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쇼핑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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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정기구독 버치박스(Birchbox)는 회원 80만을 돌파하고, 한국 화장품만을 큐레이팅하는 K-뷰티 박스까지 생겼다는 소식은 시작에 불과했다. 세상은 넓고 박스에 담을 수 있는 상품은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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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이트 클럽> 초반, 주인공(에드워드 노튼)은 이케아 카탈로그를 보며 ‘인간으로서 나를 정의해줄 식탁 세트’를 찾느라 고심한다. 그는 90년대 몰개성적인 소비 사회에서 정체성을 반영하는 소비를 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인간의 표상이었다. 그로부터 약 17년 뒤인 2016년의 미국 소비자들은 자신을 정의해줄 ‘박스’ 찾기에 열심이다. ‘정기구독 회원제(Subscription)’라는 신문이나 잡지 판매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한 박스 산업이 만들어낸 미국의 새로운 소비 풍경이다.

박스 안에 들어 있는 아이템은 실로 다양하다. 화장품, 의류, 와인, 스낵, 장난감, 책, 애견용품, 아기용품, 디자인 상품 등 여러 영역의 다양한 상품이 전문 큐레이터의 손을 거쳐 박스에 담긴다. 내용물을 비밀로 해야 박스를 받을 정기 회원들을 최대한 설레게 만들 수 있다. 두근거리며 박스를 개봉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스 안에는 정기구독료를 웃도는 상품들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기업들이 신제품을 알리기 위해 박스 마케팅을 활용하고 있어 소비자는 반사 이익을 얻는다. 경제적 이익이 클수록 설레는 마음도 커진다. 현재 회원제로 운영되는 박스 종류만 2000개. 이쯤이면 밖에 나가 쇼핑을 하지 않아도 박스만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농담이 아니다.

먹을 것부터 시작해보자. ‘블루 에이프런(Blue Apron)’은 60달러에 2인용 메뉴 세 가지를 제공하는 밀 키트(Meal Kit) 박스다. 박스를 열고 이미 다듬어진 재료를 꺼낸 다음 레시피만 따라 하면 여느 식당 부럽지 않은 ‘집밥’이 완성된다. 바스크식 양과 소고기 피페라테, 일본식 냉라면, 데리야키 연어덮밥, 여름 채소 뇨끼 등 이름만으로도 호기심이 솟는 메뉴들이다. 밥 한 끼용 식재료를 사러 슈퍼마켓에 가면 몇만원은 쓰게 되는 현실에서, 파인 다이닝의 사촌쯤 되는 일주일 치 요리를 6만원에 즐길 수 있다니, 부실했던 우리집 식탁에 대혁명이 일어난다.

커피 중독자에게 딱 맞는 박스는 시애틀에서 보내오는 ‘빈 박스(Bean Box)’다. 스타벅스의 고향이자 미국 커피 대표 동네인 시애틀에서 시작된 빈 박스는 로컬 커피점에서 로스팅한 원두 샘플을 회원에게 보내준다. 한 달에 20달러라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지만 밖에서 6번 사 먹을 커피를 줄여 집에서 12번 먹으면 된다고 위안하며 주문할 만하다.  ‘러브 위드 푸드(Love with Food)’는 전 세계의 고메 스낵을 알차게 섞은 박스를 미국 가정으로 배달한다. 남자 고객을 위한 ‘비스포크 포스트(Bespoke Post)’는 전 세계 힙스터 브랜드들의 상품을 소개하는 쇼케이스 박스다. 그래픽 노블과 만화책 팬을 위한 ‘루트 크레이트(Loot Crate)’는 캐릭터 티셔츠와 피겨를 기본으로 긱(Geek)들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품을 박스에 담는다. 음악 팬은 ‘브이닐(Vnyl)’ 구독을 통해 한 달마다 인디 밴드의 바이닐 박스를 만날 수 있다. 이 밖에 컬러링 박스, 종이 퍼즐 박스, 향신료 박스, 토트백 박스, 향수 박스, 공예품 박스, 양말 박스, 레깅스 박스, 보드 게임 박스 등 수많은 박스들이 미국 전역을 가로질러 누군가의 문앞으로 향하고 있다. 취미와 취향이 다양하니 박스 큐레이팅의 영역도 천차만별이다.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상품 정보를 챙길 여유가 없다면 박스가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박스 홈페이지에선 회원 취향을 확인하는 간단한 설문 조사가 이뤄진다. 단순한 큐레이팅이 아닌 회원 개인 취향에 맞는 큐레이팅이 관건이다. 긴가민가한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기보다 전문 큐레이터의 컬렉션에 돈을 투자하는 게 나아 보인다.

박스 구독의 재미에 빠져든 사람들은 마이서브스크립 션애딕션닷컴(www.mysubscriptionaddiction.com)에 모여 리뷰를 공유한다. 전통적인 쇼핑 과정은 번거롭기 이를 데 없으며, 링크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가 예상치도 못하는 물건을 지르는 인터넷 쇼핑은 비효율적이다. 이에 비하면 전문가들이 흥미로운 제품을 선택해 담아 구성해주는 박스 서비스는 늘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모델처럼 보이기도 한다. 앞으로 남의 탐나는 물건을 보고 어디서 샀냐고 물었을 때 어떤 박스에 들어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혹시 우리는 선물에 굶주린 것일까? 일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꼬박꼬박 박스가 기다리고 있고, 그 속에 누군가 골라준 내 취향의 상품들이 기다리고 있다면 램프가 아니라 박스에 든 요정이라 불러도 좋겠다.

에디터
황선우
칼럼니스트
홍수경
PHOTOS
GETTYIMAGE/IMAZ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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