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출신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도 될 정도로 여러 편의 영화를 연출한 할리우드 배우 6명의 연출 세계를 품평해봤다. 그들이 계속 ‘디렉처스 체어’에 앉아 감 놔라 배 놔라 해도 좋을지 말이다.

에 단 호 크

에 단 호 크

1. 영원한 청년 감독, 에단 호크
어느덧 쉰을 앞뒀지만 ‘청춘’이란 말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 낡은 티셔츠와 해진 청바지, 햇살에 찌푸린 푸른 눈동자, 듬성듬성 자란 수염, 어두운 모든 상황을 기어이 뚫고 나오는 눈부신 미소까지. 에단 호크는 차가운 지성과 부드러운 감성을 황금 비율로 간직한 배우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 이후 <비포 선 라이즈〉(1995) 등 ‘비포’ 시리즈, 〈가타카〉(1997) 등 다양한 장르물에서 각기 다른 캐릭터를 맡아오면서도 자신만 의 눈빛이 퇴색된 적이 드물었던 에단 호크는 소문난 독서광의 이력을 경력으로 바꾼 사내이기도 하다. <이토록 뜨거운 순간>을 포함해 소설 세 권을 출간한 배우 겸 소설가 에단 호크는 <첼시 호텔〉(2001), <이토록 뜨거운 순 간〉(2007), 그리고 최근 국내에도 개봉한 <피아니스트 세 이모어의 뉴욕 소네트〉(2014)까지 영화 세 편을 연출해 프로필에 감독까지 추가했다.
세 편의 연출작을 통해 감독 에단 호크는 예술가의 삶과 세계를 그려낸다. 예술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화려했던 명성을 간직한 호텔에 모여드는 이야기 <첼시 호텔>, 배우와 가수의 꿈을 꾸는 젊은 연인들의 이야기 <이토록 뜨거운 순간>, 그리고 촉망받던 피아니스트에서 피아노 교사로 삶의 방향을 바꾼 음악가 세이모어 번스타인을 담아 낸 다큐멘터리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까지 에단 호크의 연출작은 자신이 잘 아는 세계의 이야기를 그다운 방식으로 완성한 목록이다. 간절한 꿈과 꿈 앞에 놓인 과제, 그리고 꿈의 방향과 걸음을 선택하는 순간의 이야기가 차분하게 담긴 세 편의 영화에는 배우 에단 호크의 인장이 또렷하게 새겨 있다. 감독으로서 에단 호크의 연출은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대상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천진한 호기심을 잃지 않은 덕분에 여물지 않은 젊음의 순간도, 만개한 노년의 고즈넉한 시간도 싱싱한 영화적 공기로 담아낸다. 낭만을 옷 안에 품고 걷는 남자인 동시에 눈동자 가득 호기심을 아로새긴 소년이자 낯선 사랑 앞에서 몸을 돌리지 않는 로맨티스트였던 배우 에단 호크의 캐릭터가 그의 연출작들에서 마치 밑간처럼 기능 하는 것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조 디 포 스 터

조 디 포 스 터

2. 믿고 보는, 조디 포스터
오래전 이야기지만, 조디 포스터가 <피고인>에 출연한다고 할 때 스튜디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원한 건 데미 무어였지만, <피고인>으로 조디 포스터는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그 기대가 틀렸음을 입증해낸다. <패닉 룸>의 강인한 엄마 역도 니콜 키드먼이 먼저였지만 그녀의 부상으로 뒤늦게 조디 포스터가 합류했고, 대표 작이 될 만한 연기를 선보였다. 조디 포스터는 언제나 차선에서 시작해 최선을 보여주는 연기자다. 연출자로서도 비슷한 의심의 시선을 받았지만, 이번엔 두 가지 수식어가 안전 장치로 작동했다. 연기로 입증한 무게감, 그리고 명문 예일대 출신. <택시 드라이버>에서 열두 살의 소녀가 창녀 역을 맡는 걸 기꺼이 허락한 조디 포스터의 어머니는 “40대 이후에는 연기 경력이 끝날 테니 다른 걸 준비하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그런 영향일까. 조디 포스터는 일찍부터 연출과 더불어 프로듀싱까지 병행했다. 그녀는 “연출은 커다란 도전이다. 왜냐하면 그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어서다”며 영화 만들기의 즐거움을 말한다. TV 시리즈를 포함해 조디 포스터는 일곱 편을 연출했다. <꼬마천재 테이트〉(1991)와 <더 비버>(2011)를 관통하는 일련의 공통점은 존재한다. 연기자로서 항상 깊고 어두운 심연을 선보인 배우는, 연출에 있어서도 그 깊이를 내려놓지 않았다.〈꼬마 천재 테이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들과 함께 있을 때 엄마 디디가 보여준 쓸쓸함이다. 조디 포스터는 테이트를 구경거리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 소년과 엄마와의 유기적 관계를 함께 그려낸다. <비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울증에 걸린 중년 남성 월터를 구심점으로 조디 포스터는 그 가족이 함께 겪는 문제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비버는 서둘러 낙관하며 ‘힐 링무비’로 포장하려 하지 않고 이 가족에게 당면한 문제점을 모두 꺼내 한 발짝 더 나간다는 점에서 <꼬마천재 테이트>와 닮았다. 5년 만에 조디 포스터가 연출작 <머니 몬스터>를 선보인다. TV 금융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리게이츠(조지 클루니)를 믿고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본 시청자 카일(잭 오도넬)의 인질 협박극을 다룬 스릴러물이다. 생방송 중 벌어지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극의 긴장감을 끌어 나가겠지만, 두 편의 전작으로 볼 때 이 스토리 안에 담길 그들의 심리 역시 예측 불가다.  -이화정 (<씨네21> 기자)

벤 스 틸 러

벤 스 틸 러

3. 진짜 웃기는 감독, 벤스틸러
솔직히 벤 스틸러만큼 감독의 재능이 저평가된 인물도 없다. 그는 당시 청춘 스타였던 위노나 라이더와 에단 호크를 내세운〈청춘 스케치〉(1994)로 1990년대 젊은이들의 씁쓸한 자화상을 그렸다. 짐 캐리의 시끌벅적 코미디처럼 우습게 포장했지만 영화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준 의외의 영화 <케이블 가이(1996)에선 새롭고 독특한 ‘짐 캐리 사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벤 스틸러는 〈미트 페어런츠>(2000)의 성공 이후, 뭔가 억울한 일을 숙명적으로 당할 것 같은 소심한 ‘찌질남’ 캐릭터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배우 벤 스틸러의 대중적인 성공과 안정을 스스로 거부하듯 감독 벤 스틸러가 잉태한 영화는 <쥬랜더>(2001)였다. 영화 <쥬랜더〉속 데릭 쥬랜더의 ‘블루 스틸’ 표정은 벤 스틸러 자신이 구축한 너드 이미지를 스스로 희화화한 것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간 영화는 2000년대 최고의 컬트 코미디 <트로픽 썬더〉(2008)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흑인으로 환골탈태 시키는 이 미친 전쟁 코미디를 체험하고 나면 감독 벤 스틸 러에게 ‘희극지왕’이란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코미디를 기준으로 평가하자면, 〈박물관이 살아 있다〉시리즈를 이끈 흥행 배우 벤 스틸러보다 자신만의 코미디 세계를 구축한 감독 벤 스틸러가 한수위다. 그의 세계는 할리우드적이면서도 동시에 자유롭고 창의적이다. 심지어 5번째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에서는 삶을 고민하는 성숙한 모습마저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뭔가 진지해질 찰나, 15년 만에 노골적인 철부지 코미디 영화 <쥬랜더2>로 다시 돌아왔다. 이는 오로지 팬 서비스를 위한 영화다. 슈퍼모델 ‘데릭 쥬랜더’를 아는 OB를 위한 회식 자리라고 할까. 진부한 속편이라는 악평을 피할 순 없었지만, 벤 스틸러는 도리어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좀 어때?” -전종혁 (<비욘드> 편집

앤 젤 리 나 졸 리

앤 젤 리 나 졸 리

4. 지루한 박애주의자, 앤젤리나 졸리
<바이 더 씨>는 지중해 휴양지에서 내내 싸워대는 부부 얘기다. 전직 댄서 바네사(앤젤리나 졸리)는 낙담, 비관, 냉소, 비아냥으로 남편을 괴롭힌다. 한물간 소설가 롤랜드(브래드 피트)는 아내의 수동적 공격을 근근이 방어한다. 비주얼은 그럴듯하다. 몰타의 화려한 태양빛과 부드러운 공기를 그대로 담아낸 영상은 안소니 밍겔라의 <리플리>(1999)를 연상시킨다. 졸리의 1970년대풍 리조트 룩도 황홀하다. 샤넬 크루즈 캠페인이나 고조섬 관광 홍보 영상이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건 드라마다. 마이크 니콜스 감독은 리즈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이 술에 취해 말싸움하는 모습만 가지고 129분짜리 걸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6)를 만들었다. 하지만 앤젤리나 졸리 부부의 싸움에는 기관총이나 폭탄 같은 강렬한 보조 장치가 필요해 보인다.<바이 더 씨>의 러닝타임 대부분은 우울하고 나른한 바네사의 일상에 할애된다. 지루하다. 이유를 모를 때는 그나마 부르주아지의 정신적 공허, 노화로 인한 상실감과 질투, 여성 예술가 특유의 실존주의적 불안 등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은 굳이 해설을 덧붙인다. 그런데 히스테리의 원인이 너무 단순한 나머지 해석의 공간이 쪼그라들어 감정이입이나 연민의 여지조차 남지 않는다. 도무지 소통 안 되는 여자와 사는 롤랜드의 답답함만은 납득이 갈 지경이다. 감독은 전작 <언브로큰>(2014)에서도 비슷한 한계를 드러냈다. 주인공 루이(잭 오코넬)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데, 거기서 유치하고 감상적인 일본군 지휘관을 만난다. 그는 이유 없이 루이를 괴롭히다가 “사실 너랑 친구하고 싶다”고 돌발 고백을 하는가 하면 루이의 정신력에 감복해서 무릎 꿇고 울음을 터뜨리는 주책까지 부린다. 이 캐릭터를 설명하는 단서라곤 막판에 나온 가족 사진 한 장뿐이다. <언브로큰>과 <바이 더 씨>는 감독이 1인칭 장편소설을 읽고 감복해 영화를 만들었으나 주된 심리 묘사를 간접 표현으로 전환하는 데 실패한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이 더 씨>는 원작이 없고, <언브로큰>은 실화를 바탕 으로 한 책을 코엔 형제가 각색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앤젤리나 졸리의 세계관, 인간관에 있을 것이다. 그녀가 박애주의자인 건 세상이 다 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인간에 대한 넓은 사랑이 아니라 깊은 통찰 이다. -이숙명 (칼럼니스트)

벤 애 플 렉

벤 애 플 렉

5.루저에서 영웅으로, 벤 애플렉
DC 원작 영화 <저스티스 리그>의 총괄 프로듀서로 벤 애플렉이 발탁되었다. 벤 애플렉은 이미 차기 배트맨 영화의 각본, 감독, 주연으로 참여 중이다. DC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의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얘기다. 그가 배우로만 활동하던 10년 전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 다. 벤 애플렉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극적인 위상 변화를 겪은 영화인이다. <가라, 아이야, 가라>(2007)로 장편 연출 데뷔를 하기까지, 배우 경력은 끝장날 것처럼 보였다. 절친 맷 데이먼과 함께 각본을 쓰고 출연한 <굿 윌 헌팅〉(1997) 당시만 하더라도 촉망받는 배우였다. 하지만〈진 주만>(2001) <데어데블>(2003) 등과 같은 멍청한 블록버스터에서 재능을 낭비하며 망신만 당하던 그였다.
맷 데이먼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걷는 그에게 대중이 갖은 비아냥을 퍼붓는 동안 벤 애플렉은 칼을 갈았다. <굿 윌 헌팅>에서 증명했듯 그는 좋은 스토리텔러였다. 그 자신이 쓰레기 같은 영화들을 겪으면서 어떻게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 감을 잡았다. 마침 적당한 프로젝트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가라, 아이야, 가라>였다. 보스턴을 배경으로 실종된 아이를 찾아 나서는 켄지와 제나로의 활약을 그린 이 작품은 이후 ‘감독’ 벤 애플렉의 스타일을 규정한 원형과 같다. 이야기는 빈약하고 이미지는 과시적인 블록버스터와는 다르게 벤 애플렉은 기교 없이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고전적인 연출로 <가라, 아이 야, 가라>를 만들었다.
언론은 <가라, 아이야, 가라>에 대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2003)를 보는 것 같다’며 극찬했다. 벤 애플렉의 두 번째 연출작 <타운>(2010)은 <가라, 아이야, 가라>의 성과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수작이었다. 현대의 보스턴을 넘어 1979년의 이란 테헤란으로 스케일을 넓힌 <아르고>(2012)로는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받았다. 벤 애플렉은 제2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이제 밴 애플렉은 저스티스 리그를 총괄한다. 그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밀려 체면을 구긴 DC를 수렁에서 건질 구원자로 적역이다. 벤 애플렉은 할리우드의 슈퍼 히어로가 되었다. -허남웅 (영화 칼럼니스트)

숀 펜

숀 펜

6. 고생과 고통의 드라마, 숀 펜
숀 펜이 연기 잘한다는 건 그의 연기를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들도 안다. 하지만 그가 연출한 영화는, 쉽게 기억나는 종류는 아니었다. 그가 처음 연출한 영화 〈인디안 러너〉(1991)는 베트남전이 형제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았지만 본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문제작이었다. 숀 펜이 잭 니컬슨을 출연시켜 만든 <크로싱 가 드〉(1995)와 <써스펙트>(2001)는 그가 <데드맨 워킹>, <21 그램>, <미스틱 리버> 등에서 경험한 죄와 도덕, 인간 구원의 문제를 클로드 샤브롤과 브루노 뒤몽, 도스토옙스 키식 세계를 섞어 만든 영화였다. 나쁘지 않았지만 그 영화들의 문제점은 그가 사귄 여자들(마돈나, 스칼렛 요한 슨, 샤를리즈 테론 등)보다 덜 화제가 된다는 데 있었다. 숀 펜이 영화감독으로 제대로 각인되기 시작한 건〈인 투 더 와일드>(2007) 때부터다. <인투 더 와일드>는 문명의 탐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야생으로 기어들어간 크리스토퍼 존슨 매캔들리스의 비극적 실화를 담은 영화다. 거장 감독들이 으레 그렇듯이 영화의 러닝 타임은 140분이나 되며 주인공 에밀 허쉬는 극심한 고통을 영화 속에서 겪는다(다람쥐 먹기, 산짐승 가죽 벗기기 등등). 다소 교조적이고 감상적이긴 하지만(특히 여동생의 내레이션은 정말 미칠 것 같다) 그 모든 걸 참고 견디면, 완전한 자유와 인간의 생존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엄청나게 오래 생각하게 된다. 그건 돈에 지배당하는 할리우드와 부패한 정치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온 숀 펜이 연출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할홀브룩과 에밀 허쉬가 함께 나오는 장면은 <크로싱 가드>에서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와 아버지가 함께 손 잡고 우는 황당한 엔딩을 잊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는 인도주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 <라스트 페이스>로 올해 칸영화제를 밟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연출만 하고 연기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다고 했다. 덕분에 그의 영화에 출연할 배우들은 고생 좀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