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히어로를 앞세운 블록버스터들이 점점 더 무겁고 어두워지는 중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영웅들을 위해 정신과 진료를 예약했다.

배트맨 (2)

잭 스나이더의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은 꽤나 무거운 블록버스터다. 2시간 30분에 육박하는 부담스러운 러닝타임이나 ‘뚱냥이’ 수준으로 벌크업을 한 배트 슈트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는 초인적 영웅을 과연 이상적인 구원자로 믿어도 될지, 브루스 웨인, 즉 배트맨의 입을 빌려 묻는다. (전편인 <맨 오브 스틸>의 클라이맥스였던) 슈퍼맨과 조드 장군의 전투로 도시가 쑥대밭이 되고 대규모의 인명 피해까지 발생하자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한다. 웨인에게 슈퍼맨은 감당하기 힘든 재난이 되기 전에 적극적으로 제거해야 할 위험 요소다.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를 수호자로서의 역할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데어데블

슈퍼 히어로들의 정신과 상담을 주선하게 된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래도 다들 인류를 구하는 데 바쁜 눈치라, 나라도 대신해서 마음과 마음 신경정신과 일산점의 송형석 원장을 찾기로 했다. 마블이나 디씨의 영웅 혹은 반영웅은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배트맨, 스파이더맨, 데어데블, 매그니토 등은 모두 가족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야기를 만들기에 유리한 설정이기 때문”이라는 게 송형석 원장의 설명이다. “트라우마가 트라우마로만 남으면 자학적인 성향으로 이어집니다.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 채 자신만 괴롭히게 되죠. 하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죄책감을 정의나 공익의 구현으로 해소하려고 시도하기도 해요. 히어로들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죠. 문제는 그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력적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순되는 지점이 있어요. 정신과적 측면에서 보면 자기 관리에 실패한 사람에 가깝습니다. ”

스파이더맨

하지만 슈퍼 영웅들은 좀처럼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성격이다.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안전한 답 대신 극단적이고 은밀하고 개인적인, 그래서 변태적인 결론을 직접 내리고 행동에 옮긴다. 송형석 원장은 토니 스타크나 브루스 웨인은 상담이 대단히 힘든 유형이라고 이야기한다. “연예인이나 저명 인사와도 비슷한 면이 있어요.” 큰 성취를 이룬 유명인들은 자기 확신이 뚜렷한 편이다. 심리적 갈등이나 불안을 인식하고 있더라도,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이런 분들이 귀 기울이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자신만큼 대단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누군가가 이야기할 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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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히어로들이 공유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이중생활이다. 낮에는 기자, 변호사, 혹은 망나니 재벌 노릇을 하다가 밤이 되면 쫄쫄이를 입고 세상을 구한다. 교대 근무라도 하듯 두 개의 자아를 오가는 삶이 계속될 때 우려되는 문제는 없을까? “만들어낸 역할에 거꾸로 지배되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기자가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역할에 지나치게 몰두해서 일상과 가족은 내팽개친다면요? 확실히 문제가 있죠.” 송 원장은 부정적인 이야기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에 자신도 짓눌렸던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슈퍼 히어로도 자칫하면 자신의 적에게 동화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나름대로의 확신에 따라 법의 테두리 밖에서 폭력을 휘두른다는 점에서는 영웅과 악당이 크게 다르지 않죠. ”

SUICIDE SQUAD

어벤져스, 저스티스리그, 수어사이드 스쿼드, 혹은 엑스맨의 멤버들에게는 인류의 구원보다 정신과 예약이 더 시급할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우선 순위로 진료받아야 할 캐릭터를 따져봤다. 일단은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도 등장할 스파이더맨이 떠오른다. 부모, 이모부, 심지어 첫 여자 친구까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면 누구든 평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거다. 게다가 배트맨과 아이언맨은 재벌이고 데어데블과 슈퍼맨만 해도 생계에는 지장이 없어 보이지만 피터 파커는 세상과 함께 밀린 월세를 걱정해야 하는 힘겨운 청춘이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사회 관계에는 서툴며, 주변에서 이끄는 대로 소심하게 휩쓸리는 경향도 있다. “개인적인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이끄는 것 역시 정신과 의사의 역할입니다. 비교적 어린 나이라는 조건도 설득하고 변화시키기에는 유리하죠.” 그러고 보면 킥애스도 엇비슷한 사례다. 현실 감각이 전무한 아버지에 의해 살인 병기로 훈육되는 아동 학대를 당한 힛걸은 응급 재활이 필요한 수준이다. 엑스맨의 경우, 선한 편이든 악한 편이든 마찬 가지로 공격적이라 차분한 대화가 어렵다. 군대식 조직까지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개인 단위 상담보다는 기업 차원의 관리 프로그램이 더 적절해 보인다.

헐크2

몇몇 슈퍼 히어로의 경우, 한국의 40~50대 남성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고 송형석 원장은 말한다. 나름의 즐거움을 찾고 적극적으로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조언하면 대부분의 반응이 이렇다. “전 멈출 수 없습니다. 끝까지 (일과) 싸워낼 겁니다.” 이 문장에는 책임감과 의무감, 그리고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스스로의 가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담겨 있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닮았죠. 영웅이 아닌 자기 자신을 상상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슈퍼 히어로 프랜차이즈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게 아닐까? 내면의 불안을 극복했다면 주인공들은 피로한 전쟁을 진작에 멈췄을 수도 있다. 속편이 하나씩 만들어 질 때마다 영웅들의 심경은 점점 더 복잡해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요란하게 깨고 부수는 스크린 앞에서 괜히 기분이 짠해진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다는 연예인 걱정 다음으로 쓸데없는 오지랖일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