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사람들은 새로움보다는 잊고 지낸 추억에 더 목말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예뻐질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존재하는 지금, 옛날식의 미용법이나 화장법이 궁금할까 싶지만 1980년대의 화장은 그냥 그런 구식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급변하는 시대를 사는 여성들의 얼굴, 지금 가장 무르익은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세대의 청춘이 담겨 있다.
1601_그땐

사실 ‘응답하라’ 시리즈가 다시 한번 만들어질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번에는 배경이 1988년이라는 걸 알았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복고 트렌드가 어지러운 이 시대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단비 같은 존재이자 현상이라 해도 언제까지 ‘아 옛날이여!’만을 노래할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 하나 더 덧붙이자면 90년대가 아닌 80년대로, 이전 시리즈보다 시점을 더 거슬러 올라가기까지 했는데 방송 트렌드를 좌우하는 젊은 층이 과연 공감할까 싶은 의문도 있었다. 방송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건 찾아보기 어렵고,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가 현재에서는 오히려 신선한 이슈가 될 수도 있으니 뒤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모바일 메신저 단체 채팅방마다 드라마 주인공인 ‘덕선이’, ‘정환이’, ‘택이’를 친구 이름 부르듯 호명하며 설레고 작은 위안을 느끼는 언니 동생의 대화를 보고 있자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화에 뒤처질까 한발 늦게 찾아 보기 시작한 <응답하라 1988>에서는 초반부터 직업병을 발동하게 하는 명장면이 하나 나왔다. 여주인공인 덕선이 언니의 화장품으로 그야말로 ‘쌍팔년도’ 화장을 하는 신이었다. 얼굴과 목의 색이 따로 놀고 입술은 쥐 잡아 먹은 듯 벌건 것이 이건 뭐,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저땐 저런 메이크업이 유행이었지라는 흐릿한 기억이 떠오름과 동시에 새 시즌 트렌드보다 1980년대의 진짜 뷰티는 어땠는지가 갑자기 더 궁금해졌다. 보리맛 탄산음료와 김치 없이 찐 고구마를 먹는 것 같은 느낌의 텁텁하게 분칠한 피부부터 갈매기가 한 마리 앉은 듯한 눈썹, 지금도 고수가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 하늘색 아이섀도, 진한 레드 립스틱, 성냥불을 달궈 올린 속눈썹, 화룡점정으로 쌍꺼풀에 잘라 붙인 테이프까지. 이제 걸그룹 멤버 혜리의 얼굴보다 더 익숙해진 덕선이의 얼굴을 시작으로 80년대 언니들의 얼굴을 뒤적여보기 시작했다.

우선 드라마 속 장면처럼 지금 보기에 다소 과장된 메이크업이 왜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알아야 했다. 먼저 1980년대는 우리나라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여성들은 전보다 과감하게 자기 표현을 하기 시작했고, 개성도 한결 뚜렷해졌다. 분위기가 그랬다. 통행금지가 해제되었고 컬러 TV가 생겨났으며, 86아시안 게임과 88서울올림픽 등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정책과 행사를 유치하고 진행하던 때였다. 특히 컬러 TV의 등장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뷰티 브랜드들이 내놓는 색조 화장품 컬러가 대담해지고 다양해지는 데 크게 일조해 전환기를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엄마 화장품을 몰래 쓰는 게 아니라 젊은 여성들이 자신만을 위한 화장품을 가질 만큼 화장품이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특히 색조 화장에 관심이 높아졌다. 여기에 맞춰 다양한 콘셉트의 브랜드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 메이크업의 트렌드는 이목구비가 뚜렷해 보이도록 짙은 음영을 확실하게 주는 ‘입체 화장’이었다. 80년대를 주름잡은 주미와 금보라, 임예진, 황신혜의 당시 활동 모습만 봐도 또렷한 인상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화장품 모델이 된 연예인의 화장법이 메이크업 교과서나 다름이 없었다. 앞서 이야기한 <응답하라 1988>에서 혜리가 보여준 화장의 모태 또한 핀컬 펌 헤어에 컬러풀한 핑크와 오렌지, 블루와 그린 등 아이 메이크업이 도드라진 화장품 모델들의 모습인 셈이다. 그럼 화장품은 어떤 걸 썼을까? 당시에는 아모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지금의 ㈜아모레퍼시픽은 리바이탈, 나그랑, 삼미, 화니핀, 설화, 순정, 마몽드 등 다양한 스킨케어와 메이크업 브랜드를 내놓았고, LG생활건강의 모태인 럭키주식회사는 1984년 ‘드봉’이라는 브랜드를 시작으로 화장품 사업을 재정비했다. 드봉에서는 리포솜 화장품을 선보이기도 했으며 88년에는 사회 초년생을 위한 ‘에스코트’라는 화장품을 출시했다. 색조 화장품뿐만 아니라 각 뷰티 브랜드 연구소에서 스킨케어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해 과학적 세분화가 이루어졌으며, 고농축 영양 유액인 에센스가 출시되고 한방 화장품이 만들어지는 등 고급화 전략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UV 제품이 등장해 인기를 끈 것도 이때부터다. 이들 회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한국화장품은 세시봉, 쥬단학 등의 브랜드를 통해 업계에서 입지를 굳혔다. 1989년에는 또 하나의 굵직한 뷰티 회사가 출사표를 던졌다. 후발 주자라서 기업 광고만 하던 코리아나화장품의 첫 상품은 ‘바블바블 샴푸’. 당시 고급 샴푸로 인식되어 있던 향이 좋은 퍼퓸 샴푸의 콘셉트를 도입해 샴푸에 발삼 향을 사용했다.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퍼퓸 향수를 애용하고 있는 걸 보면 브랜드의 첫 아이템 선택이 꽤 탁월했던 것 같다. 이를 시작으로 90년부터 이미숙, 채시라를 연이어 모델로 발탁했는데 이후 채시라는 무려 15년이나 모델로 활동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그야말로 화장품 풍년이었다. 뷰티 시장이 이렇게 급진전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1983년부터 화장품 시장의 개방으로 해외 화장품이 들어오기 시작해 본격적인 경쟁 체제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3~4년, 1~2년 사이로 유지해오던 신제품 출시 사이클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로 빨라지게 된 것.

물론 눈 깜박만 해도 신제품이 매장에 진열되는 요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화장품 업계에 큰 파도가 칠 때 해외의 메이크업 트렌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6년에 출시된 최초의 투-톤 립스틱인 겔랑의 ‘루즈 비꼴르끄’ 광고 비주얼만 봐도 감이 올 거다. 진한 입술과 굵고 선명한 눈썹, 눈두덩을 꽉 채운 아이 메이크업, 빈틈없이 커버한 모델 얼굴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오라를 풍긴다. 두 가지 색 립스틱이 80년도에 이미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도 여자들의 눈을 반짝이게 하는 겔랑의 ‘메테오리트 파우더’ 또한 1987년에 첫 출시된 제품이다. 메이크업을 담당하던 도미니크 자보가 중국 여행을 하다가 분가루로 된 파우더를 연극 배우들이 사용하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어떤 피부에도 어울리도록 다양한 컬러가 믹스된 구슬 파우더를 개발한 것. 서양 여성들은 아마도 이 시기에 이 파우더로 뽀얗게 ‘분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타 브랜드들의 메이크업 제품 스타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유행은 돌고 돈다는 법칙 아닌 법칙이 꽤 오랜 시간 깨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80년대부터 존재하던 아이템이 지금도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화장대에 자리하고, 난다 긴다 하는 트렌드 최전방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내놓는 매 시즌 키 룩에는 190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에 생겨난 다양한 트렌드를 모티프로 한 메이크업이 빠지지 않으니 말이다. 80년대에 가장 빛을 발한 원색의 아이섀도와 붉은 립스틱, 컨투어링 제품은 진화를 거듭해 2016년인 지금 키 아이템이 되어 있다. 공항을 테마로 발표한 샤넬의 2016 S/S 레디-투-웨어 쇼에서는 파란 아이섀도로 양쪽 눈두덩을 모두 덮는 걸로도 모자라 미간까지 이어지도록 연출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80년대 메이크업을 드라마를 통해 다시 봤을 때의 신선한 충격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물론 아티스트의 테크닉과 제품의 질은 비교할 수 없지만 말이다. 80년대에 보던 원색 아이 메이크업도 이렇게 모던한 표현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걸 얘기하려는 거다.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각자의 몫이다.드라마에서부터 출발해 그 시절을 훑어보고 나니 복고는 태양과 달이 만나는 일식 같은 게 아닐까 하는 나름의 결론이 내려졌다. 언젠가는 꼭 만나 진귀한 광경을 목격하게 해주니까. 일부러 그리워하지 않아도 사방에서 보이고 들릴 만큼 뷰티, 패션, 문화 전반에 걸쳐 식지 않고 있는 복고 열풍과 ‘추억팔이’ 문화.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반증일 수도 있지만 뭐 어떤가. 긍정적인 힘과 영감을 얻을 수 있다면 이런 시간 여행의 유혹은 환영한다. 그게 마네킹처럼 부담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