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이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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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를 찾아 보면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미국에서 동성 결혼이 인정된 지금, 국어사전을 정정하는 상황이 한국에서도 과연 벌어지게 될까? ‘남녀 또는 남남, 여여’라고 결혼의 주체를 재정의하는 일 말이다.

몇 년 전 뉴욕 여행을 가서 친구 A를 만났다. 한국에서 야근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일을 그만두고 유학을 떠난 A는 새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가장 고무적인 일은 몇년 만에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 상대는 LA에 사는 남자로, 뉴욕에 출장을 왔다가 지인의 생일 파티에서 B와 만나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애인 B가 어떤 사람인지, 둘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들떠서 얘기하는 A가 참 예뻐 보였다. 다음 해에는 LA에서 A와 B를 함께 만났다. 반년 이상의 장거리 연애 끝에 같이 살기 시작한 것이다. B는 A가 얘기한 대로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며, 좋은 짝을 만난 A는 내가 알아온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두 사람은 1 년쯤 후 각자의 부모님이 계시는 보스턴과 서울을 방문해 양가에 차례로 인사를 드린 다음 결혼식을 올렸다. 평범하게 훈훈하고 지루하도록 흔한 사랑 이야기다. A와 B가 둘 다 남자라는 점만 빼면.

이제 A와 B가 사는 캘리포니아 주뿐 아니라 미국 50개 주 전역에서 동성 결혼이 가능해졌다. 지난 6월의 마지막 주말, 세계 여러 도시에서 열리는 성소수자들의 거리 축제인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여느 해보다 더 흥겨웠는데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 발표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성별과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모든 결혼은 합법적이고 평등하다는 이번 대법원 판결로, 동성 결혼을 인정하지 않고 남아 있던 14개 주에서도 게이나 레즈비언 커플이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이런 결정이 세계적으로 빠른 편은 아니다. 2000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벨기에, 스페인, 노르웨이, 프랑스 등 EU 여러 국가들과 영국, 캐나다, 남아프리카공 화국, 브라질, 우루과이, 뉴질랜드 등 많은 국가들이 이미 동성 결혼을 인정하고 있었다. 동성 결혼까지는 아니지만 절충적인 ‘시민 결합’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나라도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20여 개국이다. 결혼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의료보험, 부동산과 세금, 유산 분배 등에 있어서 사실혼 관계에 있는 동성 커플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일종의 과도기적 단계라고 볼 수 있는 이런 제도로 동성 커플을 분리하는 것에 대해서도 평등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있다.

백악관, 샌프란시스코 시청 등의 공공기관은 6월 26일 밤 건물 외벽을 무지개색으로 조명했고, 영국 정보기관인 MI6는 무지개색 깃발을 내걸어 런던 프라이드 페스티벌을 축하했다. 법원 판결뿐 아니라 여론도 이미 동성 결혼 찬성에 기울었다는 점은 SNS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페이스북은 프로필 사진에 무지개 컬러를 입혀주는 기능을, 트위터는 #lovewins의 해시태그를 달면 무지개색 하트를 생성하는 기능을 만들었으며, 유튜브, 텀블러, 우버, 아메리칸 에어라인, 에어비앤비, 갭, 스타벅스, 코카콜라, 밴 엔제리 같은 기업들도 자신의 브랜드를 영리하게 녹이는 방식으로 지지를 표명했다.

미국이나 유럽의 상황이 다이내믹한 전개를 거쳐 동성 결혼을 긍정하는 결론의 초입이라면, 한국에서는 이제 발단이다. 2013년 남성 파트너끼리 최초로 공개 결혼식을 올린 영화감독 김조광수 부부는 혼인신고서를 제출했지만 서대문구에서 수리하지 않자 법원에 불복 신청을 내, 현재 법원 심리가 진행 중이다. 이는 미국에서 45년 전에 벌어진 상황과 흡사하다. 1970년 미니애폴리스에서 법학도이 던 잭 베이커와 사서인 마이클 매코널 커플이 결혼증명서를 발급받으려다 좌절되자 주 법정에 소송을 제기한 일이 동성 결혼 이슈화의 시작이었던 것. 당시 미네소타 주 법에는 다른 성별끼리만 결혼할 수 있다는 내용이 명시되지 않았다. 동성 결혼이 불법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아예 고려 대상조차 아니어서 법률이 정하는 테두리 바깥에 있었던 것이다. 동성 결혼에 대해서는 ‘합법화’보다는 ‘법제화’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역사는 이렇게 사회의 테두리 바깥에, 없는 존재로 취급되던 이들이 스스로의 존재와 목소리를 드러내온 과정이었다.

국회의원 출신 방송인인 강용석은 시사 토론 예능 프로그램인 <썰전>에서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이유로, ‘가족의 중요한 역할은 사회 존속과 노동력의 재생산인데 동성애는 재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논리대로 라면 불임이거나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한 부부는 온전한 가족이 아니라는 얘기, 생물학적 가임기를 지난 사람의 결혼도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가족이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최소의 단위인 건 맞지만, 이런 관점은 개인을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다. 이성애자 부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양육에 적합한 환경 속에 행복하게 자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줄어드는 출산율이나 다음 세대의 교육을 걱정하고 고민한다면,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출산과 보육에 관련한 사회 시스템을 갖추는 쪽이 더 타당하고 효율적일 것이다.

결혼 3년 차에 접어든 내 친구 A와 B는 여전히 다정하게 잘 살고 있다. 열심히 일하고, 좋은 차로 바꾸고, 개를 두 마리 입양하면서. 아직 결혼에 의혹이 많은 싱글인 나에게는 주변의 어떤 이성애자 부부 못지않게 결혼에 대해 긍정적 가치를 확인시켜주는 게 이들이다. 이번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결문은 결혼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혼인만큼 뜻깊은 관계는 없다. 혼인은 사랑, 충실, 헌신, 희생과 가족이라는 최고의 이상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혼인을 통해 결합함으로써 두 사람은 이전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된다.” A와 B도 그런 이상에 도전하고 있다.

동성 결혼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이며, 우리나라 역시 외교적으로 이런 흐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동성애금지법이 생긴 러시아에 대해 많은 나라에서는 소치 올림픽 개회식 참가 거부로 응대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인 다양성과 평등을 강조하면서 동성 결혼 합헌 판결에 대해 이견을 가진 구성원들을 마지막으로 설득하는 연설을 했다. “이 판결은 모든 동성 커플에게도 결혼의 존엄성을 제공하면서, 우리 사회를 더 강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인 미국에서는 누구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어야 하며, 동성 결혼 역시 평등을 위해 사회가 함께 이루어낸 성취라는 것이다. A가 서울에 계속 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똑똑하고 성실한 A는 한국 사회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아갔겠지만, 아마 지금과 같이 자신의 꿈을 다 펼치는 행복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개인이 행복을 충분히 추구할 수 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에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이상이 ‘아메리칸 드림’으로만 그친다면 정말 씁쓸한 일 아닐까.

에디터
황선우
PHOTOS
GETTY IMAGES/MULTIB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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