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프트 비어도 마실 만큼 마셔본 세계의 애주가들은 이제 사과 과즙을 발효한 술, 사이더를 잔에 채우고 있다.

예전에 유럽의 한 레스토랑에서 무심코 ‘사이다’를 주문 했다가 예상과 전혀 다른 맛의 알코올 음료가 나와 당황한 기억이 있다. 사이다라는 단어가 우리나라만 벗어나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이다는 우리가 흔히 마시는 ‘구연산과 감미료가 첨가된 무알코올 레몬 향 탄산음료’가 아니라 사과 과즙을 발효하여 만든 알코올 성분이 포함된 하드 사이더(Hard Cider)를 가리킨다. 북부 스페인의 시드라(Sidra)와 노르망디와 브르타뉴로 대표되는 프랑스 북서부 지역의 시드르(Cidre), 모두 이 하드 사이더의 다른 이름들이다.

 

사이더는 알코올 도수는 4~8도 정도로 낮은 편이고 일반적으로 탄산을 함유해 종종 맥주와 비교된다. 그리고 크래프트 맥주만큼이나 맛의 스펙트럼이 넓다. 아주 순수한 사과 맛부터 시작해서 가죽이나 젖은 양털의 향이 나는 묵직한 맛, 세미용(Semillon)이나 슈냉 블랑(Chenin Blanc)과 같은 우아한 화이트 와인의 느낌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이더가 존재한다. 산지별로도 도드라진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산은 단맛이 돌고 잘 익은 과일의 맛이 난다. 약간 시고 가벼운 편이지만 훈연 향이 나는 향긋한 스페인산 사이더도 매력적이다. 좋은 사이더는 맥주와 와인의 장점만 합쳐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와인처럼 약간 떫은 타닌의 맛에 씁쓸한 맛과 신맛, 단맛이 균형을 이루면서 동시에 적당한 탄산으로 청량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의 사이더가 술을 잘 못 마시는 샌님을 위한 구색 맞추기 정도의 달달한 술이었다면, 이제는 맥주와 와인처럼 하나의 음료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의 주요 사과 산지를 중심으로 곳곳에 사이더 농장이 생겨나고 있고, 대도시에는 이미 사이더를 전문으로 다루는 술집이 들어서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뉴욕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도 100종이 넘는 사이더 리스트를 갖춘 와세일(Wassail)이라는 사이더 전문 바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이제 일반 술집이나 바, 주말 시장에서도 쉽게 좋은 품질의 인근 지역 사이더를 맛볼 수 있고, 어퍼 웨스트의 도브테일(Dovetail)처럼 사이더를 와인 리스트에 올리는 레스토랑도 이전보다 많아졌다.

무언가 꿈틀거리며 태동하고 있는 2015년 현재의 사이더 시장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마도 100년 전 와인 산업이, 30년 전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지금 같았을 것이다. 아직 정확하게 스타일이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느낌의 사이더가 실험되고 있고 생산자들은 과감하게 새로운 맛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지금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진화의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사이더의 종류는 아직 제한적이다. 뉴햄프셔의 파넘힐 세미 드라이(Farnum Hill Semi-Dry) 같은 사이더는, 마치 소주처럼 생선부터 육류까지 모나지 않게 두루 잘 어울리고 강한 향신료나 고추장이나 간장과 같은 양념에도 지지 않는다. 특유의 상쾌한 산미와 탄산 때문에 마시고 나면, 라거 맥주를 마신 것처럼 입안이 개운하다. 어쩌면 사이더는 ‘한식과 잘 어울리는 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묵은 질문에 대한 신선한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울에서 마실 사이더가 더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