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하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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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하게 커리어를 쌓을 필요도, 비약하여 존재감을 으스댈 필요도 없다. 느긋한 행보를 보여도 내공을 증명할 수 있는 스물셋 여배우, 심은경.

풍성한 퍼 장식의 코트는 프라다, 스니커즈는 나이키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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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와 스크린에 눈에 띄는 소녀들이 등장했을 때, 심은경은 그들과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그해 한국 영화 흥행을 이끈 작품이 심은경의 필모그래피에 있고(<써니> <광해>), 오랫동안 제작되지 못한 비운의 프로젝트는 심은경이 자랄 때를 기다렸다는 듯 상업 영화로 날개를 달았다(<수상한 그녀>). 그녀는 아버지를 죽인 살인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내면의 광기를 터뜨리는 얼굴로 나타나거나(<널 기다리며>), 목소리만으로 다가오기도 했다(<로봇, 소리> <서울역>). 이제는 귀여운 영화 <걷기왕> 차례다.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지 종잡을 수 없지만, 심은경은 이미 우리가 믿을 만한 근거를 넘치게 보여줬다.

니트 스웨터는 이로, 메탈사가 섞인 니트 팬츠는 플리마돈나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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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고 들었다. 어디서 어떻게 보냈나?
도쿄에 20일 있었다. 일주일은 가족과 함께, 나머지는 홀로 보냈다. 현지인처럼 지내보고 싶어서 유명한 곳보다는 숨은 곳을 찾아다녔고, 지하철을 많이 탔다. 에어비앤비 숙소에 묵으면서 빨래도 하고. 일본은 최근 2년 사이 열 번 안팎으로 다녀왔을 정도로 좋아한다.

굉장한데? 그럼 일본 웬만한 도시는 다 가봤나? 일어도 웬만큼 하고?
아니다. 도쿄에 제일 자주 갔고, 작년엔 오사카와 교토에 가봤고… 뭐에 한번 꽂히면 그것을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성격이라. 일본어는 잘 못한다고 봐야 한다(웃음). 관광용 일본어를 하는 정도?

이번 도쿄행에선 뭐에 꽂혔나?
다이칸야마에 자주 갔다. 츠타야라는 서점이 인테리어도 모던하고, 건물 세 동마다 각각 다른 성격의 책을 팔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거기서 음악 CD를 대여할 수 있는데, 대여하기 전에 미리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게 가능하다. 음악 들으면서 일기 쓰고 그랬다. 이것저것 디자인이 예쁜 잡지들 좀 샀고, 70~80년대 록밴드 사진집도 구매했다.

고전 소설을 좋아한다고? 최근 어떤 책을 읽었나?
최근에는 촬영하느라 많이 읽지는 못했고, 영화 <동주>가 너무 좋아서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좀 봤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쓴 나쓰메 소세키는 참 좋아하는 작가다. 예전에 본 그의 소설 <마음>을 요즘 다시 읽고 있다. 인간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건조하게 툭툭 내뱉는 말투에 매료됐다. 감정을 많이 담은 문체가 아니라 작가가 조금은 관조적인 시선을 유지해서 그런지 내가 한 번 더 생각하고 집중하게 만드는 것 같다.

서울에 와서부터는 바로 <걷기왕> 제작 보고회 등 홍보 일정에 참여했다. 역할을 맡은 주인공 소녀가 선천성멀미증후군을 앓는다는 점이 독특한 설정이다.
감독님이 예전에 어느 휴먼 다큐에서 비슷한 증세를 앓는 할머니를 봤다고 한다. 조금만 뭘 해도 멀미가 나고, 심하면 구토를 하는 할머니셨다는데. <걷기왕>의 만복이 역시 그런 증세 때문에 차를 못 타서 걷는 것 하나는 자신 있는 인물이다. 왕복 4시간을 걸어서 등교하다가 선생님이 경보 재능을 발견해줘서 육상 선수에 도전하게 된다. 별로 유용하지 않은, 어찌 보면 장애에 가까운 재능을 타고난 아이의 성장담이다. 감독님은 만약 그런 아이가 꿈을 가지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하는 궁금증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설명해주셨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어떤 인상을 받았나?
메시지가 명확했고, 뻔하지 않은 엔딩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내 중고등학교 시절도 떠올랐다. 난 어렸을 때 어땠지? 나도 이런 생각을 했던가? 공감이 되고 위로도 받았다. 애초부터 감독님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록밴드에 관한 다큐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을 연출하신 분이다.

트위터를 보니 문학 관련 봇의 문구를 리트윗하곤 하던데. 청춘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는 영화라면, 마음에 와 닿는 대사도 있겠다.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내레이션이 예고편에도 나온다. 달려가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더라도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뭔지 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영화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를 환기시켜줄 수 있는 작품이 되리라 생각했다. 예전부터 이런 편안한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 <써니>의 나미도 평범한 고등학생이긴 했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가장 회자되는 장면은 나미가 빙의해서 확 달라졌을 때다. <수상한 그녀>에서도 할머니 연기를 했으니 일반적이진 않은 설정이었다. 심지어 카메오로 출연한 <부산행>에서는 좀비로 나온다(웃음).

러플 장식의 풀오버 니트는 디올, 클래식한 워싱의 데님 팬츠는 리바이스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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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에서는 분량이 짧아도 영화 초반, 본격적인 기운을 알리는 역할이어서 인상 깊었다. 한국에서 배우로 사는 동안 그냥 귀신도 아니고 좀비 연기를 할 줄 누가 알았겠나? 몸을 꺾고 잘 쓰는 연기를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나?
<곡성>에도 참여한 박재인 안무가가 좀비들의 몸 연기를 총괄 지도했다. 그분을 여러 차례 만나 레슨을 받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희열을 느꼈다. 우선 레퍼런스가 될 만한 영상을 보여주셨다. 좀비 작품만이 아니라 사람의 기괴한 몸짓을 담은 영상도 있었다. 그런 다음 댄스 그룹의 안무를 따라 하듯이 짜여 있는 동작을 보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지금 스물세 살이니 학창 시절이 그리 오래된 과거는 아니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어떤 감정이 지배적인가?
좀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 촬영이 없을 때는 어떻게든 출석하려고 노력했고, 나름 시험 공부도 열심히 하는 등 즐거웠다. 어머니께선 항상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며 내 나이다운 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씀해주셨다. 반면 어릴 때부터 연기를 했으니 굳이 어린 나이에 느끼지 않아도 될 법한 감정을 느끼거나 경험을 해봤다는 생각이 있다. 너무 미리 경험해서 어린 마음에 상처도 받고, 어떤 때는 우울함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지금의 나였다면 좀 더 감당할 수 있었겠지만.

친구들과 있을 때는 어떤 사람인가?
잉여, ‘오덕’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친구들에게선 아르바이트 월급이 올랐다든지, 본인이 일하는 매장에서 옷을 사면 직원 할인 50%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각자 활기차게 잘 사는 듯한데 난 툭하면 졸리거나, 늘어지거나, 어디 멀리 안 가고 동네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거나 하니까 괜히 늙은이가 된 기분일 때도 있다. 다행히 가장 친한 친구도 나와 좀 비슷하다. ‘야, 좀 지치지 않니?’ ‘응, 집에 가자’ 뭐 이런 식이다.

낯을 심하게 가리다가도 연기할 때는 완전히 달라져서 감독들이 놀란다고 들었다. 어려서 많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상상력으로 극복했나?
늘 ‘내가 이 인물이라면 어땠을까’부터 시작한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가장 기본적이기도 하다. 캐릭터와 나를 따로 떨어뜨려놓지 않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연출자와의 대화다. 모든 작품에는 연출자가 원하는 캐릭터가 있을 테고, 연기는 내 것만 주장해서 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맞춰가고 대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칭찬받을 때 더 잘하는 편인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할 때 오기가 생겨서 더 잘하는 편인가?
난 오기라는 게 생길 수 없는 성격이다(웃음). 마음이 약하고 무른 것 같다. 혼이 난다든지 타격을 입으면 힘이 안 생기고,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누군가 칭찬을 해주면 더 신나서 한다. 그만해라 할 정도로 신이 나서 이것저것 하고 아이디어도 막 떠오른다!

적어도 촬영 현장에서 심은경이 누군가에게 혼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현장에서 어떤 경우에 좌절하거나 무력해지곤 하나?
생각한 대로 연기가 안 나올 때. 어떤 때는 모든 게 너무 어렵다고 느껴지면서 아무 생각도 안 들고 멍해진다. 그럴 경우 너무나 죄송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안 돼서 접어야 할 것 같다고 제작진에게 말한다.

그런 일은 작품의 장르와 상관없이 벌어질 수 있는 일인가?
그렇다. 심지어 대체로 편안하게 임했던 이번 <걷기왕>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엉엉 울면서 걸어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엉엉’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헷갈렸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간단하게 울어버리면 되는 문제지만, 그날은 어떻게 해도 제대로 안 나올 것 같아서 좀 더 생각해보고 다음에 촬영하면 좋겠다고 했다.

탈착 가능한 목 장식이 특징인 톱은 질 샌더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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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임필성 감독의 <헨젤과 그레텔> 개봉 즈음, 주인공 천정명 씨가 언론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앳되어도 너무 앳된 심은경과 진지희가 촬영 들어가기 전에 감정 잡는 것 보고 깜짝 놀랐다고. 나 역시 그때 장르물을 소화하는 어린 소녀를 보면서 ‘한국 여배우의 미래가 저기 있네’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 작품 욕심이 좀 있는 편이었다. 셈도 있었다. 매번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전작과 겹치는 장르나 캐릭터는 피하려고 했고, 커리어를 잘 쌓아 성공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수상한 그녀>로 백상예술대상을 비롯한 몇몇 영화제에서 큰 상도 받고 하니까 내 스스로 뭔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13년을 연기한 탓에 약간의 권태감도 있었고,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만 믿고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채 작품에 임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내가 과연 연기를 계속해도 되는지 의문이 생겼다.

의외의 얘기다. 성공이 뭐라고 생각했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연기 잘하는 여배우가 되는 것. 최고의 여배우로 인정받는 게 내 꿈이었다.

그러다 생각보다 반응과 평가가 좋지 못한 작품도 생기면서 태도에 제동이 한번 걸린 건가?
평가 때문도 있지만, 내가 나에게 실망을 좀 했다. 너무 나답지 못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꾸며낸 듯한 연기를 한 시간이 있었다. 뭔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게 티가 나고. 연기뿐만 아니라 나의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고민하면서 초심을 떠올려봤다. 아직까지도 의문에 대해 답은 못 구한 상태인데, 그래도 힘들었던 시간이 독보다 약이 됐다.

초심이라면 열 살 무렵 마음에 품은 자세를 말하나?
어릴 때는 연기 자체가 너무 좋았고 즐겼다. 대본이 낡아질 때까지 읽었다. 그때를 떠올리면서 역시 난 연기할 때 가장 보람차고 진정한 내가 된다고 다시 한번 느꼈다. 이젠 연기력을 보여주고 싶다거나 늘 새롭게 변신하겠다는 강박보다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게 더 우선순위다. 뭔가 보여주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 같은 걸 다 내려놓기로 했다.

내려놓는다는 건 어마어마한 경지다.
내가 힘든 이유는 자신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학창 시절 즐거운 기억도 있다고 했는데, 그래도 어릴 적부터 연기 하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산 건 맞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며 살아야지 왜 뭔가를 갈망하고 사로잡혀 사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또 나보다 연기 잘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 이젠 내 꿈을 높이지 말자, 흘러가는 대로 살자 싶다.

그저 매번 주어진 것에 충실하며 살고자 하는가?
그렇다. 예전에는 내 미래를 많이 그려봤지만… 어떤 작품을 하게 되는 것도 다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이든 억지로 기회를 잡아서 하면 잘 안 맞거나 틀어지는 것 같다. 내가 할 작품은 어떻게든 하게 되어 있다.

<걷기왕> 말고도 운명처럼 만나 촬영을 마친 작품이 대기 중이다.
여름엔 최민식, 곽도원 선배님과 <특별시민>을 촬영했다. 서울 시장을 준비하는 캠프에 청년혁신위원장으로 합류하는 역이다. 제대로 된 성인 역할을 처음 맡은 셈이다. 사극인 <궁합>에선 옹주로 나온다. 로맨틱 코미디 느낌이 있지만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다룬다.

만약 스스로 작가나 감독이 되어 심은경을 쓸 수 있다면, 어떤 역할을 맡겨보고 싶은가?
조금은 염세적인 캐릭터? 나에게 그런 면이 살짝 있는 것 같은데, 아직까진 해보지 못했으니 내 실제의 모습과도 잘 맞게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타락천사> 같은 영화도 좋아한다. 여명의 파트너로 나오는 이가흔처럼 펑키한 분장을 하고 그녀 같은 캐릭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다.

예전부터 애어른 같다는 소리 좀 들어봤나?
많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 멍청한데…

에디터
권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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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YEONG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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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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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화, 최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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