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누군가의 여자로 더 많이 불려왔던 오노 요코, 그녀는 사실 빼어난 아티스트였다.

1971년, 오노 요코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1인 퍼포먼스를 벌였다.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이하 MoMA)의 간판 앞에서 오노 요코는 알파벳 ‘F’가 쓰여진 커다란 사인을 들어올려 마치 ‘현대 방귀관’ (Museum of Modern Fart)처럼 보이도록 했다. 이후 그 사진을 담은 전시 카탈로그를 제작했고, 심지어 <뉴욕 타임스>와 <빌리지 보이스>에는 광고도 게재했다. 그녀는 카메라맨이 MoMA를 나서는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전시를 보았는지 물어보는 영화도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 관람객들은 전시를 보았다 혹은 보려고 했지만 결국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 누구도 요코의 전시를 관람할 수 없었다. 매표소 창구에는 ‘여기 아님(This Is Not Here)’이라고 쓰인 요코의 광고만 붙어 있을 뿐이었다.

‘현대방귀관’은 개념미술 선구자인 요코의 여러 대표작 중 하나에 불과하다. 1960년에 요코는 당시 뉴욕의 허름한 동네였던 트라이베카의 온수도 나오지 않는 좁은 방에서 뉴욕 아방가르드 모임을 개최했고, 본격적으로 개념미술 활동을 전개했다. 존 케이지와 라 몬테 영이 이 모임의 대표 멤버였으며, 마르셀 뒤샹, 요셉 보이스, 막스 에른스트, 페기 구겐하임도 모임에 참여했다. 1971년 MoMA에서 게릴라 해프닝을 펼친 오노 요코는 44년이 흐른 뒤 MoMA로부터 정식으로 전시 요청을 받았다. 5월 17일에 열린 <오노 요코: 원 우먼쇼, 1960-1971>에서는 오노 요코가 미술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내고 자신만의 개성을 찾던 1960년에서 1971년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이번 전시에는 그녀가 개념 미술에 영향을 미쳤음을 잘 보여주는 각종 텍스트 작업, 사물, 퍼포먼스, 녹음, 실험영화 등이 소개됐다.

 

1. <자르기>를 재현 중인 오노 요코.

1. <자르기>를 재현 중인 오노 요코. 

 

 

도쿄에서 태어난 오노 요코는 1950년대 중반 뉴욕으로 이주해 세라 로런스 대학에 입학했지만 실험 예술에 빠져들었다. 당시 요코는 초기 플럭서스 화가, 시인, 음악가 중 보기 드문 여성 예술가였다. 조지 머추너스는 플럭서스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인 1961년에 요코의 첫 단독 전시회를 열어주었다. 오노 요코는 관람객들이 일본식으로 염색한 천에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그림 위를 걷도록 유도했다. 이는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림을 밟고 지나가도록 강요받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처형되었던 17세기 역사를 빗댄 것이었다. “가톨릭 신자들의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요코는 최근 인터뷰에서 말했다. “중학생 때 그 이야기를 처음 듣고 나도 언젠가는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요코의 초기 작품은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개념을 전달한다는 면에서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1964년에 발간된 저서 <그레이프 프루트>에서 요코는 자신의 미술과 음악 작품을 따라 하는 방법을 공개했다. 책 속에는 ‘당신의 사진과 그림을 누구나 따라할 수 있게 내버려두세요. 원작이 파괴되는 힘을 느껴보세요’라는 문구가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그녀는 예술가로서 작품에 미치는 통제력을 오히려 내려놓을 수 있었다. 완성된 작품을 관객 앞에 내어놓는 대신, 관객의 참여를 통해 작품을 완성시키고자 한 것이다. 요코의 <자르기> 퍼포먼스는 1964년 일본 교토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이듬해 뉴욕 카네기홀에서 다시 한번 무대에 올랐다. 이 퍼포먼스에서 그녀는 무대 한가운데에서 관객들이 가위로 자신의 옷을 잘라내도록 유도했다. 페미니즘이 본격적인 논의 주제로 떠오른 당시, 요코는 이미 여성의 신체를 예술과 시위의 수단으로 활용한 셈이다.

 

2. 1967년 <반의 반> 작품과 함께 포즈를 취한 오노 요코.

2. 1967년 <반의 반> 작품과 함께 포즈를 취한 오노 요코. 

 

 

2월의 어느 쌀쌀한 날 오후에 만난 요코는 ‘모든 예술가들처럼, 저 역시 제멋대로일 때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 바로 전날은 요코의 82번째 생일이었는데, 70세가 되던 해부터 그랬듯이 이번에도 요코는 생일을 맞아 자신의 친구들 그리고 아들 션 레넌과 함께 도심의 녹음실에서 잼 세션을 가졌다. 그녀는 꽃 장식으로 뒤덮인 뉴욕 센트럴 파크 웨스트에 위치한 다코타 맨션의 넓은 주방에서 흰색 의자에 앉아 인터뷰에 응했다. 몸에 달라붙는 블랙 스웨터, 블랙 팬츠에 하늘색 양말을 매치한 요코는 작지만 당당한 모습이었다.

1966년, 존 레넌은 요코의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런던의 인디카 갤러리를 방문했다. 천장에 걸린 요코의 작품을 보기 위해 사다리에 오른 존 레넌은 천장의 확대경을 통해 ‘Yes’라고 쓰인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그 후, 요코는 존 레넌과 가까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코는 존 레넌이 묘사했듯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명 작가’가 되었다. “모두가 요코의 이름을 알지만 요코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어요” 라고 존 레넌은 설명한 바 있다.

 

3.1964년 작품인 <자르기>.

3.1964년 작품인 <자르기>.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이 같은 의문은 이번 MoMA에서의 전시회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1966년부터 1967년 사이 행인들의 발가벗은 엉덩이로 스크린을 채워 화제가 된 <엉덩이>와 1967년 당시 남편이었던 영화 감독 토니 콕스가 외박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오노가 느낀 공허함을 표현하기 위해 집 안의 모든 물건을 반으로 잘라 전시한 ‘반의 방’ 등의 작품이 이번 전시에 포함된다. 물론 존 레넌과 함께한 작품도 전시된다. 그녀는 레넌과의 첫 만남에서 마그리트와 칸딘스키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회상했다. “존은 이미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었고 나 또한 이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아주 강렬한 두 영혼이 만난 셈이라고 할 수 있죠.”

오노 요코와 존 레넌은 취재진을 자신들의 숙소로 초대해 세계 평화 를 논하는 침대 시위를 펼친 이후에도 다양한 반전·평화 운동을 벌였다. 1969년 암스테르담의 힐튼 호텔에서 첫 번째 침대 시위를 선보인 뒤에는 몬트리올에서 플라스틱 오노 밴드의 첫 싱글 ‘Give Peace a Chance’를 녹음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어요”라며 오노가 침대 시위를 회상하며 말했다.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아마도 저를 시기했기 때문이겠죠. 제가 존과 함께라는 데에 대한 시기 말이에요. 하지만 저에게는 예술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어요. 제가 사람들의 말에 신경 썼다면 그런 퍼포먼스를 하지 않았겠죠.”

 

4. 1961년에 열린 첫 번째 개인 작품전에 들른 오노 요코.

4. 1961년에 열린 첫 번째 개인 작품전에 들른 오노 요코.

 

 

오노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독립적이었다. 은행원 아버지와 저명한 화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3살 때 음악 영재 학교에 입학하여 피아노와 작곡, 오페라를 공부했다. 이후 그녀는 도쿄의 명문 대학인 가쿠슈인 대학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철학을 전공했다. 아버지의 직업 탓에 그녀의 가족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했고 1950년대 초 세라 로런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

 

겁 없는 성격도 그녀의 커리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71년, 뉴욕 시라쿠스에 위치한 에버슨 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을 한 달 앞두고 오노와 레넌은 딕 카벳 쇼에 출연했다. 당시 카벳은 저명한 교양 프로그램 진행자였지만 오노를 ‘영국의 윈저공이 왕이 되지 못하게 한 월리 심슨 부인만큼 논란이 되고 있는 여성’이라 소개하고 시종일관 삐딱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그 방송으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전시회를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다. 또 전시회 오프닝 행사에서 비틀스가 재결합 공연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도 했다. 이번 MoMA 전시에도 그때의 작품 여러 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5. 조지 머추너스가 찍은 ‘오노 요코의 작품’과 오노 요코.

5. 조지 머추너스가 찍은 ‘오노 요코의 작품’과 오노 요코.

 

 

MoMA 전시회를 앞두고 더블유는 오노에게 작품 두 가지만 골라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녀는 1961년 카네기홀 공연을 위해 직접 그린 포스터를 찍은 머추너스의 사진을 골랐다. 이 포스터에서 그녀는 캔버스에 구멍을 내 쳐다보고 있다. 이 글과 함께 실릴 사진으로는 2003년 마지막으로 선보인, 그녀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작품인 ‘자르기’를 택했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여성이 겪는 고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옷을 가위로 자르는 행위를 통해 자연적으로 굴곡이 있는 여자의 몸에 각진 선을 남기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죠.”

 

오노 요코는 대담하고도 신중한 태도로 촬영을 지휘했다. 목과 무릎 주변 등 연약한 부위들을 골라 가위질을 했고 바닥에 잘린 옷가지를 쌓아두었다. 반짝이는 가위질은 위협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위험한 작품인 줄 몰랐어요. 가위가 날카로워서 누군가를 자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녀는 촬영 후 이렇게 말했다. 이번엔 약자가 아닌 강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는지 물었다. 그러자 요코는 나지막이 “아니요”라고 답했다. “강자가 되었다기보다 제가 마치 엄청난 계략에 휘
말린 듯한 기분이었어요.” 앞으로도 우리는 공공 예술프로젝트, 음반,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노 요쿄에게 요즘 시위 문화에 비추어 볼 때 그녀의 작품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물었다. “흥미로운 점은 존과 제가 그런 평화 활동을 하기 위해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 저희와 동참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거예요.” 당시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조롱이 생각난 듯 대답했다. “이제는 모두가 사회 운동가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