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물정 모르는 책벌레 혹은 오타쿠, 얼간이 등을 지칭하던 너드(Nerd)가 이번 시즌 트렌드의 최전선에 섰다. 엉뚱하지만 사랑스럽고 기발한 이들의 활약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 시간문제다.

1. 미국 시트콤 <빅뱅 이론>의 주인공인 사랑스러운 괴짜 과학도들. 2. 너드 트렌드의 중심에 선 영화 <로얄 테넌바움>의 개성 넘치는 주인공들.3. 이번 시즌 각 시크 트렌드를 형성한 구찌의 너드.

1. 미국 시트콤 <빅뱅 이론>의 주인공인 사랑스러운 괴짜 과학도들.2. 너드 트렌드의 중심에 선 영화 <로얄 테넌바움>의 개성 넘치는 주인공들.3. 이번 시즌 각 시크 트렌드를 형성한 구찌의 너드.

 

 

 

 

덥수룩한 머리에 뱅뱅 돌아가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집에만 틀어박혀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만 열광하며 평생 유행이라곤 관심도 가져본 적 없을 법한 부류의 사람들을 우리는 보통 너드(Nerd)라고 부른다. 너드의 사전적인 의미는 지능은 뛰어나지만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나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을 뜻하나 바보, 얼간이 등의 부정적인 단어로 싸잡아 부르곤 했다. 그런데 요즘의 너드는 그 위상이 급격히 상승해 영화 <소셜 네트워크>의 제시 아이젠버그나 미국 시트콤 <빅뱅 이론>의 사랑스러운 괴짜 쉴든 쿠퍼처럼 입체적이며 매력 넘치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21세기에 접어들어 IT 혁명이 일어나면서 오로지 컴퓨터만으로 자신의 소우주를 창조해도 세계적인 영향력과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너드가 재능을 꽃피울 수 있고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적절한 시대를 만난 것. 빌게이츠,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 같은 부류의 거물들이 대표적인 현대판 너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각 분야의 최선봉에서 활약한 덕분에 너드는 일종의 문화적인 트렌드로 올라섰다.

 

 

작가 외르크 치틀라우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 <너드(Nerd)>에서 꿋꿋하고 고집스럽게 인류 역사의 이정표를 놓아온 너드-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같은 철학자부터 아이슈타인, 조지 오웰, 앤디 워홀 등 과학자, 소설가, 예술가를 포함한-의 기질을 이렇게 분석한다. ‘너드의 소명은 파괴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너드는 변화와 진보를 중재한다. 현상 유지에 기여하는 권력 행사는 산뜻한 헤어스타일만큼이나 너드에게 낯설다.’ 이러한 논리를 최근의 패션계에 빗대어봤을 때 구찌의 언어를 신선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진화시키고 있는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21세기가 원하는 완벽한 패션 너드임에 틀림없다. 오랜 기간 스타 디자이너의 그늘에 가려 2인자 역할에 머물던 그가 프리다 지아니니의 뒤를 이어 구찌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것은 <뉴욕 타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도박’과도 같은 일이었다.

 

지난 1월 프리다 지아니니가 구찌 하우스에서 예정보다 빨리 물러났고, 갑작스레 구찌의 수장이 된 미켈레가 2015 F/W 남성 컬렉션을 선보이기까지 허락된 기간은 단 5일. 미켈레는 그 5일 동안 레이스 장식의 니트 톱, 리본이 달린 꽃무늬 실크 블라우스, 손목 위로 껑충 올라간 소맷단이 눈에 띄는 재킷 등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성이 모호한 스타일의 옷을 입은 남자들을 런웨이에 출격시켰다. 어느 누구도 구찌가 이렇게 급변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던 탓에, 낯선 그의 이름만큼이나 생경하게 변화한 구찌의 새 시대를 목도한 사람들은 적잖은 충격(컬렉션 리뷰 댓글에는 ‘이게 과연 구찌인가’, ‘우리는 프리다를 원한다’, ‘R.I.P 구찌’ 같은 격렬한 반응도 있었다)에 휩싸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컬렉션에선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었고, 2015 F/W 여성 컬렉션에서도 이어진 그의 비전은 패션계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Gucci 2015 F/W Woman Collection

Gucci 2015 F/W Woman Collection 

 

 

큼지막한 뿔테 안경과 베레모를 착용한 모델들을 내세워 콜팩스 앤 파울러(Colefax & Fowler) 벽지 스타일의 꽃무늬, 조지 왕조 시대의 새 모티프, 70년대 메탈릭 플리츠와 루렉스 니트, 모피로 둘러싸인 로퍼 슬리퍼 등 어수룩하지만 쿨한 너드 스타일로 무장한 별난 복고적 미학을 선보였다. 미켈레의 모델들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로얄 테넌바움>이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혹은 자레드 헤스 감독의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의 범상치 않은, 병맛(?) 돋는 주인공들을 연상시키기도 했고, 영화 <몽상가들>의 에바 그린과 블로거 타비 게빈슨의 스타일이 뒤섞인 것도 같았다. 뉴욕이나 런던의 빈티지 마켓을 서성이는 귀여운 소년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기에도 충분했는데, 미니멀리즘과 놈코어의 물결 속에서 그 룰을 깨뜨리는 이 엉뚱하고 신선한 아이디어와 독창적인 스타일은 의외성이라는 공명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사랑에 빠졌어요.” 쇼가 끝난 직후 미켈레는 이렇게 말했다. “구찌 우먼이 느끼는 건 로맨티시즘입니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우린 영화 같은 삶을 꿈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를 위해 구찌 우먼은 과거로부터 나온 어떤 것을 채택하되 굉장히 컨템퍼러리한 해석을 덧붙이죠.” 미켈레의 코멘트를 두고 언론은 떠들썩한 논쟁을 벌였고, ‘컨템퍼러리’에 대한 존재론적 인용구를 내놓기 시작했다. 컨템퍼러리는 어느새 모호하지만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주는 패션 용어로 바뀌어버렸다. 물론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나 디올의 라프 시몬스 등 수많은 엘리트 디자이너들이 그래왔듯이, 과거를 발굴해 알 수 없는 미래에 접목시키는 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타이밍이 적절했고, 역사 속에서 여러 요소를 픽업해 괴짜 이미지의 새로운 구찌 시대를 열어갈 미켈레가 적어도 케어링 그룹에게 이익을 안겨다 줄 것은 확실하다. “길거리의 용감하고 대담한 젊은이들의 방식을 지켜보는 게 즐겁죠. 그들은 룰이 없어요. 길거리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패션을 선보이고 싶었어요. 내뜻대로 입는 개성, 즉 익센트릭(Eccentric)이 내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미켈레의 말처럼 괴짜, 별난, 기이한 등의 의미를 담은 익센트릭 코드와 개성, 길거리의 만남은 이번 시즌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했고, 비주류에 머물러 있던 너드를 하이패션으로 견인했으며 런웨이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영되었다.

 

87mm 2015 F/W Collection

87mm 2015 F/W Collection 

 

 

모두의 궁금증을 자극한 메종 마르지엘라 레디투웨어의 데뷔 무대에서 존 갈리아노는 빈티지 더미 사이에서 건져 올린 듯한 패브릭을 조합해(미켈레는 이를 ‘페이크 빈티지’라 명명했다) 기묘하고 익살스러운 룩을 만들어냈고, 차세대 마르지엘라라고 불리는 베트멍은 영화 <스타트렉>의 매력적인 캐릭터 스팍을 연상시키는 90년대풍 긱 스타일을 창조했다. 또한 발리와 라코스테 컬렉션에는 영화 <로얄 테넌바움>의 테니스 챔피언 리치의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은 스포티한 너드가 등장했다. 셀린과 미우미우, 랙&본 컬렉션에는 ‘베드퍼드 애비뉴 그래니(Bedford Avenue Granny)’라 명명할만한 빈티지 룩이 등장했는데, 이는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지역의 빈티지 마켓을 드나드는 소녀들이 입을 법한 쿼키한 룩으로 괴짜스러운 무드가 부각되는 스타일링을 지칭한다.

 

이런 변화는 이번 시즌 서울 패션위크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다. ‘실험실’을 주제로 쇼를 펼친 스티브J&요니P 런웨이에는 실험 도구와 화학 공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위트 넘치는 프린트와 커다란 실험 가운, 헤어캡, 잠자리 안경 등 키치한 아이템을 걸친 과학실의 괴짜들이 등장했는가 하면 87mm를 이끄는 김원중&박지운 듀오는 ‘너드’라는 테마 아래 쿨한 공대생 룩을 선보였다. 이들에게 너드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멋진 남성이 지녀야 할 애티튜드이자 스타일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에게 패션은 심각하거나 무거운 것이 아닌 가볍고 재밌는 것이어야해요.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겁게 인생을 사는 사람을 위한 옷을 만들고 싶었고, 엉뚱하지만 기발하며 쿨한 이미지를 대변하기에 ‘너드’ 만큼 완벽한 요소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모델 김원중의 말처럼 지금은 바야흐로 너드의 시대다. 그렇다면 너드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전 세계의 너드에게 헌정하는 옷을 만드는 더 너디스(The Nerdys)의 디자이너 너클은 ‘우리들이 집에서 입을 법한 옷들을 자유롭게 입고 다니는 쿨한 마음가짐’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1. 영화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의 은둔형 외톨이를 연기한 존 헤저.2. 영화 <판타스틱 소녀백서>에서 쿼키한 스타일을 보여준 주인공들.3. 뉴욕 근교에서 촬영한 이번 시즌 미우미우 광고 캠페인.4. 너드 트렌드에 많은 영감을 준 영화 <로얄 테넌바움>.

1. 영화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의 은둔형 외톨이를 연기한 존 헤저.2. 영화 <판타스틱 소녀백서>에서 쿼키한 스타일을 보여준 주인공들.3. 뉴욕 근교에서 촬영한 이번 시즌 미우미우 광고 캠페인.

4. 너드 트렌드에 많은 영감을 준 영화 <로얄 테넌바움>.

 

 

 

 

괴짜 기타리스트 프랭크 자파는 언젠가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표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진보는 가능하지 않다.” 이는 미켈레가 거듭 강조하는,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스타일을 지칭하는 익센트리시즘(Eccentrici-sm)과 일맥상통한다. 이렇듯 패션계가 비주류에 머물러 있던 너드 시크에 열광하게 된 이유는 명백하다. 아주 쉽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할 수 있기 때문! 이번 시즌 당신 역시 엉뚱하지만 신선하고 사랑스러운 너드들의 세계에 푹 빠질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