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트 쿠튀르의 영광이 되살아나고 있다. 과거의 유산으로 치부되던 쿠튀르에 생기를 불어넣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과 멀티미디어이다. 패션 하우스들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젊은 쿠튀르를 표방하며 그 사용가치를 높이는데 몰두하고 있고, 셀레브리티들은 시상식 드레스뿐만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일상에서도 쿠튀르 스타일을 선보이며 이미지의 재생산에 일조했다. 활용도에 대한 다각적인 탐구가 돋보인 이번 시즌으로 인해 오트 쿠튀르 시대에 후반전이 열린 것이다.

Chanel
푸른 하늘, 서정적으로 줄을 맞춰 심은 초록 잔디, 거대하고 단순한 목조 주택, 수련이 떠 있는 고요한 연못, 장식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모습을 살린 정원…. 잔잔함을 넘어 하나의 젠(Zen) 파크처럼 느껴지는 이곳은 샤넬 오트 쿠튀르 쇼의 세트였다. 지난 8월 오트 쿠튀르에서는 카지노로, 그리 고 다시 10월의 레디투웨어에서는 공항으로 변신한 파리 그랑팔레는 그런 요란한 배경이 언제 있었냐는 듯 단순하고도 힘있는 세트로 단장하고 샤넬 오트 쿠튀르를 선보일 채비를 마쳤다. 세트의 목조 주택과 연관된 나무 조각들이 여러 룩에서 주요 장식으로 등장했으며, 오가닉으로 엮은 짚과 재활용지 등 친환경적인 모티프에서 영감을 받은 기법이 샤넬이 자랑하는 여러 공방의 손을 거쳐 럭셔리한 데이웨어와 이브닝 룩으로 재탄생했다. 요즘처럼 패스트 패션이 전세계 를 지배하며 쉽게 입는 만큼이나 버리기도 쉬운 시대에, 수백 시간에 걸쳐 천천히 공들여 만들고, 100% 핸드메이드이며, 한번 구입하면 평생에 걸쳐 입고 대물림까지 하는 오트 쿠튀르야말로 그 어떤 옷보다 친환경적인 패션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컬렉션이기도 했다. 둥근 어깨 라인과 우아하게 뚝 떨어지는 미디스커트로 구성된 데이웨어는 물론이고 샤넬 오트 쿠튀르의 전매특허인 피날레의 웨딩드레스에 이르기까지 작품이라는 호칭에 걸맞지 않은 룩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다음 시즌이면 샤넬과 라거펠트는 언제 적 에코냐는 듯 더욱 새롭고 쇼킹한 테마를 향해 떠날지도 모 른다. 하지만 작은 군소 레이블이 아닌 패션의 최정점, 샤넬이 느린 패션의 미학을 설파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 의미는 깊고 오래갈 것이다.

 

Givenchy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휘황찬란하고 요란한 쇼 구성이 오트 쿠튀르의 필수조건일까?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만 들면 은행도 가고 장도 볼 수 있는 시대에?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 또한 이런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는 파리 오트 쿠튀르 쇼 기간 직전에 열린 지방시 남성복 런웨이 쇼에 총 12벌로 구성된 오트 쿠튀르 룩을 선보였다. 프랑스 오트 쿠튀르 협회에서는 ‘총 50룩 이상’ ‘데이웨어와 이브닝웨어를 모두 포함할 것’ 등을 쇼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이런 엄격한 규정을 충족시키는 대규모 쇼를 펼치기보다는 디자이너의 성향과 하우스의 방침에 맞는 프레젠테이션을 택한 결과다. 방법 또한 다면적이다. 쇼에 등장한 모델들이 각 룩을 입고 있는 모습과 세부장식 클로즈업을 담은 오트 쿠튀르 패션 필름을 쇼 직후에 공개하는 한편, 실제 룩들을 바디에 입혀 실물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회도 열었다. 대규모 쇼 대신 시대에 걸맞은 전달법을 택한 티시의 쿠튀르 룩은 지방시답게 우아한 동시에 놀랍도록 전복적이었다. 뱀피로 구성된 오각형 패치워크나 튤 위에 수 놓은 크리스털 조각들처럼 전통의 수공예는 살아 있으면서도 케이프나 트렌치코트처럼 동시대적 아이템에 집중한 부분이 돋보였다. 특히 언더웨어 같은 드레스 위에 투명한 튤 커버업으로 구성된 룩은 과감한 이브닝웨어를 추구하는 스타들의 선택 1순위가 될 것이다.

Valentino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피에르파올로 피촐리 듀오가 발렌티노를 맡게 된 이후, ‘끝내주는 빨간 드레스’로(만) 유명했던 이 이탈리아 패션 하우스는 몇 개의 추가적인 특징을 대중에 각인하는 데 성공했다. 예쁘장한 현대판 소공녀같은 로맨티시즘이나 스터드장식으로 대표되는 ‘록 쿠튀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20세기 초반의 유럽식 이국주의다. 최근 몇 시즌간 레디투웨어에서도 그랬지만, 치우리와 피촐리 듀오는 특히 오트 쿠튀르에서 ‘유러피언 이그조틱’ 코드를 잘 사용했는데, 베네치아 공국의 귀족 의상과 그리스 전통 복식에서 영감을 얻은 이번 컬렉션 역시 이런 특징이 여실히 드러났다. 마치 가느다란 뱀을 머리에 휘감은 듯 보이는 황금색 장식을 머리에 두른 모델들은 맨발의 님프처럼 긴 드레스를 입고 사뿐하게 런웨이를 걸으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호사스러운 소재의 풍부한 사용, 로마 특유의 세공 기법이 고풍스러운 룩들과 섞였지만 요즘의 어린 아가씨들도 환영할 만한 ‘예쁜’ 옷이라는 것, 그것이 발렌티노의 지금을 있게 한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컬렉션이었다.

Viktor&Rolf
레디투웨어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오트 쿠튀르에만 집중할 것을 선언하며 쿠튀르의 세계로 컴백한 빅터 호스팅과 롤프 스노렌은 컴백 후 첫 컬렉션을 앞두고 더블유와의 인터뷰를 통해 ‘지금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가치 있는 시대다. 잘할 수 있는 것 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며 자신들의 뿌리가 오트 쿠튀르, 특히 ‘입을 수 있는 아트’로서의 패션에 기반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 다. 이번에도 빅터&롤프는 20세기 미술 사조인 큐비즘에 접목한 컬렉션을 통해 아트와 패션 사이의 지점을 탐구했다. 총 22벌로 구성된 컬렉션은 온통 흰색만으로 이루어졌는데, 처음에는 평범한 듯 보이는 흰색 피케 셔츠 드레스로 시작해서 뒤로 갈수록 큐비즘 아트를 연상시키는 얼굴이 붙어 있는 다양한 길이의 드레스와 코트로 변형되었다. 눈, 코, 입, 눈썹과 러플 등 옷 위에 붙은 장식은 모두 3D로 형태감이 잡혀 독특한 양감을 만들어냈는데, 특히 아예 모델의 얼굴까지 가려버린 거대한 장식 드레스가 등장하는 피날레에서는 모델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각품이 걸어나온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Jean Paul Gaultier
파브리스 에마에르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르셉트, 르브롱스, 르 팰리스 이 세 개의 나이트클럽을 파리에 오픈해 명소로 키워낸 인물이다. 그중 몽마르트르 지역에 위치한 르팰리스는 패션, 아트, 연예, 정재계 인사들, 유럽과 미국의 젯셋족이 모여들며 1980년대 파리의 퇴폐적 아름다움을 과시한 핫 플레이스로 손꼽힌다. 장 폴 고티에는 르팰리스에서 영감을 받아 마치 전성기에 이곳을 드나든 패션 아이콘들을 대거 무대 위로 불러낸 듯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모델들은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담배를 피우고, 샴페인을 마시면서 나이트 클러빙을 즐기는 당시의 힙스터를 연기했는데, 장식이 가득 들어간 남성용 턱시도 재킷이나, 크리스털로 덮인 레이스 케이프 등 르팰리스의 패션 피플들이 실제 입던 아이템을 고티에식 고급스러움으로 포장한 스타일링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Atelier Versace
지아니 베르사체 시절의 베르사체 하우스가 섹스&글램 위에 세워진 럭셔리 공화국이라면,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이끄는 현재의 베르사체는 좀 더 여자의,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패션 하우스 쪽에 가깝다. 몸에 딱 붙는 미니 드레스나 미끈한 다리를 드러내는 슬릿 스커트 등 베르사체의 컬렉션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아이템을 보여줄 때도 도나텔라는 남자들이 보고 열광할만한 섹시함보다는 여체의 풍만한 곡선이 그려내는 자체의 아름다움에 집중한다. 이번 쿠튀르에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여체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요즘 패션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부각된 ‘애슬레저’ 코드를 끼워넣었다. 선수들의 운동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팅과 운동화 끈을 연상시키는 레이스업 장식이 베르사체만의 끝내주는 드레스와 보디컨셔스 슈트에 얹혀 여럿 등장했다. 지지 하디드, 나타샤 폴리, 마리아카를라 보스코노 등 슈퍼모델들의 명불허전 화끈한 워킹으로 컬렉션이 더욱 돋보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Giambattista Valli
페넬로페 크루즈, 마리옹 코티야르, 엠마 스톤, 샌드라 불럭, 그리고 리한나도 입었다. 지암바티스타 발리 오트 쿠튀르 얘기다. 페넬로페 크루즈처럼 초기부터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팬인 셀레브리티는 꽤 여럿 있었지만 2015년 시즌 드레스를 엠마 스톤과 리한나가 입어 연타석 홈런을 친 이래, 지암바티스타 발리는 젊은 힙스터 셀렙들이 선택하는 드레스로 드높은 상한가를 치고 있다. 탄성이 터져나오는 소녀다운 여리여리한 장식이 강점인 발리는 파리의 꽃을 주제로 이전 시즌에 비해 더욱 로맨틱함을 강조한 컬렉션을 펼쳤다. 허리선이 높은 미니 드레스에 꽃 장식을 더한 룩과 여러 겹의 튤로 이루어진 롱 드레스는 브리 라슨 같은 어린 여배우들이 탐낼 만했다. 특히 피날레에 등장한 빨강 오프숄더 튤 드레스는 이번 쿠튀르 시즌에 등장한 전체 드레스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