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김종관과 배우 한예리는 두 편의 영화를 연이어 찍었다. <최악의 하루>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여자 은희는 말갛고 해사한 얼굴로 슬쩍슬쩍 거짓말을 한다. 두 사람의 합작이다.

한예리가 입은 긴 소매의 시폰 소재 슬릿 장식 톱은 코스 제품. 김종관 감독이 입은 보트넥의 니트 풀오버는 코스, 감색 슬랙스는 카이아크만 제품.

한예리가 입은 긴 소매의 시폰 소재 슬릿 장식 톱은 코스 제품. 김종관 감독이 입은 보트넥의 니트 풀오버는 코스, 감색 슬랙스는 카이아크만 제품.

누군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 사람을 따로 만난 이들이 그에 대해 증언하는 이야기는 어떤 일관성을 가질까? <최악의 하루>는 하루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남자 세 명을 만나며 제법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여자 ‘은희’의 이야기다. 그리 뛰어나지는 못한 배우인 그녀는 자신의 삶 속에서 슬쩍슬쩍 연기를 하며 산다. 길에서 처음 만난 외국인, 오래 사귀었는데 먼저 데뷔해버린 배우 남자친구, 자신에게 집착하는 옛 남자 앞에서 각기 다른 어휘와 말투, 표정의 근육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희는 진실하지 못한 사람일까? ‘우리는 모두 은희를 만났다’는 영화 티저 카피의 서술은 그래서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흩어지고 미끄러져 내리는 고백 같다. “은희는 관계 속에서 성격을 바꾸고 거짓말도 하는 인물인데, 너무 밝은 에너지를 발산하기만 하는 배우가 연기했다면 1차원적으로 보일 수 있었을 거예요. 대신 차분한 발성과 조곤조곤한 어조를 가진 사람이라면 의뭉스러워 보여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종관 감독에게는 그래서 한예리여야 했고, 이 배우에게서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여자 은희가 탄생했다.

두 사람이 더블유의 스튜디오에 모인 건 <최악의 하루>가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축보가 날아든지 1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영화 평론가와 영화 전문 기자들이 만든 단체인 ‘국제비평가연맹’이 칸, 베를린, 베니스 등 주요 국제영화제에 심사위원단을 파견해 참신한 재능과 미감을 보이는 영화를 골라 수여하는 상이다. 조명을 받으며 카메라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가운데 감독 편의 공기가 어색하게 굳어져가는 사이, 한국 무용을 전공한 배우는 나긋 나긋 몸을 움직이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예리 씨가 무용을 한 걸 알고 있으니까 그 점도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영화에서 은희가 가장 솔직하게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은 서로가 서툰 언어로 이야기하는 일본인 작가거든요. 말로는 유창하게 거짓말하는 사람들도 몸으로는 진심을 숨기지 못하곤 하잖아요. 춤이야말로 그런 언어 같아요.” 김종관 감독의 말대로, 서로 얼마나 돈독한지에 대해 애써 언급하 지 않아도 두 사람의 사이가 충분히 편안하고 친근하다는 건 몸의 각도와 제스처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춤에서 표현하는 감정은 연기처럼 디테일하지는 않죠. 대신 몸으로 한 번에 폭발하듯 드러내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 견디며 에너지를 착착 쌓아나가는 게 힘든 것 같아요. 연기는 상당히 다른 과정이지만, 그런 경험에서 트레이닝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한예리는 연기를 시작한 후로도 여전히 무용 공연 무대에 서고, 예능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해 방송 분량에 맞게 편집한 전통 무용을 보여주기도 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 비밀 무사 척사광의 액션이 춤추듯 우아해 보였다면 아마 이 배우가 잔근육을 단련해온 방식 때문이었을 거다.

장편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 그리고 <폴라로이드 작동법> <낙원> 같은 단편에서 남녀의 만남을 둘러싼 감정의 미묘한 결을 섬세한 영상으로 담아온 김종관 감독은 <최악의 하루> 개봉을 기다리는 사이 한예리와 한 편의 영화를 더 찍었다. <지나가는 마음들: 더 테이블>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에는 임수정, 정유미, 정은채 같은 여배우들이 나와 한 카페 한 테이블에서 차례로 다른 사건을 겪는다. 이번에도 ‘은희’라는 인물이며, 거짓말과 연기라는 모티프는 더욱 극대화된 다.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한예리에게서 연출자들은 주로 때묻지 않아 순수한, 혹은 현실 세계 멀리 있는 신비한 얼굴을 발견하고 끄집어내왔다. <코리아>에서 다부지게 탁구채를 휘두르던 북한 대표팀 선수 순복이나 <동창생>에서 최승현의 시선을 받는 고등학교 동급생 혜인, 오빠를 찾으러 밀항하는 <해무> 의 조선족 홍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비밀스러운 무사 척사광 같은 인물 말이다. ’한예리가 거짓말을 하면 재밌을 거 같다’는 김종관 감독의 부름과 한예리의 응답은, 이런 필모그래피 가운데서 불쑥 튀어나와 있는 연출자의 선택이자 배우의 해석이었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때 희열이 느껴지던데요? 그리고 대단한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살지 않나 생각했어요. 어떤 진실은 피해가기도 하고, 상대가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잖아요. ‘언제 밥 한번 먹자’ 하는 마음에 없는 말도 어떻게 보면, 작은 거짓말이니까요.”

할머니들이 의자를 내놓고 담벼락에 앉아 있는 북촌의 골목 구석구석, 볕이 사선으로 내려앉는 기와지붕과 담쟁이, 완만한 기울기로 올라가는 남산의 산책로…. 영화 속 인물들이 걷거나 머무르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배경으로는 서울의 오래된 지역이 지나간다. 장편 상업 영화 준비가 길어지는 동안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며 오가던 자신을 품어준 동네의 익숙한 공간, 그 속의 사실적인 요소를 반영하는 기획을 준비했고, 그 결과는 <최악의 하루>가 되어 나왔다. 서울이 또 하나의 주인공인 이 영화를 보며 누군가는 하루의 시간 동안 남녀가 도시를 함께 돌아다니던 전도연과 하정우의 <멋진 하루>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한편으로 는 여행지에서 외국인끼리의 만남, 그리고 이와세료라는 일본 배우의 연결 고리는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환기시키기도 한다. <최악의 하루>에서 야트막한 남산을 타박타박 오르던 한예리는 이어서 파주 고령산으로(영화 <사냥>), 문경 새재로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가서 혹독한 겨울산을 타야 했다며 웃었다. JTBC 드라마 <청춘시대>의 촬영까지 시작해 스케줄이 빼곡해진 지금, <최악 의 하루>는 적은 예산과 시간을 쪼개 찍었지만 친근한 동료들과 즐겁게 일하며 다음 작품으로 가기 위한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스텝이었다며 한예리는 여름 캠프를 추억하는 고3 학생처럼 말했다.

드라마틱한 실루엣을 그리는 실크 드레스는 유돈 초이 제품.

드라마틱한 실루엣을 그리는 실크 드레스는 유돈 초이 제품.

“세 남자에게 각기 원하는 사람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그들이 생각하는 상대는 다 다른 은희였으니까요. 각 배우의 연기가 모두 예상 밖이고 재밌어서, 리액션 하는 것만으로도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상대역에 따라 다른 세 가지 톤의 연기를 준비했느냐는 질문에 한예리는, 감독이 언급했던 예의 그 조곤조곤한 말투로 대답했다. “서로 알아온 시간이 쌓여 있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의도를 더 빠르고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목표한 지점까지 함께 도달하는 과정이 빨라지는 거죠.” 김종관 감독과의 파트너십에 대한 한예리의 언급은 이미 호흡을 맞춰봤던 권율과 이희준, 두 남자 배우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한 편 일본인 배우 이와세 료와는 처음이라 서먹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오히려 설정 과 맞아 도움이 되었다고. 이 네 사람의 배우 캐스팅을 확정한 것만으로도 영화의 큰 구도가 안정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감독의 얘기대로 영화에서는 각각의 조 합이 빚어내는 유머의 케미스트리를 확인할 수 있다. 모스크바 영화제 비평가연 맹상을 결정한 심사위원단장인 프랑스 영화 평론가 잔 막스 메잔은 <최악의 하루>에 대해 “훌륭하면서도 상당히 슬픈 영화로 우디 앨런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고 평했다. 감독의 첫 장편 <조금만 더 가까이>가 멜랑콜리하고 관념적이었다면 6년 만의 새 영화는 햇볕에 널어 말린 빨래 같다. 한결 보송하고, 바삭바삭한데 조금은 까끌한 위트가 있다. “나를 더 의심하게 됐어요. 전에는 확신을 가지고 가는 부분이 컸다면, 이제 이 상황이 맞는지 안 맞는지 여러 번 물어보면서 이 전보다는 실패율을 줄이지 않았나 싶어요.” 김종관의 말이다.

<최악의 하루>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영화 속의 시간은 은희의 인생 궤적에서 크게 바닥을 치거나 타격을 입히는 날은 아니다. “살면서 즐겁기만 한 날이 그리 많지는 않잖아요. 대부분은 그저 그렇거나, 내 자신의 못난 모습을 보기도 하는 날이죠. 하지만 그런 날이 모여서 사람을 더 나아가게도 한다는 면에서 정말 최악의 하루는 없는 것 같아요.” 김종관 감독의 말이다. 은희는 어디로 나아갔을까? 거짓말을 멈추어도 되는 누군가를 만나 진실하게 살고 있을까, 혹은 더 큰 사기꾼이 되어 있을까? 그리고 한예리와 김종관이 나아가는 방향에는 무엇이 기다릴까? 초콜릿이 발라진 비스킷을 입에 넣으면서 이 배우가 말했다. “우리는 다시 만나 서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걸 하면 좋겠어요. 했던 걸 또 할 필요는 없으니까 새로운 뭔가를요. 헤헤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