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과 환락의 1990년대 러시아 청춘들에 2016년의 패션계가 열광하는 이유.

밑에 줄 없는거

1. 러시아 출신의 알레산드라 고르디엔코(Alexandra Gordienko)가 만드는 아트와 패션을 다루는 잡지 <마파 저널>. 2. 러시아 미녀의 정석을 보여주는 모델 나탈리아 보디아노바. 3. 고샤 루브친스키의 사진집 <유스 호텔> 속 작품. 4, 7. 베트멍 런웨이에 모델로 선로타 볼코바와 고샤 루브친스키. 5. 룸펜 에이전시 모델들로 촬영한 ZDDZ 룩북. 6. 생경한 느낌의 룸펜 에이전시 모델들. 8. 포스트소비에트 열풍의 주역인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 9.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시기의 독일 청춘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J.W. 앤더슨의 2015 F/W 시즌 컬렉션.

“내가 10대였던 1970년대에 패션이 갖던 의미는 지금과 달랐다. 그 시절의 패션은 록 음악과 함께 기존의 것을 타도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부모님은 주어진 대로의 삶을 살았지만, 우리 세대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또 달라졌지만 말이다.”

존 갈리아노, 요지 야마모토, 라 프 시몬스 등과 협업을 펼친 아티스트 피터 사빌을 지난가을에 만났을 때 패션에 대한 애정이 여전한지 묻자, 그가 이렇게 답했다. 피터 사빌의 이야기처럼 2016년 현재, 이념적인, 세계에 대한 발언으로서의 패션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패션을 통해 신념을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시대인 것이다. 파 격보다는 ‘현실성’과 ‘일상성’이 화두인 패션계가 그러한 유약함에 질린 걸까? 그도 아니면 그저 새로운 자극을 필요로 했는지도 모른다. 60년대의 미래주의, 70년대 의 히피 문화, 80년대의 과시적 패션, 90년대의 미니멀리즘과 같은 식상한 키워드를 곱씹는데 이미 충분히 지루해졌으니까. 이러한 요즘의 패션계에서 최근 생경 한 자극으로 ‘열풍’이라 불릴 만한 지지를 얻고 있는 특정 시기와 지역의 과도기적 문화가 있다. 바로 1991년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해체 후를 뜻하는 ‘포스트 소비에트’ 시절, 당시 혼란의 중심에서 청춘들이 영위한 독특한 패션과 삶의 방식이 혼합된 유스 컬처다. 최근 1990년대를 향한 재조명의 주축이 MTV 채널과 팝 문화를 기반으로 한 미국의 풍요로운 유스 컬처라면, 한쪽에는 동일한 시기의 러시아 유스 컬처가 거친 비주류적 매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 두 디자이너가 있다. 고샤 루브친스키와 뎀나 바잘리아다. 실제로 절친한 친구 사이며(고샤는 뎀나의 베트멍 2016 S/S 런웨이에 오프닝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둘 다 격동의 포스트 소비에트 시절을 겪은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대의 미학을 추구한다. 당시 모스크바의 스케이트보드신, 그리고 플리마켓을 배회하던 거친 청춘의 모습을 표방하는 디자이너이자 포토그래 퍼인 고샤 루브친스키는 우리나라에선 아이돌 패션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지드래곤과 송민호가 그의 프린트 티셔츠를 입고 나온 후 네이버에 ‘고샤’ 두 글자만 쳐도 수십여 개의 쇼핑몰 사이트가 뜰 정도로 인지도 높은 디자이너가 된 것. 8년 전 D.I.Y.로 티셔츠를 만들기 시작한 고샤가 그 당시 모스크바의 체육 관에서 선보인 첫 프레젠테이션은 600여 명이 찾았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생산 라인도, 경영 테크닉도 없는 그의 옷은 판매로 이어지지 못했고, 금방 재정난에 빠졌다. 그런 그에게 전 러시아 <보그>의 에디터 안나 듈제로바 (Anna Dyulgerova)가 꼼데가르송의 대표 아드리안 조프(Adrian Joffe)를 소개했다. 러시아 스트리트 문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아드리안은 고샤의 재능을 알아 봤고, 2012년부터 시작된 꼼데가르송과의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고샤는 2015 S/S 파리 패션위크 기간 중 제대로 된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결과는? 모스크바에서 친구들에게 직접 만든 티셔츠 10여 장을 팔던 고샤는 네시즌 만에 티셔츠 5만여 장을 파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러시아의 언어, 러시아의 스트리트 문화, 러시아의 스케이트보드 신이 담긴 그의 컬렉션이 마치 90년대 전 세계 청춘들이 미국 문화를 동경했던 것처럼, 2016년의 청춘들로 하여금 혼란과 환락이 공존한 미지의 세계인 포스트 소비에트 시절의 러시아를 동경하게 만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몇 달 전 모스크바의 스트리트 신과 보드 신을 포착한 사진집 <Youth Hotel>도 발간했 는데, 이와 관련해 아드리안 조프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많은 스트리트 브랜드가 슈프림처럼 되고 싶어 하고, 비슷한 것을 만든다. 하지만 자주 가짜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고샤는 다르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그의 옷, 런웨이, 사진집은 하나의 통일된 의미를 표방한다.” 고샤 루브친스키와 함께 이 새롭고 낯선 열풍을 대변하는 또 다른 주인공 뎀나 바 잘리아가 2014 F/W 시즌 형제 구람,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론칭한 베트멍은 2년 간 태깅된 인스타그램 포스팅 수만 해도 10만여 개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자랑한다. 소련에 속해 있었던 그루지아, 즉 조지아 출신인 그는 스무 살에 독일로 이주하기 전까진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가 서 유럽에서 마주친 방대한 클럽 문화가 얼마만큼 큰 자극으로 다가왔을지, 쉽게 상 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한 배경은 되려 그에게 다양한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대한 편견 없는 폭넓은 시야를 선사했고, 그만의 미학적 감수성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지하의 게이 클럽, 키치한 차이나타운의 레스토랑에서 음울하고 매혹적인 쇼를 선보여온 그의 독특한 취향은 전혀 다른 두 세계의 충돌에서 기인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뎀나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제품(Product)’이라는 단어가 수시로 언급된다. 프랑스어로 ‘옷’을 뜻하는 단어를 브랜드 이름으로 택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그는 철저히 실용주의에 기반해 옷을 디자인하며, 생산성과 상업 성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컬렉션은 의미가 없다 말하고, 자신의 컬렉션을 ‘제품’이라 부른다.

최근 미국 <W>와의 인터뷰에서 “패션이 여성을 꿈꾸게 만드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 그에게 패션이란 동경의 대상이라기보단 사회주의 국가의 유니폼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대상인 셈. 그런데 그가 이러한 신조를 바탕으로 만들어내는 생경하되 실용적인 옷들이 ‘베트멍적이다’라는 수식어가 생겨날 만큼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얻고 있다. 이쯤에서 조금 더 들어가보자. 하나의 현상이라 할, 고샤 루브친스키와 베트멍이라는 두 레이블이 화제성 브랜드로 끝나지 않고 포스트 소비에트 시절의 유스 컬처로까지 사람들의 관심이 확장되도록 한 데에는 디자이너들 못지않게 큰 영향을 끼친 두 인물이 있다. 바로 러시아 출신의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Lotta Volkova)와 모델 에이전시 룸펜의 설립자 압도자 알렉산드로바(Avdotja Alexandrova)다. 먼저 고샤와 뎀나의 절친인 로타 볼코바는 감각적인 쇼 스타일링과 특유의 비주얼 작업으로 유명세를 탔다. 현재 고샤 루브친스키와 베트멍, 뎀나의 발렌시아가까지, 세 브랜드의 모델 캐스팅과 비주얼 작업을 총괄하는 그녀가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 대상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보낸 자신의 유년 시절 단상들. 경험에 기반한 서늘하고 반항적인 작업은 보는 이들을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그런가 하면 압도자 알렉산드로바의 룸펜은 고샤와 뎀나, 로타가 추구하는 이미지의 방향성을 시각화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러시아의 모델 에이전시다. 모스크바 출신인 압도자는 고정화된 바비 인형식 미의 기준에 의문을 품고 1년 반 전부터 러시아 청춘들 특유의 공허한 느낌을 갖고 있는 인물들 위주로 룸펜을 꾸리기 시작했는데, 여기선 나이, 성별, 주근깨, 스킨헤드 등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로 길거리, 클럽, 소셜미디어에서 모델을 캐스팅하는 룸펜이 중요시하는 두 가지 기준은 ‘성형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얼굴일 것’과 ‘러시아에 거주하는 사람일 것’. 고샤와 뎀 나의 쇼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모델이 룸펜 소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들은 경험에 의거한 ‘포스트 소비에트식 미적 기준’을 공유하는 밀착된 관계 안에 서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최근 많은 패션 저널리스트들은 ‘포스트 소비에트 열풍’에 관해 이야기하며 이 흐름이 진실성을 갖는 건, 실제로 당시의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고 겪은 이들이 이를 감각적으로 풀어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흉내’가 아닌 ‘진짜’ 가 주축이라 쿨하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포스트 소비에트 시절의 경험과 취향 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은 디지털 플랫폼에서의 파워가 중요해진 최근의 패션계에서 ‘크루’ 혹은 ‘스쿼드’라고 불릴 만큼 밀접한 관계를 온·오프라인 양쪽에서 유지 하며 점점 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미학의 특징인 차갑고 우울 하며 공허한 얼굴, 기이하게 재단된 새로운 실루엣의 옷, 미국 상품이 쏟아져 들어 오던 시기 우리나라 남대문 등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짝퉁’ 제품이 연상되는 패 러디식 프린트,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관련해 누군가는 ‘진정한 아름다움과는 별개’라며 손사래를 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미적 기준의 다원화야말로 그간의 패션계에 꼭 필요했던 새로운 돌파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