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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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주와 전소정이 둘의 이름을 잠시 지운 채 p.2라는 프로젝트 팀으로 뭉쳤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작가들은 그들의 공통분모,즉 예술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완성했다.

전시작인 ‘망원경’과 ‘누드 옷’ 사이에 자리를 잡은 전소정과 안정주.

전시작인 ‘망원경’과 ‘누드 옷’ 사이에 자리를 잡은 전소정과 안정주.

‘p. 2’는 안정주와 전소정이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의 협업 전시를 위해 결성한 일종의 프로젝트 팀이다미술, 그중에서도 미디어아트라는 분야를 공히 탐구하고는 있으나 두 사람이 지금껏 집중해온 주제나 표현 방식은 다소 상이한 편이다. “제가 이미지로 이야기를 한다면 전소정 작가는 내러티브에 비중을 두는 쪽이에요. 둘이 함께하는 작업을 책이라는 매체에 빗댈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양쪽에 각각 이미지와 글이 담긴 페이지를 사람들 앞에 펼쳐놓는 것과 비슷하겠죠. 그렇게 둘의 목소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결과물이었으면 했습니다.” 두 사람의 실명을 대신할 이름을 고르며 ‘두 번째 페이지’라는 의미를 떠올린 이유에 대해 안정주는 이렇게 설명을 했다.

조각 및 설치도 포함되긴 하지만 p.2의 전시 <장미로 엮은 이 왕관>이 무게를 싣고 있는 건 세 편의 비디오 작품이다. ‘카메라를 든 여자’는 프로젝트의 삽을 뜨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어준 첫 협업이다. 지난 2010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두 사람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막연한 계획을 세운 채 카메라를 들고 무턱대고 거리로 나섰다. “각자의 고집이 확고하게 서 있었던 미술보다는 오히려 다른 장르가 공동 작업을 하기에 수월할 거라고 판단한 거죠. 남들에게 보여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일단 찍기부터 했어요.”(전소정) 하지만 기대나 예상과 달리, 두서 없는 영상의 무더기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매번 벽에 부딪쳤다. 결국 둘은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p.2는 후반 작업, 즉 콘티나 편집의 방향에 대해 주고받은 대화까지도 고스란히 작품의 일부로 수용한다. 카메라로 집요한 기록을 계속하는 여자와 영상 뒤편에서 끈질기게 발언을 이어가는 작가들의 모습은 교차되고 중첩되며 예술과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완성한다.

어쩌면 두 사람의 개성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결과물을 내는 과정이 더욱 더뎠던 건지도 모르겠다. 안정주와 전소정은 일단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는 데서부터 출발했다고 말한다. ‘카메라를 든 여자’와 ‘누드 모델’ 그리고 ‘소리를 만드는 사람들’까지, 세 편의 비디오가 모두 ‘예술’을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도 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함께할 수 있는 주제를 찾다 보니 결국 작가로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즉 예술을 떠올리게 된 거죠.”(전소정) ‘누드 모델’은 고루한 미술 교육, 섹슈얼리티와 젠더, 예술가의 자아 도취 등 다양한 화제를 유쾌하게 망라하는 이야기다. 흥미로운(혹은 실망스러운) 점은 이 작품에서 실제의 벗은 몸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배우들은 인체를 본떠 만든 후줄근한 ‘누드옷’을 입은 채 벌거벗은 척 연기를 한다. 자극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소재를 취하면서 그 기대를 유머러스하게 배반한 작업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안정주가 귀띔했다. “다들 전시에 안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실망이 크다면서.”
안정주의 기존 작업은 화법이나 주제가 다소 무거운 편이었다. 그는 p.2를 통해 지금껏 시도하지 않은 가벼움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누드 모델’의 한 장면.

‘누드 모델’의 한 장면.

“진지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좀 더 유쾌한 이야기 방식을 시도한 거죠.” 전소정 역시 상호 간에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는 부담과는 별개로 희한한 해방감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제 이름으로 뭔가를 내놓을 때는 기존 작업과의 연장선상에서 꾸준히 의미를 확장시켜가야 한다는 압박을 겪곤 했어요.제 자신에게 늘 발목이 잡혔던 셈이죠. 그런데 p.2라는 낯선 이름 뒤로 물러나봤더니 작가로서 오랜만에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장미로 엮은 이 왕관> 개막을 앞두고 첫 개인전을 준비하던 때와 흡사한 설렘을 느꼈다고 했다. “그만큼 즐기면서 했다는 의미겠죠.” 현재로서는 p.2의 차기 프로젝트 계획은 없다고 둘은 입을 모았다. “적어도 당장은 힘들지 않을까요?” 안정주가 좀 더 말을 잇는다. “개인 작업으로 풀지 못한 생각을 한꺼번에 쏟아낸 게 이번 전시예요. 이제는 둘 다 각자의 이야기로 돌아가야죠. 따로 활동을 하다 보면 또 뭔가가 쌓일 거예요. 그때 다시 뭉쳐서 새로운 걸 해봐도 좋겠죠.” 8월 23일까지 아틀리에 에르메스에 들르면 별개의 인력과 중력에 의해 움직이는 두 작가의 세계가 처음으로 짧게 교차한 순간을 엿볼 수 있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포토그래퍼
조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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