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빨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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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고 자발적인 극기 훈련에 다녀왔다. 러닝 속도를 향상시키기 위한 나이키 줌 캠프는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몰아붙이는 조교도 없이 열렸지만 반드시 이기고 싶은 상대가 나 자신이라는 점에서 ‘극기’ 훈련이었다. 거기서 진짜 러너들을 만났다.

포틀랜드에 간다고 했을 때 열 사람 중 다섯은 ‘킨포크’ 라이프스타일 얘길 꺼냈고, 한둘은 미국 드라마 <포틀랜디아>를 영업하기 시작했다. 나를 아는 진짜 친구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거기 나이키 본사 있잖아! 정말 좋겠다!” 그들의 흥분대로 나이키에서 초청한 출장이긴 하지만 한정판 운동화나 구경하고 하루키가 뛰었다는 나이키 캠퍼스의 러닝 트랙을 조깅해보는 여유로운 유람은 아니었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전세계 미디어들이 모여서 훈련하는, 강도 높은 캠프였기 때문이다. 그 목표란 바로 더 빠르게 달리는 것. 그전에 나이키의 트레이닝 앱인 ‘N+TC’로 운동을 해온 입장에서 ‘고될 텐데 괜찮으시겠냐’는 나이키 코리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스타일로 숭배받고 패션으로 소비되곤 하는 이 브랜드가, 실은 자신의 본령인 스포츠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고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궁금한 사람은 N+TC 앱을 다운받아 실행해보기 바란다. 마리아 샤라포바 같은 여성 스포츠 선수들, 리한나의 개인 트레이너 같은 운동 전문가들이 동작을 시연하면서 따라 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인데 절대 봐주는 법이 없이 빡빡하다).
달리기를 즐기지만 그건 한강이 좋아 바람 쐬러 나가다 보니 얻어진 취미다. ‘위 런 서울’에서는 하프 마라톤을, 캠프 직전의 ‘나이키 우먼스 10 K &15 K 서울’에서는 15km 레이스를 뛰긴 했지만 누구에게 자랑할 기록은 아니었다. 한편 캠프에 모인 스물몇 명의 미디어 관계자 면면은 굉장했다. 나를 제외하면 모두 북미와 남미, 호주에서 모인 이들은 피트니스 매거진의 시니어 에디터, 뷰티와 헬스를 다루는 잡지의 운동 담당 기자, 러닝 전문 웹진의 기자… 소개를 마치자 참가와 완주에 만족하던 나의 평화로운 올림픽 정신이 위협받는 걸 느꼈다. 잠시 지진이 지나간 내 동공은 ‘너의 빠름을 찾아라(Find Your Fast)’라는 이 캠프의 모토에 머물렀다. 가장 빠름이나 누구 보다 더 빠름이 아니라 나 자신의 빠름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문자 그대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깨는’ 경험은 상쾌했지만, 전날 비행기와 버스를 섞은 열몇 시간의 이동에 더해 열몇 시간의 시차에 취한 몸은 더 거대한 상쾌함을 필요로 했다. 5시 반 부터 시작된 모닝 요가 클래스가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기대하며 텐트 밖 오리건의 맑은 공기 속으로 나섰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 러닝의 시작도 스트레칭이다. 여기저기의 근육을 꼼꼼하게 늘리고 풀어주는 일은 몸에 부드럽게 시동을 걸어 더 좋은 퍼포먼스를 내게 하고, 다치지 않도록 도와준다. 호수를 바라보며 잔디밭에 매트를 깔고 트레이너 케이티의 동작을 따라 하는 일은, 뜨는 해를 바라보며 마음을 비우는 동남아 리조트의 요가 클래스와 비슷해 보이지만 맨손 웨이트 트레이닝에 가깝게 운동량이 많았다. 힘든 세션 뒤에 양질의 식사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은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이 부트 캠프에서 가장 위안이 되는 점이었다. 땀 흘리고 났을 때 신선한 샐러드와 과일, 연어나 닭고기 같은 단백질 음식, 바나나와 에너지 바, 견과류가 차려진 식탁은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꿔본 그림일 것이다. 건강식의 응원을 받으며 본격적인 연습 장소인 육상 경기장 헤이워드 필드로 향했다. 여기서 몇 가지 훈련을 받은 다음, 캠프가 끝나기전 마지막으로 1마일(약 1.6km)을 뛰어보게 된다. 우리를 기다리는 인물은 나이키가 공식 후원하는 러닝 클럽의 하나인 오리건 트랙 클럽 소속으로 지난해 뉴욕의 1마일 달리기 대회인 NYRR에서 1위를 차지한 조던 맥나마라였다. 그의 기록은 3분 51초. 대충 계산해봐도 나보다 2 배쯤 빠른이 러너에게 빨리 달리기 위한 몇 가지 핵심에 대한 수업을 받았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다리로 땅을 튕겨내듯이 무릎을 높이 차 올리라는 것, 팔을 피스톤처럼 활용해서 뒤로 뻗으며 힘을 끌어 올리라는 것. 그의 얘기대로 포즈에 신경 쓰면서 약간 과장되게 팔다리를 움직이며 짧은 직선 코스를 몇 번 뛰었다. 다음으로는 전력 질주해서 내달렸다가 부드럽게 조깅하는 인터벌 운동을 몇차례 반복했는데, 주로 단거리 선수나 장애물 달리기 선수가 속도를 높이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훈련한다고 했다. 호흡이 가빠지면 몸이 금방 지쳤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코로 숨을 천천히 들이 쉬고 입으로는 내쉬면서 최대한 안정적으로 가져가라는 것 또한 중요한 팁이었다. 그걸 안다고 해서 내가 두 배 빠른 사람처럼 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맥나마라의 중요한 충고가 하나 더 있었다. “달리러 나갈 때는 가장 좋아하는 옷과 러닝화를 갖추세요. 자신을 기분 좋게 북돋우기 위한 건 뭐든 좋아요.” 이부분이라면 나도 자신 있다.

“운동을 하려면 뭐든 기술이 느는 걸 하는 게 좋아.” 골프를 치는 편집장님은 나의 러닝 취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발레나 수영 같은 걸 배워 실력이 느는 친구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왜 달리기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유진의 아름다운 숲 속을 3마일 달리는 코스 같은 경험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뛰면서 만나는 거리의 풍경, 강가의 냄새, 그 날의 날씨가 내 몸에 가져다주는 다채로운 감각은 가만히 서 있을 때보다 훨씬 강렬하다. 기술이 느는 스포츠들과 비교하자면 달리기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운동이다. 하지만 그 점이 달리기의 매력이다. 뛰고 있는 동안 삶은 좀 더 단순해지고, 살아 있다는 감각은 생생해진다. 그리고 이런 캠프를 통해 어쩌면 ‘기술이 느는’ 경험도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유진의 자연 속을 달려가 도착한 목적지는 미식축구팀 오리건 덕스의 홈 경기장인 오트젠 스타디움이었다. 거대한 경기장을 독차지한 듯 사방을 둘러보던 뿌듯함은 그러나, 5만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텅 빈 관중석이 오늘 우리가 뛰어 올라야 하는 계단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공포로 바뀌었다. 오전의 단거리 훈련과 오후의 숲 속 러닝으로 끝이 아니었던 것. LA와 뉴욕에서 온 세 명의 코치는 경기장의 다른 영역을 나눠 맡고 각기 강도(Strength), 민첩성(Agility), 지구력(Endurance)을 키우는 동작을 수행하게 했다. 양발 점프, 한 발씩 점프, 두 칸을 한꺼번에 점프하는 스텝을 섞어 계단을 쭉 올랐다가 다시 내려가는 ‘강도’ 코스를 마쳤을 때 후들대는 내 두 정강이에는 더 이상의 민첩함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어 엎드려뻗기 자세를 취한 채 옆으로 게걸음을 하고, 다시 사이드 런지 자세로 옆걸음 진행을 반복하는 ‘민첩성’ 코스에서 뜨거운 햇볕에 달궈진 인조잔디에 손바닥을 데는 경험을 거치고 나니 이미 ‘지구력’도 증명한 느낌이었다. ‘강도’와 동일하게 관중석 계단을 쭉 올랐다 다시 내려오는데 이번에는 점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차이점인 ‘지구력’ 코스까지 마치자 캠프원 모두의 얼굴은 웃음기 대신 땀으로 찼다. 이 몸으로 과연 내일 1마일을 전력질주 할 수 있을까? 내 허벅지와 엉덩이가 단호하게 아니라고 외쳤다.

마침내 레이스가 열리는 아침, 캠프에는 묘한 긴장이 흘렀다. 경기나 대회라기에는 딱히 목적을 띠지 않고 다만 자신의 기록을 측정하며 캠프의 성과를 가늠해보는 경주였지만 어쨌거나 3개 조로 나누어 승부는 가리게 된다. 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팀의 코치 조가 지난 이틀은 속사포 랩을 하듯 활기차더니 레이스를 앞둔 아침에 가장 초조해 보이는 걸 보니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제 격렬한 훈련을 거친 조원들은 누구도 최고의 몸 상태라고 하기 어려웠다. 하체 근육을 풀어주는 다양한 동작의 스트레칭을 함께 따라 하는 걸로 모자라 마사지 스틱,폼 롤러까지 동원되었다. 오늘 아침에도 특별한 게스트가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건 웜업 조깅을 마칠 즈음이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1만 미터 은메달리스트이자 어제 바로 이곳 헤이워드 필드에서 열린 프리폰테인 클래식에서 5천 미터 3위를 기록한 중거리 선수 갤런 럽(Galen Rupp)이었다. 오늘은 짧은 운동복에 가벼운 러닝화가 아니라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에어조던을 신은 모습이었지만. 그에게, 러닝의 페이스에서 마지막 속도를 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마지막에 박차를 가하고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레이스를 뒤집고 싶다는 건 누구나 하는 생각이죠. 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비결 같은 건 따로 없어요. 달리는 내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죠.” 드라마틱한 역전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거였다. 갤런은 트랙에 서기 직전인 캠프원들을 향해 마지막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용기를 갖고 뛰어요!”

1마일의 러닝은 헤이워드 필드의 트랙을 4바퀴 도는 코스다. 코치 조와 나는 목표를 정했다. “우, 평소에 1마일을 몇 분에 뛰어? (코치 조는 내 이름의 ‘선’이 미들 네임이라고 생각했는지 계속 나를 ‘우’라고 불렀다)” “마일 단위에는 익숙지 않아서…” “좋아, 그럼 5km는?” “글쎄, 30분… 35분?” “잠깐만, 30분과 35분은 엄청난 차이라구!” ”아마 30분에 좀 더 가까울 거야(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사실 자신이 없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5km를 30분에 뛴다 치면 1마일을 9분 30초에는 들어와야 해. 목표를 9분 20초로 하자구. 오케이?” 대충 그러자고 했다. 시차 핑계는 그만 대더라도 어제 오늘 하드코어 트레이닝에다 준비 러닝으로 이미 지쳐버렸고 실제 육상 트랙에서 뛰어야 한다는 압박감, 경기가 시작되기 전의 긴장까지 더해져서 울렁증이 날 지경이었다. 경주가 시작되었다. 맨 마지막 순서로 뛰기로 한 나는 조원들이 먼저 달려 나가는 걸 보고 있었다. 한 바퀴가 다 돌아 오기 전에 이미 한참 앞서가는 빠른 사람도, 뒤처지기 시작하는 느린 사람도 눈에 들어왔다. 경기 시간이 흐르자 누군가보다 한 바퀴를 더 돌고 다시 앞질러 나가는 사람도 생겼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모두가 자신의 레이스에만 몰입해 있었다. 다른 누군가보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빠름을 찾는 게 목표였으니까. 레이스를 끝내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며 서 있던 나도 마지막으로 나의 레이스를 시작했다.

힘차게 출발했지만 첫 바퀴를 마치기 전에 이미 기운이 급속도로 소진되는게 느껴졌다. 익숙하다. 달리기를 할 때면 종종 머릿속으로 배추를 세는 단위가 스쳐 지나간다. 그럴 땐 별수 없다. 갤런 럽의 말대로 러닝은 한 걸음 한 걸음 매 순간 매 지점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평소에꾸준히 훈련을 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믿을 수 있는 게 오직 몸의 기억, 경험뿐이기 때문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자신감이 움츠러들 때, 결승점이 멀게만 느껴질 때 기댈 수 있는 건 지난 시간이다. 이 정도는 늘 뛰었으니까, 전에 이보다 멀리 달려봤으니까, 그리고 오늘 조금 더 빨리 뛰고 싶으니까 할 수 있다는 아주 작은 믿음. 호흡과 팔 움직임만 반복하며 백지처럼 하얀 머리에 박수와 환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트랙이 끝나는 곳에 늘어선 사람들이 코치 조를 따라 ‘우! 우!’ 하고 내 이름을 외치고 있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까지 모두가 축하해주는 바람에 더 부끄러워진 나의 느린 레이스가 마침내 끝났다. 코치 조가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우, 너의 목표 기록을 세웠어! 9분 10초에 들어왔다구!” 그리고 누군가가 덧붙였다. “트레이닝에서 배운 점들을 기억하면서 달렸니? 어제보다 어깨와 팔을 훨씬 편하게 흔들더라!” 나의 보잘것없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우리 팀은 1 등을 차지해서 코치 조는 다시 래퍼의 수다와 웃음을 되찾았다.

줌 캠프에서 받은 훈련이 마지막 1마일 기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신이 없다. 오히려 피곤하고 지쳐서 이번 레이스는 망한 편에 속한 것 같다. 840km 쯤 데이터가 쌓여 있는 내 나이키 러닝 앱의 기록을 보면 1마일 최고 기록은 6분 29초로 되어 있는데, 분명 충분히 휴식하며 좋은 컨디션으로 세운 기록일 것이다. 언젠가 다시 6분 29초를 깰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러고 싶은 동기는 강하게 얻었으니 앞으로 중요한 건 이번 캠프에서 배운 지식과 노하우들을 꾸준히 내 몸의 기억으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이 기억들이 다 희미해진 뒤에도 한 가지는 잊지 못할 것 같다. 저마다 다른 생김새를 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속도로 트랙 위에서 묵묵히 달리던 모습. 향상을 위한 마음, 더 강해지고자 하는 순수한 갈망을 가지고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들 속에서 보낸 며칠은 아주 단순하고 약간은 숭고한 시간이었다. 기록이 얼마건 간에 그들은 모두 진짜 러너,다시 말해 나이키가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에디터
황선우
PHOTOS
COURTESY OF N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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