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완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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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찮게 등장하는 미술계의 위작 스캔들에 대비책은 없을까? 어쩌면 카탈로그 레조네가 답일지도 모른다. 단발적인 전시 도록 수준을 넘어, 작가의 일대기와 작품 세계 전반을 촘촘히 탐색해 정리하는 이 기록물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도 점점 커지고 있는 추세다. 업계 종사자에게는 더 깊은 담론을, 일반 애호가에게는 더 넓은 시야를 제시해주는 카탈로그 레조네에 지금 주목해야 하는 이유.

2011년에 출간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첫 번째 카탈로그 레조네 표지. © Gerhard Richter 2016 / Hatje Cantz Ostfilder.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Korsika, 1968’. 2017년 봄에 출간될 카탈로그 레조네 두 번째 권에 실릴 작품이다. © Gerhard Richter 2016.

‘Conjunction 84-44’ 하종현 1984 Oil on hemp cloth 120×160cm

지난해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미술계에서는 단색화에 대 한 국제적인 관심이 한창이다. 우리나라 1960~70년대에 풍미한 추상회화, 곧 ‘단색화’가 해외 유수의 미술계에서 주목받은 이유 중 숨은 공로를 찾아보자면 작가와 작품이 지닌 가치를 뒷받침할 수 있는 양질의 출판물의 역할을 먼저 들 수 있다. 미술에서 출판물은 기본적으로 전시를 기록하는 전시 카탈로그(도록), 작가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다룬 모노그 래프(단행본)와 작가 개인의 기록을 너머 작품의 성장 및 연 대에 따라 회고적으로 기록한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Raisonne)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카탈로그 레조네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을지라도 그 목적이나 의미,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몇 차례 회자된 바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는 독일 출신 의 회화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다. 생존 작가임에도 리히터의 아카이브는 전문적으로 정리된 다양한 출판물로 소개됐 다. 몇 달 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주최로 <아트북과 카탈로그 레조네의 현재 : 연구, 출판, 디지타이징과 아카이빙>이라는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는데, 리히터 아카이브의 디렉터이자 저자인 디트마 엘거가 연사로 참여해 인상적인 내용을 들려줬다. “진작과 위작을 분리해 내는 것이 카탈로그 레조네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라고 항상 여기고 있지 만, 또 다른 선을 그어야 할 부분이 있습 니다. 바로 작가가 작품으로 인정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이지요. 인정하지 않은 작품은 미완성인 경우나 풍속을 어지럽히거나 훼손된 작품, 또는 타자의 청탁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국내에서는 최근 유명 작가의 위작에 관한 논란이 그 진위 여부와 상관 없이 미술계의 이미지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시점 인 만큼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작품의 궤적을 전문적으로 기록해, 진작과 위작의 여부를 가리는 데 기준을 제시하는 출판물인 카탈로그 레조네는 더욱 주목할 만하다.

카탈로그 레조네의 필요성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해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병행 전시로 해외 미술계 인사 및 미술 애호가, 전 세계 관람객에게 단색화를 소개할 당시 출판된 영문 서적은, 단색화의 회화적 이미지 이면에 깃 든 당대의 문화, 정치, 사회적인 현상을 함께 전하는 역할을 했다. 참여 작가별 총론의 필자로 참여한 해외 미술관 큐레 이터 및 평론가들이 국내에서 익 숙하게 통용되는 관점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는 사실은 특히 흥미롭다. 뉴욕에 위치한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큐레이터 알렉 산드라 먼로는 박서보의 작가론에서 “박서보의 회화는 군사정권 아래서 탄생한 작품들이라는 정치적인 맥락보다 회화적인 비평의 측면에서 복권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전쟁과 그로 인한 혼돈을 겪은 세대로서, 치유와 회복을 추구하며 지금의 작품 세계를 일구게 됐다는 작가의 말과 견주어 생각해볼 만한 내용 이다. 작가의 경험에 대한 설명이 보태지면서, 군사정권 시대의 국전에 대한 저항정도로 설명되던 당시의 단색화 현상에 대해서도 보다 입체적인 해석이 가능해졌다. 뭉뚱그려 통칭되는 현상이 아니라, 작가의 독립적인 성향과 기질의 표현으로서 작품을 바라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최근 발표된 서적들은 중 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욱 반가운 소식은 단색화의 주요 작가 중 한 명인 하종현의 작품 일대기를 담은 영문 모노그래프가 프랑스 유수의 현대미술 기관 중 하나인 르콩소시움에서 제작 출판된다는 것이다. 단색화의 경우 국제적인 주목성에 비하여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학술적인 서적이 부족한 상황이다. 특히 뉴욕의 모마(MoMA), 솔로몬 구겐하임 등 해외 유수 미술관 소 장 작가인 하종현의 경우, 그 성취와 가치를 살피게 해줄 콘텐츠가 크게 요구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저명한 현대미술 기관인 르콩소시움의 큐레이터 김승덕이 에디토리얼십을 맡고 국제갤러리가 후원해서 제작될 이번 모노그래프는 여러모로 고무적인 프로젝트다. 큰 구성은 다음과 같다. 작가의 생애 및 작품의 궤적이 연대기적으로 다뤄질 예정이며, <아트 포럼 인터내셔널>의 주요 필자이자 학자인 배리 슈왑 스키는 하종현 화백의 회화적인 흐름을 저술할 것이다. 또 구겐하임 뉴욕 미술관의 한국계 큐레이터인 안휘경의 비평적 서문을 통해 하종현 단색화의 색·면에 관한 추상적 연구를 살필 수도 있다. 김승덕의 작가 인터뷰와 모노그래프 제작에 관한 강연 역시 추진단계다. 하종현의 모노그래프는 오는 6월,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 시기에 맞춰 공개된다.

카탈로그 레조네는 일반 애호가들과는 동떨어진 난해한 예술 서적이 아니다. 생존 작가이든 작고 작가이든 그 작품 세계를 구체적이고 다각적으로 알릴 살아 숨쉬는 기록인 것이다. 그 개념이 국내에도 널리 알려지고, 더 나아가 긍정적인 사례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에디터
전민경(국제갤러리 대외 협력 디렉터), 정준화
포토그래퍼
엄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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