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자마, 나의 침실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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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내내 입어도 좋다. 의외로 실용적이고 더없이 편안한 파자마 룩의 무궁무진한 매력을 알게 되는 순간, 그 마성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로 하여금 파자마 셔츠를 구입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진이 있다. 1992년 1월 프랑스의 대표 음악 시상식인 빅투아르 드 라뮤지크에 참석한 제인 버킨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남자 퍼포머 상을 수상한 패트릭 브루엘과 함께 찍힌 그 사진 속 제인 버킨은 심플한 테일러드 팬츠 위에 실크 파자마 셔츠를 입고 있다. 시상식과 파자마 셔츠라니, 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조합 아닌가? 그러나 그녀가 입은 짙은 남색 파이핑이 가미된 셔츠는 우아함의 정수를 보여주며 웬만한 이브닝드레스보다 더 아름답게 빛났고, 결국 그 사진은 내 머릿속에 ‘파자마 셔츠를 입어야만하는 무조건적인 이유’로 각인되었다.

잠잘 때 입는 옷을 칭하는 파자마가 침실 안, 침대 위에서만 입는 옷이 아니라 보다 넓게 응용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사랑받은 건 알고 보면 굉장히 오래전부터다. 놀랍게도 무려 84년 전인 1931년 미국 <보그>는 이미 파자마 룩의 아름다움에 관해 이렇게 설파했다. “여성들은 자신의 집에서 포멀한 디너 파티를 열때, 혹은 절친한 친구 집에서 열리는 디너 파티에 갈 때 파자마 이브닝 룩을 입는 건 어떨까? 좀 더 파격적인 이들이라면 영화관 외출까지도 시도해봄 직하다”라고 이야기한 당시 기사는 지금 봐도 놀랍다. 이와 함께 게재된 W. 뮤리의 일러스트 속 여인들의 옷차림도 주목할 만한데, 화려한 플랫 슈즈와 볼드한 주얼리로 파자마의 신분 상승을 노린 부분은 2015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스타일링 비법이다. 그런가 하면 1934년 영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에서 클로데트 콜베르가 보여준 파자마 룩, 1960년 영화 <버터필드8> 속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입고 있던 관능적인 슬립 드레스, 1963년 영화 <샤레이드> 속 오드리 헵번이 입고 등장한 파자마 셔츠는 파자마 룩이 트렌드로 언급될 때마다 소환되는 상징적인 고전 영화들이다.

파자마 셔츠를 향한 마음이 한창 커질 무렵. 반갑게도 파자마 룩이 다시금 트렌드로 떠오를 것이라는 징후가 2015 F/W런웨이 곳곳에서 포착되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이 생각한 파자마 룩은 돌체&가바나 런웨이를 파자마 룩이 휩쓸던 2009년이나 스텔라 매카트니의 파자마 룩이 히트를 기록하고 마르니와 H&M이 협업한 캡슐 컬렉션에 각종 파자마 아이템이 등장한 2012년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과거의 파자마 룩이 단지 파자마 셔츠와 팬츠 세트를 재해석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이번엔 보다 포괄적인 의미의 ‘수면 의상’에 대한 다양한 오마주가 런웨이를 점령했다. 대표적인 예로, 셀린의 피비 파일로는 마치 누빔 이불처럼 보이는 거대한 패딩 숄을 무심하게 어깨 위로 두른 모델을 등장시켰다(조금 과장하자면 그야말로 추운 겨울 날 TV 보러 거실로 향할 때의 우리네 모습!). 실크 슬립 드레스를 티셔츠와 레이어드하고, 그 위에 아노락 점퍼를 걸친 랙앤본 컬렉션의 모델은 또 어떤가(이쪽은 흡사 잠이 덜 깬 채 편의점으로 향하느라 급히 외투를 걸친 모습 같다).

어깨 위로 걸친 담요를 흘러내리지 않게 여민 듯한 조셉의 드레스, 집 안 페르시안 카펫 위에서만 신어야 할 것 같은 구찌의 염소털 슬리퍼도 빼놓을 수 없다. 좀 더 극단적으로 가자면, 거위털 이불 같은 두툼한 패딩 오브제를 온몸에 동여매 당장 침낭 삼아 바닥에 드러누워도 될 법한 꼼데가르송의 전위적인 룩도 있다. 물론 파격적인 파자마 룩만 등장한 건 아니다. 끌로에와 필로소피의 경우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나 <처녀 자살 소동>의 자매들이 떠오르는 하늘하늘 사랑스러운 파자마 드레스로 시선을 끌었다. 이에 더해, 애티튜드 면에서 파자마 룩이 떠오르는 스타일링 방식을 내놓은 쇼도 눈에 띈다. 막스마라가 대표적으로, 커다란 캐멀 코트로 몸을 느슨하게 감싼 채 유유히 걸어 나온 지지 하디드는 막 침대에서 벗어나 톡톡한 가운을 걸치고 침실을 나서는 마릴린 먼로, 그 자체였다.

편안하고 세련된 룩을 입고 싶은 여성들의 욕망은 언제나 한결같다. 그리고 파자마 룩은 그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올가을의 실용적인 해답이다. 패션 저널리스트 이모겐 폭스는 영국 <가디언>지에 부드럽게 떨어지는 실루엣으로 체형 커버에 효과적이라는 점이 파자마 룩의 큰 매력이라고 썼으며, 매치스 패션의 바이어 나탈리 킹엄은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파자마 룩을 멋지게 즐기려면 화이트 셔츠나 그레이 스웨트셔츠, 데님 팬츠 같은 베이식하고 클래식한 아이템을 적절히 믹스할 것을 제안했다. 이번 가을, 파자마 아이템을 선택할 때는 두 가지를 기억하기로 하자. ‘실크 소재일수록 좋다’는 것과 ‘곰돌이, 하트 문양, 노르딕 패턴 같은 상징적인 파자마 프린트는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것. 셀린식의 이불 같은 패딩 숄에 도전해도 좋고, 가장 베이식한 파자마 셔츠부터 시작해도 좋다. 어떤 경우든 이 두 가지를 기억해 선택하고 간결한 아이템과 믹스한다면, ‘힘 뺀모던함’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에디터
이경은
포토그래퍼
허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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