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패션을 규정한 파트너십은 생 로랑과 루루 드 라 팔레즈로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뎀나 바잘리아와 로타 볼코바가 있으니까. 동시대의 욕망과 스타일을 반영하는 슈퍼 스타일리스트로 떠오른 로타. 그녀는 어떻게 우리 세대의 패션 결정권자가 되었을까.

0916-WM-LOTT-07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의 발렌시아가 데뷔쇼가 있기 며칠 전인 지난해 10월의 파리. 32세의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는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디자인 스튜디오에 있었다. 뎀나가 디자인한 모델들의 룩을 훑어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스트랩이 무수히 이어지는 디아망테 샌들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자신의 허리 라인에도 둘러보는 로타. 이 슈즈는 런웨이에 내보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미 그 슈즈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진짜 근사해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시선은 발렌시아가의 새로운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와 강렬한 메탈릭 사이 하이 부츠로도 옮겨갔다. 일하는 동시에 마치 쇼핑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녀의 옷에 대한 애정 어린 열정은 주변까지 물들이는 전염성을 지녔다.

로타의 시그너처인 검정 뱅헤어와 창백한 피부, 구부정한 자세 등은 이미 패션 인사이더들에겐 친숙하다. 그녀는 ‘대세’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뎀나의 파트너로서 베트멍의 컬렉션을 네 차례나 스타일링한 것 외에 직접 모델로 런웨이에 서기도 했다. 발렌시아가 데뷔쇼에선 직접 워킹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클론격인 창백한 얼굴의 독특한 동유럽 모델들이 등장했다.

오늘날 패션계를 이끄는 가장 핫한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 듀오인 뎀나 바잘리아와 로타 볼코바.

오늘날 패션계를 이끄는 가장 핫한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 듀오인 뎀나 바잘리아와 로타 볼코바.

볼코바는 발렌시아가보다는 전형적인 ‘베트멍 우먼’에 더 가깝다. “베트멍의 첫 프레젠테이션에선 그녀에게 지불할 만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랑 함께 일하자고 부탁할 수가 없었어요.” 뎀나가 말한다. “하지만 쇼룸에 들른 로타는 컬렉션을 손질해주면서 이렇게 말했죠. ‘디자인은 정말 마음에 들지만 스타일링이 완전 별로야!’라고요.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시즌부터 우린 그녀에게 일을 맡길 수 있었죠.”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어갔다. “로타는 자신이 원했기 때문에 참여한 일이라고 얘길 했죠. 사실 그녀는 프라다를 좋아하지만, 이를 미학적으로 굳이 베트멍과 연결시키지 않는다는 점이 정말 흥미로웠어요. ”

로타는 단순히 베트멍을 대표하는 포스터걸 이상으로 특별한 뮤즈이자 디자이너의 비전을 구체화하는 일종의 창조적 촉매제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1970년대 이브 생 로랑과 루루드 라 팔레즈, 1990년대 톰 포드와 카린 로이펠드 혹은 헬무트랭과 멜라니 워드처럼 말이다. 이 명민한 스타일리스트들은 디자이너의 개성 강한 스타일에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한 시대의 패션까지 규정했다. 로타 역시 마찬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로타를 단순한 스타일리스트로 규정하는 처사는 그녀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발렌시아가와 베트멍 쇼를 위한 모델 피팅 현장에 늘 등장하는 그녀는 컬렉션의 옷감과 모든 디테일을 일일이 점검한다. 종종 자신이 직접 피팅해보면서 말이다. 그 과정을 통해 어느 누구도 쉽게 소화해내지 못할 독특한 스타일링을 찾는 것이다. “전 정말이지, 룩과 아이템 자체에 흥미가 많은 것 같아요.” 발렌시아가의 파리 컬렉션이 끝난 후, 런던 달스톤 인근의 레스토랑에서 만난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 뉴욕 브루클린의 부시윅에 견줄 만한 런던의 자유롭고 힙한 장소인 달스톤, 이곳에서 잠시 친구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볼코바는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몸에 딱 붙는 후디와 트랙 팬츠를 입었다. “전 옷에 과도하게 열광하는 탐구자예요. 제게 패션은 반드시 입을 만한 것이라야 해요. 아니, 늘 그 이상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죠.”

일주일 후에 진행된 발렌시아가의 리조트 컬렉션 룩북 촬영 현장. 이날 역시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로타가 일찌감치 디자인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모델들의 머리마다 액세서리의 물결이 일었는데, 그녀만의 실험적인 스타일링은 이제 뎀나 컬렉션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또 한 명의 각광받는 러시안 디자이너이자 절친한 친구인 고샤 루브친스키 컬렉션에도 그녀의 손길이 닿아 있다. 다만 그녀는 베트멍과는 또 다른 차별화된 감각을 발휘한다. 이 남성복 디자이너 역시 베트멍 쇼, 발렌시아가 쇼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로 거리에서 캐스팅한 특이한 모델들을 캣워크에 내세운다. 그리고 로타스러운 스타일링의 결과는 오버사이즈와 언더사이즈, 길게 질질 끌리는 소매, 청키한 부츠 등이 묘하게 뒤죽박죽된 믹스 매치 스타일로 완성된다.

로타는 현재 디자이너 시스 마잔(Sies Marjan)뿐 아니라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와 ID, 도큐먼트 저널, 032c 등 임팩트가 강한 매거진의 스타일링도 맡고 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패션계는 온통 로타, 로타, 로타의 물결이다.

러시아 태생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톡 에서 자라난 로타. “그곳은 모스크바와는 다른 곳이에요. 큰 도시지만 여전히 평범하고 시골스러운, 외딴 항구죠”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화물선의 선장이었고, 어머닌 예술과 패션에 조예가 깊었다. “운이 좋은 셈이죠. 이런 가족 사이에서 자랄 수 있었으니까요. 아버진 전 세계를 여행했고, 우린 음악과 옷을 접할 기 회가 있었거든요. 당시엔 구경할 수 없었던 코카콜라도 선물로 들고 오시곤 했어요. 게다가 티나 터너 비디오랑 영국 밴드 디페쉬모드의 테이프도 말이죠!”

로타는 구소련 붕괴 후의 전형적인 빈곤 세대는 아니다. 소련이 붕괴되었을 때 그녀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녀의 마음속에 마치 대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엄청난 사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뭔가 거대한 에너지가 폭발한 것 같았어요. 붕괴 후 날마다 놀라운 기사를 접했으니까요. 나이트클럽부터 약물 문화, 유스 컬처와 패션 등 말이죠. 특히 패션은 그저 크리스찬 디올 코트를 소유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운동 (Movement)’이었어요. 어머닌 나의 특별함, 나만의 개성을 존중해주셨는데, 그건 반사회주의적인 에너지였고, 제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죠. 덕분에 뭔가 창의적인 일을 해내는 것이 절 자유롭게 해준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

볼드한 주얼리와 안경 등 거침없는 로타의 일상적인 룩이 보이는 포트레이트.

볼드한 주얼리와 안경 등 거침없는 로타의 일상적인 룩이 보이는 포트레이트.

철의 장막이 무너진 후 매거진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녀의 어머닌 알렉산더 매퀸이나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옷을 즐겨 입기 시작했다. “참, 해적 TV도 있었어요.” 로타는 90년대 위성을 통해 수많은 영화와 프로그램이 불법적으로 복제되던 때를 회상 한다. “MTV 뮤직과 <비비스와 버트헤드>와 같은 MTV에서 만든 성인 애니메이션도 볼 수 있었죠! ”

1990년대 뮤직비디오뿐 아니라, 장 폴 고티에 쇼부터 프랑스 코미디언 앙투안 드 코인 토크쇼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을 소개 하는 영국의 무정부적인 TV 쇼 유로트래시의 패션 지향적인 이미지는 어린 로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제가 처음으로 접한 리얼한 패션 경험이었어요. 완전히 낯선 방식이었죠!” 어머니의 권유로 패션을 공부하기로 결정한 그녀는 영국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하기엔 어린 나이였던 탓에 17세 때 우선 런던 의 유명 패션 스쿨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주말 3개월 코스를 시작했다. “실물 드로잉과 실크스크린 프린팅 그리고 사진 수업으로 이뤄진 주말의 패션 코스였는데, 이것저것 다 경험해볼 수 있는 아주 랜덤한 과정이었죠.” 종종 어머니와 런던을 방문했던 그녀지만, 이때부터는 스스로 모든 걸 개척해나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나만의 삶이 시작된 것이죠.” 어느 정도의 적응기를 거쳐 그녀는 사진과 파인아트를 정식으로 전공했다. “세인트 마틴 시절엔 카시포인트(Kashpoint)라는 나이트클럽을 열어 다 함께 어울리곤 했어요.” 마치 토끼굴을 연상시키는 2000년대 런던의 클럽 신, 바로 1980년대 스타일의 묵직한 신시사이저 와 일렉트로클래시 사운드트랙이 울려 퍼지는 이곳에서 그녀 의 존재감은 단연 두드러졌다. 당시 한껏 부풀린 의상과 기괴한 마스크에 심취해 있던 런던의 신진 디자이너 가레스 퓨가 카시 포인트의 초창기 쇼를 장식했고, 특이한 러시아 억양의 로타와 함께 이루는 앙상블은 그야말로 행위예술에 가까웠다. 현란한 디스코볼들이 떠다니는 가운데 사실상 클럽신의 뮤즈는 그녀 였고, 그 모습은 컬트 사진가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의 카메라에도 포착되었다.

자신과 친구들의 클럽 의상을 고민하던 볼코바는 ‘무엇을 입을 것인가?’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의류 라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패션 브랜드에 ‘로타 스켈레트릭스(Lotta Skeletrix)’라 는 이름을 붙였다.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밴드처럼 보이는 느낌 이 좋아서다. “굉장히 베이식한 라인이었어요. 스터드 티셔츠와 찢어진 진이 대부분이었죠. 당시 전 친구들과 우리만을 위한 옷을 만들곤 했어요.” 니콜라 포미체티는 당시 런던 부티크 파이 니얼 아이(Pineal Eye)와 일본의 사이드 바이 사이드(Side by Side)의 스타일리스트이자 바이어로 활동 중이었는데, 로타가 디자인한 룩들을 매장에 디스플레이하곤 했다. 또 런던 도버 스 트리트를 쇼핑하던 중, 로타는 도버 스트리트 마켓의 오너인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의 눈에 띄어 숍 한쪽 코너에 자신만의 의상을 판매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 이후 그녀는 런던과 파리에서 ‘유니섹스 맨스웨어’에 초점을 맞춘 쇼들을 스타일링했고, 2006년에는 동유럽 패션을 소개하는 ‘MAN’의 쇼케이싱과 파리 런웨이 쇼까지 맡았다. 이곳을 이끌고 있는 루루 케네디는 “그녀는 진짜 독특한 서브 컬처를 만들어가고 있었어요”라고 회상한다. “로타와 그녀의 친구들이 런던을 활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죠. 아주 강렬하고 놀라웠어요. 그들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젊은이들이에요.” 로타는 그녀의 칭찬에 겸연쩍은 미소를 보낸다. “다른 건 몰라도 진짜 재미있는 시절이었어요”라고 추억하면서.

2007년 로타는 파리로 옮겨와 독일 태생의 유명 패션 사진작가인 엘렌 폰 언워스(Ellen Von Unwerth)를 만났고, 깊은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엘렌의 화보 촬영 스타일링을 맡았어요. 처음이지만 그 과정이 굉장히 즐거웠어요. 비로소 내가 좋아하 는 일의 완벽한 일부가 된 느낌이었죠. 특히 이미지를 아트 디렉팅하는 일이 좋았어요. 내 레이블을 갖고 있을 때조차 주요 초점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쉽고 편안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 있게! ”

‘이지’, ‘내추럴’, ‘일관성’, ‘유기적’이라는 표현은 그녀가 작업 중에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그녀는 뎀나를 두고서 디자이너 라기보다는 ‘조각가’라 부른다. “우린 아주 가깝고, 특히 사고방식이 많이 비슷해요. 러시아 태생이잖아요.” 이 말은 고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우린 모두 같은 해에 태어났고, 정확히 똑같은 레퍼런스를 지니고 있어요. 타임라인이 같은, 동시대 사람들이죠!”

로타와 뎀나, 그리고 고샤의 작업이 보다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안에는 그들만의 역사와 진정성 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옷에 반응하게 만드는 열정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지금껏 성장하면서 보아온 것, 그리고 현재 접하는 흥미롭고 다양한 것을 참고로 하고 있어요.” 그녀가 말한다. “러시아에는 독특한 방식으로 옷을 입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있어요. 우린 이렇게 다양한 또 다른 관점을 보여주길 원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