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이 제작되기 전부터도 이미 2010년대는 1980년대의 메아리를 수신하고 있었다.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 이미 우리 곁에 부활해 있던 과거에 대한 단서들을 추적하고 수집했다.

짧고 강하게
세계적인 스타들도 잡지를 찢어 들고 미용실을 찾을 때가 있을까? 그렇다면 올초 시상식 시즌의 스칼렛 요한슨은 헤어 스타일리스트에게 980년대의 그레이스 존스, 혹은 브리짓 닐슨의 사진을 내민 건지도 모르겠다. 2015년 오스카 시상식 레드카펫 위에서 이 섹스 심벌은 아틀리에 베르사체의 육감적인 녹색 드레스보다 두상의 옆과 뒤를 면도하듯 바짝 깎은 늠름한 언더커트로 더 화제를 모았다. 한껏 치솟은 파워숄더의 유행이 수그러지고 나자 이번에는 30여 년 전의 헤어 커트가 재평가되는 분위기다. 요한슨 외에 이미 틸다 스윈턴과 로자리오 도슨, 마일리 사이러스 등도 이 과감한 복고풍 스타일에 합류한 상태. 내년 초의 레드카펫은 또 어느 시절로 거슬러 오를까. 어쩌면 파라 포세트나 제인 폰다의 펌이 부활할지도 모른다.

동전 강탈자들의 귀환
유물처럼 여겨지던 클래식 아케이드 게임들이 새삼스럽게 부활할 조짐이다. 동명 단편을 장편으로 각색한 크리스 콜럼버스의 <픽셀>은 1980년대의 추억을 노골적으로 공략한다. 나사(NASA)가 타임 캡슐에 담아 쏘아 올린 게임을 선전포고로 착각한 외계인들이 팩맨, 갤러그, 동키콩 등의 형태로 지구 공격에 나선다는 설정이다. 비디오 게임의 비주얼과 스토리가 영화 못지않게 정교한 수준에 오른 요즘, 조악한 8비트 그래픽과 단순하기 짝이 없는 구식 게임의 룰을 적극 활용한 블록버스터가 만들어졌다는 건 꽤 흥미롭다. 심지어 1980년대 후반 큰 인기를 끈 아케이드 게임 <램페이지> 역시 드웨인 존슨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질 계획이라고. 극장을 나설 때쯤이면 오랜만에 오락실에 들러 동전 몇 주먹쯤을 탕진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신세기 블록버스터의
구식 스펙터클 오늘날의 영화 제작 환경에서 컴퓨터 그래픽은 카메라나 배우만큼이나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하지만 무조건 의지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려는 노력이 최근의 블록버스터에서 종종 목격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언급할 사람은 물론 크리스토퍼 놀란이다. <인터스텔라>를 위해 옥수수밭을 실제로 경작했다는 그의 디지털 알러지는 이미 유명하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에서 컴퓨터 그래픽의 비중은 고작 20% 수준이다. <태양의 서커스> 단원 출신 배우들이 달리는 차 위에서 직접 장대 액션을 소화하는 메이킹 영상을 보면, 영화의 박진감이 남달랐던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된다. J.J. 에이브럼스 역시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를 제작하며 실사 배경을 촬영해 미니어처와 합성하는 구식 방식을 택했다. CG가 아무리 뛰어나도 실제의 질감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자에게 현 기술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결국
그들은 문제의 해답을 수십 년 전의 현장에서 찾은 듯하다.

좋아서 다시 한번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와 리부트는 어느덧 당연한 습관이 됐다. 검증된 아이디어를 재활용해 기성 세대의 향수와 젊은 관객의 호기심을 동시에 공략하려 드는 알뜰한 전략은 블록버스터 전쟁에서 안정적인 승률을 기록 중이다. 요즘 스튜디오들이 열심히 먼지를 털고 있는 건 바로 1980년대의 히트작들이다.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과 <스파이>를 성공시킨 폴 페이그는 <고스트 버스터즈>의 성 전환 리부트에 돌입한 상태다. 유령 사냥꾼들을 전부 여자 배우로 교체한 발상도 흥미롭지만 내근 직원 자리에 건장한 크리스 헴스워스를 앉힌 캐스팅 센스야말로 발군이다. <인디아나 존스> 역시 리부트 계획이 조만간 공식적으로 발표될 눈치인데, 해리슨 포드를 대신할 타이틀롤로는 크리스 프랫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들린다. 이 외에도 존 카펜터의 컬트 액션인 <뉴욕 탈출>과 조 단테의 호러 코미디 <그렘린> 또한 시대에 맞게 업데이트될 예정. 2010년대의 관객들은 한창 1980년대의 데자뷔를 경험하고 있다.

디스코 포에버
는 올해로 일흔다섯이 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조르지오 모로더가 30여 년 만에 발표한 새 정규 앨범이다. 디스코 제왕의 귀환을 환영하며 시아, 카일리 미노그, 브리트니 스피어스, 켈리스 등이 기꺼이 피처링으로 힘을 보탰다. 신시사이저와 보코더가 수시로 출몰하는, 말 그대로 데자뷔 같은 복고풍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듣고 있노라면 몇십 년 묵은 롤러스케이트라도 다시 꺼내 신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한편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는 당대의 아이콘이자 댄스 디바인 셰어를 2015년 가을/겨울 캠페인의 모델로 등장시켰다. 발행을 앞둔 <러브> 매거진의 커버에서도 방부 처리한 듯 매끈한 60대의 뮤지션 겸 배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이쯤 되면 지금이 2015년인지 1985년인지 달력을 들춰봐야 할 지경이다.

전사의 화장법
지난 4월 영국에서는 리들리 스콧의 1982년 작인 <블레이드 러너>가 재개봉됐다. 현재 속편 제작이 진행 중이기도 한 이 걸작 SF는,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전혀 낡게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극 중 캐릭터들의 스타일마저 꾸준히 모방, 혹은 응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대릴 한나가 연기한 리플리컨트 프리스다. 눈 주위에 검정 페인트를 뿌리며 전투를
준비하던 모습은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와 겹쳐진다. 프라발 구룽부터 메종 마르지엘라까지, 유사한 메이크업을 시도한 쇼도 적지 않다. 10분 간격으로 파코라반의 의상을 갈아입던 <바바렐라>의 제인 폰다, 장 폴 고티에의 붕대를 휘감고 달리던 <제5원소>의 밀라 요보비치와 함께 SF 전사의 스타일 만신전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