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 컬처에 뿌리를 두거나 특별한 관심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하이패션의 새 시대를 이끌면서, 보드 문화는 서서히 그리고 깊숙이 패션 지형에 침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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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패션은 언제부터 스케이트보드라는 서브 컬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 시작이라고 짚어 말할 순 없지만 ‘스케이트보더=힙스터’라는 공식은 지금 패션계 안에서 단연 뜨거운 이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2012년 ‘패션은 완벽히 거리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선언한 에디 슬리먼이 생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고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생로랑을 맡자마자 록스타를 동경하는, 에디 맞춤형 브랜드로 생로랑을 재구성했다. 그렇다고 에디 슬리먼이 지금의 서브 컬처 패션 시대를 연 주인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던 록 음악과 뮤지션 정신의 저변에 스케이트보드 문화가 들숨과 날숨처럼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맥락에 있다는 것이다. LA에서 활약하는 밴드의 젊은 멤버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걷기 시작하며 자전거를 배우듯 스케이트보드 문화 속에서 양육되었다. 그 거리의 에너지 넘치는 문화가 숨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는 것.
에디 슬리먼은 스케이트보드를 포함해 록 밴드를 둘러싼 모든 것을 컬렉션에 투영했고, 스케이트보드용 스니커즈는 물론 스케이트보드 데크까지 만들었다. 유서 깊은 하이패션 브랜드에서 레오퍼드 무늬의 스케이트보드가 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는 록 밴드의 음악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패션, 생활 패턴, 문화가 패션을 지배하리라 예언하듯 토털 컬렉션을 만들어냈다. 에디 슬리먼이 생로랑에서 데뷔 쇼를 보인 2012년에는 뉴욕의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슈프림과 일본의 전위적인 브랜드 꼼데가르송의 첫 캡슐 컬렉션이 발표됐다. 더 정확히 말해 꼼데가르송 셔츠 라인과 슈프림의 역사적 첫 만남. 세상을 놀래킨 이 ‘희귀템’은 런던과 긴자의 도버스트리트 마켓에서만 판매되었고, 물론 완판 행렬로 이어졌다. 이때만 해도 하이패션과 스트리트 브랜드의 만남은 놀라운 이슈였고, 지금 스케이트보드 붐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스케이트보더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관련 이미지를 패션 매거진에서 앞다퉈 다루는 요즘, 그렇다면 매체의 화보 속에서 스케이터와 모델을 가장 처음 찍어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시작은 2008년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서였다. 화려함을 넘어선 쿠튀르적인 드레스를 입은 모델과 실제 스케이트보더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다큐멘터리 화보 ‘Haute Wheels’는 지금까지도 스케이트보드 신과 패션계 모두에서 전설로 회자된다. 이 작품을 찍은 사람은 실제 스케이터이자, 필름 디렉터, 사진가인 아리 마르코폴로스(Ari Marcopoulos)인데, 그는 구찌의 2016년 프리폴 컬렉션 룩으로 사진집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패션 사진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진가가 아님에도, 하이패션 브랜드 구찌의 사진을 찍은 건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취향이 이끈 새로운 시도였다. 미켈레는 구찌의 디렉터로 임명된 후 구찌의 기존 이미지를 180도 바꾼 것은 물론, 브랜드의 이미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광고의 사진가부터 교체했다. 그의 선택을 받은 이는 1990년대 날것 같은 사진의 프라다 광고로 화제를 일으켰던 글렌 루치포드. 그는 젊음의 싱그러움을 억지스럽거나 과장된 기법 없이 현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며 한 시대를 이끈 사진가다. 그리고 그가 찍은 구찌의 캠페인 영상에는 어김없이 청춘의 표상인 스케이트보더가 등장한다. 1970년대 데이비드 보위가 입었을 법한 미켈레의 2016년식 메탈릭 슈트를 입은 남자 모델은 첫신부터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좁은 실내를 신나게 질주한다. 지금 가장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하이패션 브랜드인 구찌 전반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생로랑의 에디 슬리먼이 매료된 자유분방한 젊음의 생기가 감돈다. 그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청춘의 냄새가 짙게 깔린 것. 이런저런 정황을 살펴보면, 하이패션 내에 스케이트보드 붐을 이끈 건 결국 바로 비주류, 서브 컬처에 유독 관심이 높은 디자이너들이 하이패션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가 아닐까.
하나 더 보태자면 현재 지구에서 가장 핫한 청년이자 유서 깊은 하우스 로에베의 수장, 조너선 앤더슨이 끊임없이 청춘을 기록하는 래리 클락의 열혈 팬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는 지난해 래리 클락 신작 필름 <더 스멜 오브 어스>의 배우들에게 J.W.앤더슨의 2015년 프리폴 컬렉션을 입히고 래리 클락이 찍은 사진집을 발간했다. 그 책은 파리 컬렉션 기간에 맞춰 콜레트에서 판매되었고, 슈프림과 꼼데가르송의 첫 협업 때처럼 순식간에 완판됐다. 더 흥미로운 건 이번 시즌 크리스 반 아셰의 디올 옴므 캠페인 모델이 바로 J.W.앤더슨이 동경하는 인물, 스트리트 컬처의 제왕 래리 클락이라는 것. 지금 하이엔드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이름을 걸고 앉아, 당대의 유행을 좌우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서브 컬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요소가 없는 브랜드는 심지어 뒤처지고 낡은 브랜드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면, 과연 지금 사람들이 열광하는 ‘보더 시크’, 이른바 스케이트보더 스타일은 무엇일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이 쿨한 것인지, 디자이너들이 동경하고 기록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기 때문에 그들의 옷차림이 멋있다고 여기는 것인지, 세상이 쿨하다고 여기는 그 모습의 답을 찾고자 스트리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동시대 패션이 끼치는 영향력을 가장 피부에 와 닿게 볼 수 있는 지표가 바로 4대 컬렉션 기간의 거리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사진을 체크하자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낡고, 거칠고, 자유분방한 프린트나 거친 글귀가 써 있는 헐렁한 티셔츠와 스니커즈, 비니 등 고샤 루브친스키의 사진 속 소년들이 입고 신고, 쓰고 있는 아이템 중 한두 개를 사람들은 하이패션 룩과 믹스하기 시작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스니커즈를 신고 컬렉션에 참석하는 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품위 없고, 눈에 거슬리는 현상이었다면 지금 거리에는 스포티한 아이템을 한두 개씩 믹스하지 않으면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비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심지어 하이패션 브랜드의 토털 룩을 입는 건 이제 센스 없는 사람이라는 주홍글씨를 스스로 부착한 것에 다름 아닐 정도다. 한편 실제로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는 패션 모델 나탈리 웨슬링과 빙크스 월턴, 몰리 베어의 스타일을 보면 ‘스케이트 시크’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나온다. 그들은 평소 런웨이를 내려오면 당장 보드를 타러 달려갈 것 같은 복장으로 스트리트 사진가들을 마주한다. 큼직한 후드에 보머 재킷을 입고, 보드를 타기에는 딱 적당하지만 그냥 보 기엔 약간 어정쩡한 팬츠나, 무릎까지 오는 보이시한 쇼츠에 검은색 백팩을 메고, 낡은 스니커즈를 신는다. 체대 입시생 복장의 조금 더 쿨한 버전이랄까? 반면 탁 트인 자연 아래 보드를 타기에 가장 적합한 LA의 롱보드 스케이터들의 경우에는 도심에서 보드를 즐기는 스트리트 보더들과 스타일이 꽤 다르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어 옷을 훌렁훌렁 벗게 만드는 기후적 요인도 있지만 LA의 보더들은 대체로 슬리브리스 톱에 찢어진 아찔한 쇼츠, 그리고 스니커즈 차림이 일반적이다.

 

음악에도 장르가 있듯 스케이트보드도 스트리트, 프리스타일, 램프로 나뉘는데 쉽게 말해 음악에서 팝, 록, 힙합을 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다르듯 스케이트 역시 장르에 따라 스타일이 나뉜다. 최근 SNS의 발달로 스케이트보드 영상은 다양한 채널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고, 획기적
인 스케이트보드 영상들은 매거진을 통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멋진 슈트를 입고 뉴욕의 거리를 라이딩하는 코치의 스케이트보드 영상을 비롯해, ID 매거진에서는 보드타는 패션 모델 나탈리 웨슬링의 스케이트보딩 가이드 영상과 스케이트보드 스타일링 팁 영상을 시리즈로 만들어 이목을 끌었다. 또한 지난해 러브 매거진에서는 그녀와 함께 몽환적이면서 지극히 미국적인 스케이트 영상을 만들어내 이슈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 SNS를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손 하나 까딱하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보드 문화 역시 하이패션 안으로 서서히 흡수되었고, 지금은 꽤나 깊이 침투해 있다. 외국에서와는 다르게 우리나라는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스케이트보드를 즐기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지만, 이런 영향으로 끊임없이 보더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또 그들의 스타일을 동경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어쨌든 보드에 대한 관심은 계속 커지고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이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 패션도 문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박 겉핥기 식의 가벼운 흉내 정도로는 제대로 된 문화가 안착될 수 없으니까. 시간이 흘러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결국 클래식이 되는 법. 먼 훗날 스케이트보드 스타일이라는 용어가 패션 용어 사전에 한 줄 추가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