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동이 이미 포화 상태라는 판단은 잠시 미루는 게 좋겠다. 새로 들어선 문화 공간 스트라디움과 디뮤지엄이 한강진역을 중심으로 각기 왼쪽과 오른쪽의 지형도를 조금 더 바꿀 테니까.

꼼데가르송에서 이태원 방향 검은 빌딩, 지난 10월 중순 문을 연 스트라디움은 용도를 짐작하거나 선뜻 들어가보기 쉽지 않은 건물이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서 있지만, 온통 유리로 되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와는 정반대로 정체를 전혀 노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인들의 최고급 현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와 음악당을 뜻하는 ‘오디움’을 합한 네이밍에서 짐작 가듯 이곳은 ‘좋은 음악을, 좋은 음질로 감상할 수 있는’ 장소다. 지하부터 4층까지 각각 다른 용도로 디자인된 공간에서 헤드폰으로 혼자, 혹은 스피커가 갖춰진 작은 방에서 소규모로 음악 감상을 할 수 있으며, 스튜디오에서는 작은 공연도 열린다. 뒤로 남산이 올려다 보이는 루프톱 라운지에서도 내내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원한다면 하루 종일, 시간 제한 없이 머무르면서(입장료는 1만원이다) 음악에 집중할 수도, 음악과 더불어 쉴 수도 있는 곳. 이렇게 스트라디움은 그저 둘러만 봐도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이지만, 그 중심에는 건축이나 인테리어가 아니라 음악이 있다. 영화 <라붐>의 시끄러운 파티장에서 소년이 소녀의 귀에 헤드폰을 씌우는 순간 다른 세상이 열리듯, 이곳에서 만나는 음악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뿐 아니라 내면의 풍경까지 순식간에 바꾸어놓는다.
아이리버의 하이엔드 음향 기기 브랜드인 ‘아스텔 앤 컨’이 스트라디움을 운영하는 주체지만,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은근하게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다. 고음질의 이 휴대용 음악 기기는 모두가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도 백만원대 이상의 높은 가격에 팔리며 해외에서 뜨거운 반응과 음질에 대한 호평을 얻었다. 스트라디움은 상대적으로 국내에서 인지도가 낮은 아스텔 앤 컨을 알리기 위한 방편인 셈인데, 팝업 스토어나 쇼룸, 스타 홍보 마케팅도 아닌 정말로 우직하고 근본적인 방식이다. “진짜 좋은 사운드로 음악을 귀 기울여 듣고, 섬세한 소리의 감동을 느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음악과 관련된 여러 가지 행위가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음악에 집중해서 질 좋은 경험치를 쌓을 수 있는 곳이 여기 스트라디움이에요.” 김경진 디렉터는 디바이스 판매에 직접적인 효과는 없더라도 선별된 음악을 좋은 소리로 들으면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이곳의 목표라고, 마치 언제 수확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고랑을 손보고 덤덤하게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말한다.
지난 10월 17일 있었던 오프닝 콘서트,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의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연주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건 나무로 둘러싸인 스튜디오였다. 2층과 3층을 터서 층고를 확보한 이 작은 홀은 70~80명 규모의 작은 연주회를 열거나 녹음에 활용하게 된다. 벽면의 흡음판을 열고 닫아 소리를 모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공간 디자인은 영국 애비로드, JVC 스튜디오 등을 설계한 일본의 어쿠스틱 디자이너 샘 토요시마의 작업이다. 기존의 건물을 거의 골조만 남기고 레노베이션한 건축 디자인은 구승회 소장이 맡았으며(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제주도의 서연의 집을 만든), 실력 쟁쟁한 4명의 사운드 엔지니어가 자문 역할을 했다. 비치된 아스텔 앤 컨 기기에 들어가는 음원 플레이리스트부터 공연이나 토크 콘서트 프로그램까지, 공간을 채우는 음악 콘텐츠 역시 전문가들의 큐레이팅으로 채워진다. 12월에는 테너 김세일과 피아니스트 윤홍천의 슈만 연가곡 ‘시인의 사랑’, 재즈 콰르텟 프렐류드, 피아니스트 박종화 등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숫자로만 평가받을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입장료나 공연 티켓으로 수익을 올릴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에게 다른 가치를 줄 수 있는 곳, 뮤지션들이 좋아하는 공간이 되는 걸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우연히 길 하나를 사이에 두게 됐지만, 건물의 입지를 선정할 때까지도 스트라디움에서는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문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할 만한 정보력과 경제력이 있는 30대들이 한남동 인근을 즐겨 찾는다는 리서치를 참고로 했다고. 어쨌거나 전혀 다른 스타일과 태도로 사람들에게 음악을 알리고 있는 두 공간에서 방문자로서 누리고 취할 수 있는 베네핏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음악의 매력을 새로 발견하고 충분히 경험하는 일, 그래서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것.


최근 몇 해 사이 젊고 대중적인 기획의 전시를 공격적으로 마케팅하면서 대림미술관은 ‘힙스터 플레이스’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트렌디한 장소들을 가장 먼저 찾아다니는 부류의 젊은 유행 사냥꾼들에게 대림미술관은 꼭 들러야 하는 곳이 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서촌 지역의 붐은 이 성공과 더불어 서로를 견인했다.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거나 미술관이 특정한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게 되었다는건 돌연하고도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제 한남동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켜봐야 할 때가 왔으니, 12월 5일 대림미술관의 새로운 전시 공간인 디뮤지엄이 독서당로에 개관한다. 통의동보다는 숨어 있고 대중교통으로의 접근이 다소 불편하지만 더 넓고 쾌적하다. 그간 칼 라거펠트, 라이언 맥긴리, 린다 매카트니, 헨릭 빕스코브 등의 전시가 엄청난 관람객을 끌어들이면서, 2002년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개관한 대림미술관 건물은 관람 인원을 수용하는 데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마당이 딸린 주택을 개조한 건물의 특성상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장점 대신 전시 공간이 협소한 한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남동의 디뮤지엄 개관으로 대림미술관은 전시를 위해서나 관람객을 위해서나 확장된 장소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총 2천 제곱미터가 넘는 면적의 기둥이 없는 공간에 4m부터 8m까지의 층고를 갖춘 전시실은 한결 큰 스케일의 전시가 가능하며 공연, 패션쇼, 강연 등의 행사에도 활용된다.
대림미술관의 손명민 수석 큐레이터는 두 군데 미술관을 전시 주제나 콘셉트에 따라 나누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촌과 한남동을 새로운 아젠다로 분리해서 운영한다기보다, 지속적으로 해오던 콘텐츠 확장이라는 시도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더 열린다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개관전도 그런 의미에서 디뮤지엄의 넓은 공간을 활용한 대형 라이트 아트 설치작업을 소개하는 전시로 정했고요. 앞으로도 한남동의 미술관이 지금까지 시도하지 못했던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 보며, 통의동과 두 공간이 합쳐졌을 때 더 완전해지는 그림을 그리려고 구상하고 있습니다.” 손 수석 큐레이터의 말처럼 개관전인 <9개의 방, 빛으로 깨우다 (Spatial Illumination- 9 Lights in 9 Rooms)> 는 방대한 디뮤지엄의 공간을 최대로 활용하고 장악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빛을 주제로 평면보다 공간을 한껏 사용하는 설치 작업 9개를 선정, 9개의 독립적인 전시 공간으로 구성했다.
한 건물 안에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과 사무실 등이 들어와 복합문화공간을 이루는 개방성도 디뮤지엄의 새로운 면이다. 카페 세시셀라, 아벡누, 레스토랑 르캐비아 등이 디뮤지엄과 같은 리플레이스 빌딩에 입점을 기다리는 상태. 10월 초에 ‘뮤지엄 어웨이크닝 파티’를 통해 출발을 알린 대림미술관은 정식 개관일인 12월 5일부터 통의동의 기존 미술관과 프로젝트 스페이스 빈집, 한남동의 디뮤지엄과(곧 디뮤지엄 스페이스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구슬모아당구장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갖추게 되었다. 한남더힐과 리첸시아, 유엔빌리지에 둘러싸인 독서당로의 지정학적 위치는 통의동과 비교할 때 다소 연령대가 높고 성숙한 테이스트를 바탕에 둔다. 이 지역이 뮤지엄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방문자들을 받아들일까? 그들은 라이언 맥긴리의 포스터를 손에 쥐고, 린다 매카트니의 에코백을 어깨에 걸고 서촌을 오가던 힙스터들과는 얼마나 같고 또 다른 사람들일까? 아마 내년 벚꽃이 필 무렵이면 무언가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