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짓는 예술가

W

돌과 이끼, 흙과 나무, 바람은 디자이너 한혜자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으며 아트-투-웨어 패션의 원천이 되었다.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온 40여 년의 발자취를 뒤돌아보는 그녀의 아카이브 전시, <Tactus 촉각>이 119일까지 DDP 둘레길에서 펼쳐진다.

한혜자선생님 고해상
<W Korea> 최근 몇 년간 컬렉션을 진행하지 않았다. 서울디자인재단에서 아카이브 전시 제안을 받았을 때 어땠나?
한혜자 지난 4년간 컬렉션을 하지 않고 패션을 떠나 있었다. 옷을 만드는 게 너무 좋았고, 40년 넘게 패션 일을 했지만 왠지 내 인생이 옷으로 마감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당시 휴식을 결정했다. 60대에 접어들고 인생 4막을 맞이해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 박물관도 다니고, 프로방스며 뉴욕이며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지난해에는 문호리에 집을 완성해 강이 보이는 곳에 작업실도 만들었다. 산과 나무, 들꽃으로 가득한 작은 마당과 갈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오솔길을 수시로 찾는다. 이번 전시는 지난 시즌 진태옥 선생님이 전시를 한 후 나를 추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한편으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작업한 아트-투-웨어 80여 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 준비로 바쁘지만 기존의 의상을 새로운 디스플레이 방법으로 보여주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40여 년간 한자리를 묵묵히 지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이끌어온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일까?
이 일을 좋아한다는 아주 단순한 열정이 아닐까? 이번에 작품 정리를 하면서 ‘내가 정말 미친 듯이 이 일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트-투-웨어랍시고 괴상하고 이상한 것도 만들고, 수세미 머리 인형도 만들고 말이다(웃음). 스파(SFAA) 컬렉션을 했을 땐 정말 열심히 했다. 하고 싶은 옷을 만들 수 있다는 기회 자체가 행복했다.1 972년 이따리아나 론칭 이후 지금까지 함께해준, 아틀리에의 조력자들을 빼놓을 수 없다. 첫 부티크를 이화여자대학교 앞에서 했는데, 당시 학생이었을 때 처음 내 옷을 입은 고객들이 지금도 여전히 날 찾고, 그 딸의 딸까지3 대가 함께 찾아올 때도 보람을 느낀다.

첫 패션 모멘트는?
내가 디자인을 시작했을 당시는 ‘패션’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을 때다. 국민학생 때 갖고 놀 게 없어서 성냥개비에 담뱃갑 속 은박지와 비닐을 벗기고 종이를 촘촘하게 잘라서 옷을 입히며 놀았던 게 기억난다. 겨울에는 학교 친구들의 울 스웨터에 달린 방울을 떼서 옷을 만들기도 했다. 아마도 그게 내 디자인의 시작이 아닐까?

Cantabile(노래하듯이), 아크릴 위에 와인잔을 낚싯줄로 엮어 만든 드레스. 1995년 작.

Cantabile(노래하듯이), 아크릴 위에 와인잔을 낚싯줄로 엮어 만든 드레스. 1995년 작.

이번 전시 제목이 ‘촉각’이다.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재해석한 질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들었다. 주제를 정하게 된 계기와 자연의 테마를 선택한 과정에 대해 듣고 싶다.
80년대에 목화 아가씨를 모델로 코튼 쇼를 진행한 때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때부터 내가 촉감이 느껴지는 소재에 흥미를 가진 것 같다. 광목을 물에 빨면 꾸깃꾸깃해지는데, 통에 물감을 풀어서 붓 대신 빗자루로 울퉁불퉁한 광목에 칠을 하거나 그림을 그린 옷으로 패션쇼를 했다. 뭔가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일종의 객기였을 거다. 시폰에 자수와 입체적인 엠브로이더리를 넣고 주름을 잡는 ‘크링클’도 만들었다. 지금도 텍스처 표면 작업을 하면서 질감과 소재를 표현하는 게 가장 재미있다. 보고만 있어도 좋을 정도다. 자연은 그 자체로 내 영감의 중심이다. 땅, 흙, 지층, 화석, 이끼, 작은 이슬 등 오랫동안 축적된 자연의 요소를 옷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민한다. 아마 이번 전시장에선 지구를 형상화한 커다란 작품도 만나볼 수 있을 거다.

지금까지 선보인 아트-투-웨어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을 고른다면?
2011년 이용백 작가와 함께한 ‘ Angel Soldier, The Lost Day’. 현실의 처절함, 치유와 희망 등 다양하게 교차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이었다.

좋아하는 예술 작가는?
루이즈 부르주아. 아틀리에 한쪽 벽에 그녀의 작품도 있다. 굉장히 원초적이고 솔직하고 대담한 그녀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한 예술가가 자신의 인생을 작업을 통해 표현할 수 있고, 마음 저리고, 슬픈 사연을 공유하는 방식이 좋다. 난 보기에 예쁘고 아름다운 것보다는 그런 작품과 작가 세계에 끌린다.

현재 패션계는 패스트 패션에 사로잡혀 있다. 그 뒤에서 묵묵히, 장인 정신을 갖고 자리를 지켜온 디자이너로서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나는 SNS는 물론이고, 열쇠, 자물쇠도 잘 못 다루는 기계치이자 컴맹이다. 현실적으론 상업적인 것을 거스를 수 없고 대중과 타협해야 하지만,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감성을 진지하게 담은 것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내가 만든 디자인에 책임을 지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국내의 젊은 디자이너들을 위한 멀티숍을 열어보면 어떨지 고민 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가장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만 하면 좋겠지!

에디터
백지연
포토그래퍼
JOE YOUNG SOO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