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바이,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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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가 세상을 떠났다. 세계 온갖 도시를 찾아다니며 그의 공연을 9차례 본 경험에 대해 2년 전 더블유와 인터뷰할 정도로 프린스를 깊이 사랑한 팬이, 너무 이른 죽음에 부쳐 이 천재의 음악 인생을 추억한다. 2년 사이 공연을 본 횟수는 13번으로 늘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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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라 불리던 아티스트가 있었다. 미국 팝 역사에서 한 번도 주목받지 못 한 불모지, 미니애폴리스. 가난한 이혼 가정에서 자란 수줍은 ‘프린스’는 어린 시절 재즈 뮤지션인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음악이 유일한 탈출구였 던 그는 곧 기타, 베이스, 드럼 등 20여 악기를 독학으로 마스터하게 된다. 18세가 되던 해 레코드사로부터 음반 제의를 받는데 이 겁 없는 청년은 “앨범 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요구한다. 모든 것이 왕자의 분부대로 이루어졌고, 이 때부터 그의 모든 앨범 뒷면에 새겨진 ‘작사, 작곡, 연주, 편곡, 프로듀싱 모두 프린스’라는 문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담대한 천재 프린스가 스타가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82년 훵키 로큰롤 넘버 ‘Little Red Corvette’이 크게 히트하면서 프린스는 전국구 스타로 등극한다. 프린스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담은 자전적인 영화 <Purple Rain>에 주연으로 출연, 박스오피스 1위를 거머 쥔다. 영화의 OST로 발매된 <Purple Rain>은 당연히 80년대 최고의 명반이 되었다. 장장 24주간 1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판매고는 1300만 장을 돌파했다. 그리고 보라색(Purple)은 그의 전유물이 되었다. ‘Purple Rain’의 성공 이후 프린스는 ‘Kiss’, ‘Sign Othe Times’, ‘If I Was Your Girlfriend’, ‘Adore’, ‘Cream’, ‘My Name Is Prince’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히트곡을 남겼으며, 이 기록은 80~90년대 그 누구도 쫓아오지 못했다. 천재성은 레코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진면목은 턴테이블이나 스테레오가 아닌 공연장에 있었다. 레코드판 밖에서 그는 고삐 풀린 야수처럼 거칠고 자유로웠다. 스튜디오에서 ‘얌전하게’ 녹음된 곡들은 라이브 무대에서 프린스의 카리스마와 연주력으로 인해 새롭게 탄생했다. 157센티미터의 작은 몸에 마빈 게이, 제임스 브라운, 찰리 채플린,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가 들어 있었다. 프린스는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지 않았다. 40년 남짓한 기간 동안 39장의 앨범을 발표했고 쉬지 않고 투어를 돌았다.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 아티스트는 그 누구 보다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프린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가 잃은 것은 단순히 하나의 가수가 아니다.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자 보컬리스트, 프로듀서, 그리고 기타리스트가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왕자의 죽음으로 우리는 하나의 시대를 떠나보내고, 앞으로 절대 또 다른 프린스를 갖지 못할 것이다. 2006년 난생처음 프린스의 공연을 본 이후 퍼플 레인의 부름에 따라 라스베이거스, 뉴욕, 몽트뢰, 시드니를 성지 순례하듯 돌았다. 지난 10년간 나는 13번의 프린스 공연을 보았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가 사라지고 ‘10년간’이라는 문구가 ‘내 평생’ 으로 치환되자 이것은 너무나도 작게 느껴진다. 그 작음을, 또 한 뮤지션이 남긴 음악의 거대함을 새삼 깨달으며 내가 건넬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일 것이 다. 고마워요, 프린스.

박희봉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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