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과 시즌 사이, 매년 12월 샤넬 하우스는 가브리엘 샤넬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도시를 선정해, 해당 도시 특유의 분위기와 감각을 담은 공방 컬렉션을 선보인다. 모스크바, 상하이, 비잔틴, 봄베이, 에든버러, 댈러스, 잘츠부르크에 이어 칼 라거펠트가 선택한 이번 행선지는 바로 현대와 고대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도시 로마. 이번 컬렉션은 사랑하는 사람을 잊기 위해 찾은 로마를 결국 사랑하게 된 가브리엘 샤넬과 이탈리아 영화, 그리고 프랑스 여배우들에게서 영감 받아 완성했고, 이 창의적인 룩을 선보이기 위해 전설적인 영화 스튜디오 치네치타에 거대한 샤넬 왕국을 건설했다.

로마와 사랑에 빠진 샤넬
1920년 샤넬이 연인 보이 카펠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겨 찾은 곳이 바로 로마다. 슬픔을 잊기 위해 찾은 고작 몇 주간의 여행이었지만 그녀는 그때 도시 전체가 박물관 그 자체였던 로마의 웅장함과 그녀의 발길을 이리저리 이끈 소박한 돌길에 매료됐다. 그때 이후로 샤넬은 이 매혹적인 로마의 역사와 예술을 사랑하게 됐고, 이후 비잔틴 문화와 바로크 시대의 보석,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과 건축, 고대 미술은 그녀의 쇼를 통해 수도 없이 재해석되곤 했다. 즉 그녀의 독보적인 바로크적 취향은 바로 그 당시 로마에서 비롯된 것. 한 나라의 문화를 더욱 깊이 알려면 그곳에서 나고 자란, 그 문화에 정통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말이 있듯 1936년 샤넬은 전설적인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를 만나면서 로마에 더욱 매료된다. 그리고 프랑스 영화 거장 장 르누아르를 그에게 소개시킨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으로 회자된다. 그때이 둘이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명화라 여기는 수많은 영화는 탄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가브리엘 샤넬은 이런 류의 문화 예술적 교류를 무척 즐겼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각국의 외교관이 하는 국제 문화 교류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한편 그 당시 이탈리아의 영화감독들은 샤넬의 날카로운 충고 없이는 영화를 만들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감각을 높이 샀다. 영화에 들어가기 전에 여배우들을 샤넬에게 보내 스타일을 점검받았을 정도로 말이다.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는 당시 <루트비히 신들의 황혼>에 출연한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를 샤넬에게 보내 자신의 영화에 어울릴 만한 스타일로 변신시켜줄 것을 부탁했다. 후에 로미 슈나이더는 샤넬을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샤넬이 직접 저에게 조언해준 적은 없지만 전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답니다. 그녀는 마치 엄격한 논리와 원칙을 갖춘 하나의 양식이었어요.” 로미뿐만이 아니다.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의 여주인공 아누크 에메, 프랑스 누벨바그의 여신 잔 모로 같은 여배우 역시 샤넬의 옷을 영화 안팎으로 입고 다녔다. 잔 모로는 영화에 출연할 때마다 샤넬 옷을 입었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밤>에서는 내내 샤넬의 검정 슬립 드레스만 입고 등장했다.

현실과 환상 사이
12월 1일 저녁, ‘2015/16 파리 인 로마 공방 컬렉션’을 보기 전 칵테일 파티와 영화 관람이 있었다. 파티 장소는 TV 쇼‘Rome’의 세트장으로 쓰인 ‘로마 안티카(Roma Antica)’ 영화 세트장. 그곳에는 그리스 신들의 조각상들이 수없이 널려 있었고 이는 파티의 훌륭한 장식품이 되어주었다. 간단히 칵테일을 즐기고 난 뒤 칼 라거펠트가 만든 단편 영화, <원스 앤 포에버>를 관람하기 위해 치네치타의 메인 스튜디오 중 하나인 ‘피나시’로 이동했다. 총 8백 석에 달하는 관람석과 영화 상영을 위해 제작된 초대형 스크린을 보니 과연 샤넬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 정도는 애피타이저에 불과한 것임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말이다. 칼의 판타지와 위트가 투영된 영화가 끝나자, 어마어마한 크기로 시선을 압도했던 동상들이 자리한 정원을 지나 테아트로 No.5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이곳은 <달콤한 인생>, <영혼의 줄리에타>, <카비리아의 밤> 등으로 아카데미상을 다섯 번이나 수상한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가 즐겨 사용한 스튜디오로 1937년에 지어진 곳이다. 그곳에 들어서자 안개가 자욱한 회색빛 거리가 펼쳐졌고, 이는 흑백영화 속 한 장면처럼 로마 속 파리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것. 칼 라거펠트는 파리의 로맨틱한 풍경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싶었다고 했다. 꽃 가게, 와인 가게, 식료품 가게, 빵집, 레스토랑, 카페 등 작고 귀여운 파리의 옛 상점들은 수십 년 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 같은 낡은 모습이었고, 그 정교함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마치 1930년대 파리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시간이 멈춰진 그곳에 크리스토프 샤솔의 피아노 선율이 흘렀고, 파리 지하철 5호선 역에서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을 한 칼의 분신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번 시즌 그는 트위드, 울, 캐시미어 같은 클래식한 소재에 이탈리아 특유의 화려한 장식을 가미했다. 파리의 여인과 이탈리아 여인의 절묘한 조화랄까. 하나하나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어떤 점이 파리의 클래식이고, 어떤 부분이 이탈리아 여인의 열정을 표현한 것인지 구분할 수 있어 쇼를 보는 즐거움이 컸다. 쇼 전반을 지배한 컬러는 바로 로마의 가을빛을 표현한 브라운과 오렌지, 카푸치노, 그리고 로마의 고급스러운 대리석을 모티프로 한 베이지 색이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더없이 우아하고 조화로웠다. 한편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룩들을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쇼는 끝을 향해 달려갔고, 끝날 즈음 갑자기 세트로 만든 가게들이 하나둘 불이 밝히며 실제로 운영을 하는게 아닌가! 레스토랑, 과일 가게, 정육점, 바 에서는 숨어 있던 주방장과 웨이트리스가 나타났고, 음식과 술이 무한대로 제공되어 관객은 테이블에 앉아 쇼의 여운을 마저 즐겼다. 환상의 세계에 초대되어 하룻밤 꿈을 꾸었나 싶은 경험을 안겨준 샤넬의 공방 컬렉션은 그렇게 또 한 편의 시를 쓰고 막을 내렸다.

영화 속 영화 <원스 앤 포에버>
파리-로마 공방 컬렉션 쇼 직전 공개된 필름 <원스 앤 포에버>는 칼이 만든 그동안의 단편 영화가 그랬듯 공개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했다. 우선 시작부터 재미있는 건 구조가 영화 속 영화였기 때문이다. 내용은 우리가 그동안 세세하게 알지 못한 가브리엘 샤넬의 인생 전반,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재기에 성공한 1950년대의 모습이 들어 있다. 한편 이 영화 속에는 칼 라거펠트가 애정하는 두 명의 주연 배우가 등장하는데, 한 명은 젊은 시절 가브리엘 샤넬을 연기하는 여배우 역을 맡은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1950년대 중년의 샤넬을 연기하는 제랄딘 채플린이다. 제랄딘 채플린은 무려 다섯 번이나 가브리엘 샤넬을 연기한 베테랑이다. 흥미로운 건 촬영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다뤘다는 점. 여배우의 성격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팍하며, 한창 촬영 중인 영화의 감독이 바뀌는 황당한 일도 벌어진다. 이번 영화에서도 칼은 잔잔한 위트를 놓치지 않았다. 한 성질 하는 여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상대 남자 배우를 거부하는 장면과 촬영장을 맴돌며 그녀를 쫓아다니는 기자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신에서는 특히 웃음을 유발했다.

다사다난했던 샤넬의 일대기에 까칠한 여배우 곁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유쾌한 에피소드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런 방식의 역할은 처음이에요. 그리고 우린 사전에 대본을 받지 않았죠. 칼이 작품에 담긴 샤넬의 역사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었어요. 샤넬에 대해 깊이 알 수 있는 기회였죠. 그녀는 정말 매력적인 인물이에요.” 더불어 제랄딘 채플린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인다. “가브리엘 샤넬 역할을 자유자재로 해내는 모습이 무척 놀라웠어요. 그녀 안에는 진짜 샤넬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이 패션 영화에서 유심히 봐야 할 점은 역시 의상이다. 두 여배우는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초에 만들어진 샤넬의 의상 중 가장 특별한 쿠튀르 옷을 입고 등장하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반짝이는 드레스는 무려 1919년에 만들어진 빈티지 쿠튀르 드레스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드레스를 입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샤넬의 역사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샤넬의 아카이브를 쭉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인데, 실제로 그 의상을 만져보고 입어볼 수 있다니! 엄청난 선물이었죠.” 수많은 히트 작품에 출연하며, 한 사람이 살면서 다 겪지 못할 많은 경험을 했을 그녀지만 목소리에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감격이 배어 있었다. 대체 불가능한, 오직 샤넬만이 줄 수 있는 진귀한 경험일 테니, 그 누가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