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과 쾌락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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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세실리 브라운의 붓 끝에서는 색과 욕망과 에너지가 폭발한다. 그의 뉴욕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서자 벌거벗은 육체들이 엉키고 스며들어 완성한 풍경들이 사방에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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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한국 기자가 해외 인터뷰이를 만나서 할 수 있는 최악의 질문을 던질 뻔했다. “두 유 노우 케이팝?” 이 문장이 튀어나오기 직전에 가까스로 씹어 삼켰다. 이게 다 빅뱅의 탑 때문이다. 잡담을 교환하던 중, 세실리 브라운이 귀에 익은 이름을 불쑥 언급한 것이다. 취향 좋은 아트 컬렉터이기도 한 탑은 브라운의 작품에 대한 호감을 종종 밝히곤 했다. 작가 역시 이 소식을 전해 들었고, 결국 자신의 슈퍼스타 팬과 인스타그램 친구가 됐다. “굉장히 잘생겼더라고요.” 그가 10대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 무렵 미국 투어를 진행 중이던 빅뱅의 뉴저지 콘서트에도 초대받은 모양이었다. 중요한 선약 때문에 참석은 포기해야 했다면서 깍듯하게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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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세실리 브라운도 1990년대 뉴욕 미술계의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 영국 출신인 그는 당시 급부상 중이던 yBa의 일원으로 합류하는 대신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쪽을 택했다. 가고시안 갤러리가 이 재능 있는 신인을 후원하고 나섰으며 워싱턴의 허시혼 미술관, 뉴욕의 휘트니 비엔날레와 PS1, 런던의 사치 갤러리 등도 색과 에너지가 폭발하는 듯한 그의 작업을 앞다투어 소개했다. 그 와중에 2000년도 <배니티 페어>에 실린 포트레이트는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맨발로 작업실 바닥에 비스듬히 누운 세실리 브라운은 젊고 섹시했다. 심지어 티셔츠에는 큼직한 달러 문양까지 프린트되어 있었다. 당대 대중의 눈에 그는 마돈나 못지않은 ‘머티리얼 걸’이었을지도 모른다. 벌거벗은 육체들이 섞이고 스며드는 광경을 묘사한 대형 페인팅은 엄청난 가격에 거래됐다. 하지만 스캔들에 가까웠던 유명세는 예술가에게 극복해야 할 숙제이기도 했 다. “이렇게 오래 회자될 줄 알았다면 그 망할 사진을 안 찍었을 거예요.” 영국식 악센트가 실린 욕설에는 한숨과 웃음이 모두 묻어 있었다. 물론 지난 20여 년간의 성취를 통해 세실리 브라운은 스스로가 잠깐의 스캔들이 아니었음을 이미 증명했다. 그는 여전한 에너지로, 한결 신중하고 깊은 표현을 고민 중이다.

세실리 브라운의 스튜디오는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다양한 사이즈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2015년에 소형 작품들만 따로 모아 전시를 열기도 했다.

붓과 물감으로 빼곡한 화가의 작업대.

히로니뮈스 보스의 회화부터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앨범 커버 아트까지, 아티스트가 작업에 참고하고 있는 이미지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작업 중인 캔버스가 여럿이다. 여러 작품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는 편인가?
대부분은 그렇다. 미완성 상태의 작품들이 서로를 자극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번 주 들어 내가 붓을 댄 건 다섯 점이다. 그런데 그 외의 또 다른 다섯 점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느낌이다. 여러 작품을 동시에 그리는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때때로 물감을 말려가면서 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늘 개별 작품이 아닌 전체의 단위로 생각을 한다. 각각의 페인팅은 또 다른 페인팅과 오버랩되기 마련이다. 이 스튜디오에는 무려 7년 전에 시작한 그림도 있다. 약 5년쯤 방치해뒀다가 얼마 전에 다시 착수했다. 그리고 이번 주에는 1 년 전에 시작한 작품을 비로소 끝낸 기분이 든다.

인스타그램에 작업 중인 페인팅 사진을 올리고 의견을 구하기도 한다. 팔로어들의 의견을 수렴할 때도 있나?
가끔씩은. 물론 가려서 들을 필요는 있다. 팔로어들은 대체로 내 작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덧글 내용도 죄다 긍정적이다. “ ‘좋아요’가 500개나 되네? 이 작품은 이제 완벽해.” 이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냥 고마운 응원과 작은 즐거움을 얻는 거다. 사람들의 의견에 내가 동의하지 않을 때도 많다. 며칠 전에는 사진 하나가 엄청나게 많은 ‘좋아요’를 기록했다. 완전히 망쳤다고 생각한 페인팅이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그래서 다시 살피는 중이다. 그들이 맞고 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구상과 추상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고, 작품의 사이즈 역시 다양하다. 붓을 들기 전 대략의 계획을 세우는 편인가? 아니면 철저히 즉흥적인 방식을 따르나?
대단히 즉흥적이고,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진다. 이야기했다시피 나는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한다. 구상적인 작업과 추상적인 작업을 나란히 두고 그리기도 한다. 그 대비가 무척 마음에 든다. 각기 다른 그림들이 서로를 자극하는 느낌이다. 한쪽을 택하는 대신 두 방법론을 오가는 게 내게는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나는 매번 구상적으로 생각하고, 그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한참 그리다 몇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면 이미 추상에 가까워진 경우가 많다.

Surely We Have Bourne Our Griefs 2008-2010, Oil on linen, 63.5 x 55.9cm Courtesy of Cecily Brown and Kukje Gallery

Surely We Have Bourne Our Griefs
2008-2010, Oil on linen, 63.5 x 55.9cm
Courtesy of Cecily Brown and Kukje Gallery

2000년도 <배니티 페어> 인터뷰에 함께 실린 포트레이트는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아직까지도 당신에 관한 기사에 종종 언급될 정도다. 당시에는 그 사진이 이렇게 오래 회자되리라고 예상을 못하지 않았을까?
물론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 망할 사진은 안 찍었을 거다. 내가 남자였으면 사정이 달랐겠지. 리처드 프린스도 섹시한 사진을 숱하게 찍었지만 다들 별말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바지를 내려서 탠 라인(일광욕 으로 인한 수영복 자국)까지 드러냈는데 말이다. 적어도 난 탠 라인을 보여주진 않았다. 그 사진은 가벼운 농담이었다. 사진가인 토드 에버리와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장난을 쳐본 거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이미지였던 모양이다. 평론가 로버타 스미스는 내 전시 리뷰에 그 사진을 언급하기도 했다. 애초의 유머는 휘발되어버렸다.

남성 작가들이 주도하던 추상표현주의의 전통에 여성의 분명 한 목소리를 보탠 작가다. 미술계에서 여성 작가의 영향력은 전에 비해 커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아직도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나?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수준의 불균형을 목격한다. 바꾸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다. ‘남성 작가들이 추상표현주의를 주도했다’고 말했지만, 이전에도 뛰어난 여성 작가들은 많았다. 응당한 주목을 받지 못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질문이 현 상황을 설명해주는 완벽한 사례인 셈이다. 물론 최근 들어 의식적인 노력이 목격되고 있기는 하다. 재개관한 휘트니 뮤지엄은 프랭크 스텔라 같은 ‘빅 보이’들과 함께 리 크라스너의 대형작품을 설치했다. 당대의 여성 작가들을 조명하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걸 다들 부끄러워해야 한다. 한참 전에 지금보다 훨씬 큰 주목을 받았어야 했던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균형을 찾 으려는 시도가 목격되기 시작한 지금이야말로 한편으로는 위험한 시기라는 생각도 든다. ‘정치적 공정성’을 앞세운 당위론은 늘 역풍을 맞기 마련이니까. 어쨌든 시대는 변화하고 있다. 한때는 아이를 가지면 작가로서는 끝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늘 그 많던 여성 화가들이 죄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궁금했다. 어머니가 되고 삶에 부대끼면서 붓을 놓아야 했던 경우가 많았다.

여섯 살짜리 딸이 스튜디오에 자주 들른다고 들었다. 엄마의 작품에 대한 아이의 평가는 어떤가?
우리 애가 좀 웃긴다. 칭찬에 인색해서 뭐든 다 좋다고 하는 경우가 없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물어보면 한참을 신중하게 생각한 뒤 한두 점 정도만 가리킨다. 최고의 찬사는 이런 거다. “엄마, 나 이거 가져도 돼?” 1년 전쯤인가, 자선단체에 기부할 작품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후보작 중 하나를 보더니 걔가 이건 절대 다른 사람에게 줘서는 안 된다면서 사정을 했다. 그래서 결국 그 그림은 갖고 있기로 했다. 딸이 더 크면 선물할 생각이다.

2016년에는 뉴욕 드로잉 센터에서 대규모 드로잉 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다. 오일 페인팅이 아닌, 드로잉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다.
드로잉 센터 쇼를 앞두고 내가 짚어봐야 할 문제다. 하려는 이야기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매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된다. 요즘 나는 낙원의 풍경을 드로잉하고 있다. 과거의 대가들이 묘사한 이상향을 카피하는 작업에서부터 출발했다. 자연스럽게 수채물감과 과슈를 사용하게 됐는데,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게 맞는 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파스텔로도 시도해봤으나 그건 옳은 선택이 아닌 듯했다. 드로잉은 오일 페인팅을 위한 준비 단계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 자체로 독립된 작품이 되기도 한다. 나는 종종 어떤 형태를 익히기 위해 드로잉 작업을 한다. 작은 쥐 따위를 수채 물감과 잉크를 사용해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리는 거다. 일종의 ‘머슬 메모리’를 습득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동작을 내면화한 뒤 대형 캔버스 앞에 서면 뭔가를 참고할 필요 없이 한숨에 그리게 된다. 그렇다면 드로잉은 내게 단지 준비 운동일 뿐일까? 그렇지는 않다. 종이에 뭔가를 그리면서 정보를 습득하고, 필요한 형태를 발견하고, 많은 걸 이해하게 된다. 그 과정의 기록 또 한 중요하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에디터
정준화
포토그래퍼
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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