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오트 쿠튀르 쇼의 화제는 단연 전위적인 패션 하우스의 데뷔와 90년대를 평정한 브랜드의 특급 협업 사건이었다. 이래서 유행 지난 옷도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는 건가. 이건 90년대에 20대를 보낸 세 명의 필자가 X세대의 패션을 추억하는 이야기다.

90s_dt

X세대의 쿨한 귀환  -나지언(프리랜스 에디터)
얼마 전 나는 1997년에 입었던 폴로 랄프 로렌 셔츠와 모자, 그리고 로고가 당당히 써 있는 캘빈 클라인과 베르사체 티셔츠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느라 병 날 뻔했다. 며칠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뒤적거린 결과, 결론은 허망하게도 다음과 같았다. ‘아참, 내가 다 버렸지.’ 그도 그럴 것이 재작년까지만 해도 나의 90년대는 사라진 기억이자 소멸된 기록이었다. 그 끔찍한 시절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기 싫어 스탈린보다 더 혹독하게 관련 증거물을 삭제했던 것이다.

1993년, 칼 라거펠트가 “오늘날의 패션은 디테일보다는 태도에 관한 거다”라고 선언했듯이 생각해보면 90년대는 패션의여러 경계를 허물었던 자유분방하고 지적인 시대였다. 모델들은 무대 뒤에서 J.D. 샐린저를 읽었고 스트리트 문화는 런웨이에 침투했고 땡전 한 푼 없었을 때 입던 옷 그대로 입고다닌 커트 코베인과 코트니 러브의 그런지 룩은 동경의 대상이 됐으며 스포티즘 열풍으로 실용적이고 편안한 룩이 유행했다.

90년대에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심플한 컬렉션을 보면서 지루하다고 나가버린 평론가들, 레이어링한 플란넬 셔츠와 오버사이즈 재킷, 초커, 닥터마틴과 버켄스탁으로 만들어낸 페리 엘리스의 그런지 룩을 보고 마크 제이콥스를 잘라버린 간부들이 얼마나 따분한 인간들이었는지 이제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건 이거다. 등 뒤에 安全地帶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써있던 내 안전지대 블랙 나일론 항공점퍼, 지금 입으면 X세대의 쿨한 귀환을 장식해주고도 남을 그 소중한 옷을 누가 버린 거야? 엄마가 버렸어?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브랜드 – 이숙명(칼럼니스트)
2000년에 밴쿠버로 어학연수를 갔다. 동북아 3개국 연수생이 원주민보다 많은 동네였다. 서양 사람 눈에는 아시안이 다 똑같아 보인다더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인과 캐나다인을 구분하는 것보다 더 쉽게 한중일 여자를 구분했다. 뱅헤어는 일본 여자, 어딘가 수수하면 중국 여자, 이스트팩을 메면 한국 여자였다. 1990년대 내내 “한국 브랜드라 이름에 ‘동양’이 들어간다”는 복학생 개그의 대상이 된 이스트팩은 그렇게 유행의 말미 태평양 건너에서까지 한국인의 국민 가방으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 시대였다. 브랜드는 적었고, 유행의 수명은 만리장성처럼 길었으며, 우리는 농장의 양떼처럼 목자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몰려다니는 착하고 멍청한 패션 키드였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브랜드가, 그때의 스트리트 룩들이, 언젠가는 부모 세대의 눈썹 문신이나 나이아가라 펌, 허벅지가 새하얗게 워싱된 스판덱스 가득 섞인 부츠컷 진처럼 구시대의 유물로 남게 될 수도 있겠구나. 그랬는데, 짜잔, 베트멍이 나타났다. 우리 X세대 친구들은 스타일의 무덤에 안치되기까지 좀 더 시간을 벌었고, 우리가 아직 볼이 발그레하던 20년 전 사진들을 좀 덜 부끄러워하며 꺼내 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지갑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베트멍 덕분에.

 

나의 파란만장한 90년대 패션 다이어리 – 명수진(패션 컨텐츠 크리에이터)
마돈나는 란제리를 입고 무대 위에 오르고, 양말만 신은 채로 누드 화보집을 내기도 해서 감히 중학생이 좋아한다고 커밍아웃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존재였지만, 데비 깁슨이나 나아가 카일리 미노그 정도는 괜찮았다.

대학 입학 후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선배들의 새빨간 립스틱이었다. ‘트윈케익’으로 완성한 매트한 벨벳 감촉 피부에 빨갛다 못해 검붉은 입술은 미녀를 양산하는 비밀병기와도 같았다. 거기에 블랙, 그레이, 베이지 컬러의 정장을 입었으니 완전히 지적인 모습일 수밖에. 그런 정장에 어울리지 않게 굳이 ‘이스트팩’ 혹은 ‘아웃도어’의 배낭을 메는 것은 대학생임을 과시 하는 일종의 표식이었는데, 그것도 곧 한국에 상륙한 프라다의 나일론 백팩, 즉 포코노 백으로 대체되면서 ‘90년대의 미니멀리즘’을 찬란하게 완성하게 되었다.

얼마 전 나는 나이의 앞자리 수가 3에서 4로 바뀌는 경험을 했는데, 같은 시대를 경험한 이들이 여전히 힘차게 활동하고 있기에 힘이 난다. 셀린의 디자이너 피비 파일로(1973년생)는 우리 세대가 경험한 90년대의 미니멀리즘을, 베트멍의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 (1981년생)는 유스컬처를 멋지게 재현하고 있다. 90년대 해외 패션 잡지에서 줄기차게 보아오던 아제딘 알라이아와 베르사체의 ‘보디컨셔스 룩’을 입은 신디 크로퍼드, 나오미캠벨, 클라우디아 시퍼 등 슈퍼모델의 얼굴에는 이제 주름이 많이 생겼지만 카리스마만큼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데비 깁슨과 카일리 미노그의 옛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던 바시티 재킷, 체크 셔츠, 하이웨이스트 데님 팬츠, 컴배트 부츠 등의 패션은 깜짝 놀랄 정도로 유사한 모습으로 현재의 런웨이 위로 옮겨왔다. 90년대를 관통하며 10대를 보낸 이들의 에너지는 여전히 힘차고 호기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