랄프 로렌, 톰 포드, 타미 힐피거 등은 컬렉션 전체를 온타임 형태로 구성했다. 마치 날개를 단 듯, 빠르면 바로 다음 날부터 일주일 사이에 그들의 전 세계 플래그십은 순식간에 컬렉션 의상으로 채워졌다. 그들의 쇼 직후 각 종 스타일링 현장에서 그 룩들은 러브콜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버버리의 런던 쇼가 치러진 이틀 후, 최지우가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서 입은 버버리 셉템버 컬렉션의 재킷은 고객 문의 전화가 빗발친다고. 버버리 셉템버 컬렉션 중 일부 아이템은 이미 솔드아웃되었다는 소문도 퍼졌다. 이는 몇 달 전 #NFW(뉴욕패션위크) 혹은 #PFW(파리패션위크)라는 해시태그를 단 컬렉션 피드에서 봤는데 잊을 만하니 찾아온 룩들이 마치 #TBT 를 단 것처럼 과거의 유물로 보이는 현상을 초래했고, 반면 ‘제때 찾아온 그 아이템’이야말로 신선한 샐러드와 같은 패션 명제를 수행한 승자처럼 보이며 마음에 불을 지핀 심리 효과도 한몫했다.

RALPH LAU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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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4일 저녁, 런웨이 투 리테일(Runway to Retail) 쇼를 치른 랄프 로렌 F/W 컬렉션은 대대적으로 새로운 쇼핑의 패러다임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피날레를 마치고 장막이 걷히자 방금 모델들이 워킹하며 입고 나온 그 룩들이 마네킹에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선사한 것. 그리고 지난 뉴욕 패션위크 기간에 타미 힐피거 역시 지지 하디드라는 핫한 아이콘과 손잡은 채, 흥겨움이 넘치는 F/ W 협업 컬렉션을 선보였다. 쇼 다음 날부턴 ‘타미 피어’ 쇼장에 세운 팝업 매장을 비롯해 전 세계 매장에선 #TOMMYNOW를 화두로 셉템버 컬렉션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고 말이다. 한편 온타임 쇼의 성화를 가장 먼저 지핀 버버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지난 2월 쇼를 치른 후 앞으로 브릿, 런던, 프로섬으로 나뉜 라벨을 버버리로 통합하고 남성과 여성 컬렉션을 함께 선보이겠다고 공표했었다. 이는 고객 친화적인 단순함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수장의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한 해에 두 시즌,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네 차례 치러지던 쇼를 두 번으로 줄이며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개선한 동시에 그는 앞으로 2월과 9월에 온타임 쇼를 선보이겠다고 발표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공약대로 버버리의 모든 팀은 런웨이에 오른 옷이 즉각적으로 전 세계 버버리 플래그십 쇼윈도에 걸리도록 미리 제작 공정을 완료 한 채 007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 덕에 바이어와 MD, 홍보팀은 쇼를 마치자마자 매장을 단장하고 새로운 보도자료를 내보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고. “런던은 지금 이른 아침이에요. 따끈따끈한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해드리려고 메일 드렸습니다’라고 시작하는 버버리 홍보담당자의 메일에는 다음과 같은 쇼 안내가 곁들 여졌다. ‘9월 19일 저녁 7시 30분, 기존의 켄싱턴 가든을 떠나 소호의 메이커스 하우스에서 열린 쇼는 버버리가 런웨이와 리테일 운영 방식의 변화를 발표한 이후 첫선을 보이는 여성과 남성 통합 쇼였습니다. 런웨이에서 선 보인 아이템들을 고객들이 바로 구매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컬렉션이 드디어 공개되었고요. 리젠트 스트리트에 있는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도 쇼가 끝나자마자 스 크린 영상으로 쇼를 관람하던 고객들을 위해 매장의 베일을 걷어내고 바로 9월 F/W 컬렉션을 공개하는 이벤트를 곁들였습니다. 말 그대로 ‘See Now, Buy Now’의 현장이었어요.”

TOM 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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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시간이 바로 지금 흐를 수 있도록 전통적인 패션 캘린더를 파괴하고 시곗바늘을 돌려놓은 이들. 어찌 보면 다분히 마케팅적이지만 그들은 고객들의 니즈에 부응해 새로운 세계를 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전복적인 기획에 누구보다 앞장선 톰 포드는 여성복 데뷔 쇼를 전통적인 살롱 쇼 형식으로 선보이며 이슈를 낳았고, 2016 S/S 시즌 쇼는 영상 형태의 온라인 런웨이로 대체 했다. 그는 전형적인 쇼 형식의 구태의연함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와 맞지 않는 구식의 패션 캘린더를 더는 따르지 않을 거예요. 매장에 옷이 도착하는 시기에 맞춰 쇼를 열면 고객들은 쇼에 등장한 옷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살 수 있고, 브랜드 입장에서는 매출 신장에 도움이 되겠죠.” 그의 말은 패션계가 직면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사람들은 SNS를 통해 더 많은 패션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좋아요’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적극 표명한다. 한편 오랜 경기 침체로 인한 패션계의 불황은 꿈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무언가 시도하기 어려운 불안감이라는 족쇄를 채운 현실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대의 요구에 기민하게 대응하려는 디자 이너와 패션 기업의 자구책이 ‘See Now, Buy Now’를 소환했을지도 모른다. SNS로 패션을 접하는 문화에 길들여져 있으며, 당일 도착 택배와 사나흘이면 국내에 바잉되지 않은 아이템을 합리적인 가격에 받아보는 해외 직구 쇼핑을 즐기는 젊은이들에겐 새로운 패션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이를 반영하듯 네타포르테는 모스키노 캡슐 컬렉션과 톰 포드 셉템버 컬렉션을 온라인 판매 중이라는 이슈 메일을 보내왔다. 톰 포드 담당자에 따르면 9월 7일 뉴욕 쇼가 발표된 직후, 한국 시간으로 9월 8일 쇼 의상을 국내 매장에서 판매하기 시작했고 그 판매 추이를 지켜 보는 중이라고 했다. 한편 모스키노 코리아의 MD 구성은 과장은 캡슐 컬렉션의 반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벌써 6번째 캡슐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여전히 많은 고객이 관심을 보여요. 쇼가 끝남과 동시에 바로 매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 보니 고객들의 피드백이 빠른 편이며, 다른 제품에 비해 소진율도 상당히 높습니다. 무난한 제품을 선호하는 고객에게도 이 캡슐 컬렉션의 속성을 설명하면 거부 반응 없이 구매하기도 하죠.”

TOMMY HILFI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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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영역을 확장한 패션계는 가장 힘센 자가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대처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라는 진화론의 한 대목을 입증하고 있다. 아무리 거대한 대기업이라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될지 모르는, 그래서 젊고 새롭게 도약하는 신진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긴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생산 프로세스가 맞물려 있어 소규모 브랜드는 이를 감당해내기 힘들다. 거대한 패션 제국들이 인시즌 (In Season) 현상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신진 디자이너들은 관망하는 형태. 하지만 생각을 달리해 캡슐 컬렉션과 같은 작은 규모로 시도해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국내의 한 디자이너는 몇 달 전부터 시즌 트렌드를 점치며 한 시즌의 호흡을 이끌어갈 ‘될 만한 아이템’을 제작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내년엔 매달, 즉각적인 컬렉션을 만들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이지 컬렉션을 이끄는 카니예 웨스트 역시 ‘더 이상의 패션 캘린더는 없으며, 일 년에 여섯 번 쇼를 선보일 것이다’는 의지를 트위터를 통해 공표하기도 했으니, 앞으로 쇼 스케줄은 심한 혼란기를 겪어 더 ‘즉각적’이고 ‘개인화’가 되지 않을까. 그만큼 대중과의 교감과 교류는 빈번해지고 말이다. 한편 반대의 의견도 있다.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가 뉴욕 패션위크의 형식을 새롭게 고민하고 있는 반면에 파리의상조합은 다른 의견을 냈다. “현명한 고객은 기다림에 익숙하며, 이 역시 고객의 욕망을 증폭시킨다. 또 장인이 전통적으로 제작 하는 시스템에선 제작 시기를 앞당기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것이 카피 제품을 피하는 적절한 방법도 아니다” 라고. 순간, 패션위크가 열리는 파리행 비행기 안에서 본 영화가 떠올랐다. 현대의 마술사들이 등장한 <나우 유 씨 미 2>에서 그들은 ‘본다는 것은 곧 믿는다는 것’이 라는 일루저니스트들의 명제를 이용했다. 그렇다면 패션에 있어서 쇼를 본다는 것은? 마치 마술사처럼 대중의 마음을 훔치고 감탄을 이끌어내며 그들의 판타지를 즉시 ‘실재’로 뒤바꿔 매장에 내놓는 일일까? 패션이 아이템과 트렌드를 넘어 스피릿을 담아야 한다는 건 어떤 시대에도 불변하는 진리다. 그런 면에서 올봄, 아제딘 알라이아가 패션 캘린더보다 한 달이나 늦게 독자적인 F/W 컬렉션을 선보이며, “옷의 완성도를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라고 한 것은 패션계에 경종을 울린다. 단순히 발 빠르게 선보여 더 많이 팔기 위해서가 아닌, 효율성과 시대정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고려하며 고객들의 니즈에 부응하는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온타임 캘린더로 발을 옮기는 변화의 가치일 테니까 말이다. 그 결과 이번 파리 패션위크에선 온타임 쇼를 진행한 디자이너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다음 시즌의 판도는 또 어떻게 될까. 일단 H&M 스튜디오가 이번 파리 쇼를 건너뛴 채, 내년 2월의 온타임 쇼를 계획 중이라고 하니 파리 역시 어떤 변화를 겪을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리고 현재까지 스코어로 보자면 온타임 쇼를 선보인 브랜드들은 예상대로 즉각적인 판매의 호조를 보이고 있다. 중요한 건 패션이 직면한 격동의 시대에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게 패션의 다채로운 움직임을 기대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MOSCH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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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박연경
PHOTOS
INDIGITAL, COURTESY OF BURBERRY, RALPH LAUREN, TOM FORD, MOSCHINO, TOMMY HILFIGER, NET-A-PO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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