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는 무언가를 사고파는 곳이다. 패션 브랜드의 스토어라면 당연히 패션을 파는 곳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패션 여제, 미우치아 프라다는 그 대상을 유형의 재화만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환상과 꿈과 아이디어를 살 수 있는 곳,프라다 스토어로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밀레나 카노네로 Milena Canonero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마리 앙투와네트> 등 패션계에서도 많은 팬을 거느린 영화를 맡아온 밀레나 카노네로는 영화의 스틸 컷을 보는 듯한 정교한 세팅으로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밀레나 카노네로 Milena Canonero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마리 앙투와네트> 등 패션계에서도 많은 팬을 거느린 영화를 맡아온 밀레나 카노네로는 영화의 스틸 컷을 보는 듯한 정교한 세팅으로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상을 해본다. 만약 순식간에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가정하에, 서울의 A브랜드 스토어에서 다시 같은 브랜드의 뉴욕 스토어로, 그리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토어(역시, 같은 브랜드)로 빠르게 이동한다면, 우리는 과연 대륙 간의 지리적 차이를 인지할 수 있을까? 아마, 100%에 가까운 확률로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나라마다 지역적 특성과 고객 취향을 고려해 제품을 입고시키기에 진열된 물건의 종류가 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매장의 생김새를 뒤흔들 정도의 요소는 될 수 없다. 패션 브랜드의 ‘브랜딩’ 전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치밀한데, 크게는 매장의 넓이와 천장 높이, 섹션과 섹션 사이의 구성, 조명의 위치와 조도에서부터 진열할 물건을 놓는 방법, 그 간격, 심지어 매장에 놓을 꽃의 종류와 꽃송이의 굵기까지 가이드라인이 있을 정도다. 지역색을 충분히 음미하기 위해 해외여행을 갔을 경우, 가장 무의미한 순간 중 하나가 아마 이런 글로벌 브랜드의 스토어에 들어간 순간일 것이다.

 

앞서 설명한 상황으로 인해, 패션 브랜드의 경우 특정 매장에 남다른 조각품 하나만 놓았다고해도 ‘뉴스’거리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라다의 ‘이코노클라스트(Iconoclast)’ 프로젝트는 발표될 때마다 패션계가 모두 주목하는 획기적인 기획으로 자리를 잡았다. 대표적인 대도시의 프라다 스토어를 패션계의 크리에이터들에게 맡겨 각자가 원하는 독특한 콘셉트로 새롭게 꾸미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데, 지난 2009년과 2014년에 열린 두 번의 프로젝트에는 미국 의 알렉스 화이트와 에드워드 에닌풀을 비롯해 올리비에 리초, 케이티 그랜드, 카린 로이펠드 등 저명한 스타일리스트, 에디터들이 밀라노, 뉴욕, 파리, 런던 등의 스토어를 맡아 각자의 비전을 담은 작업을 보여준 바 있다. 그리고 지난2 월에서 3월에 걸친 F/W 패션위크 기간 중 세 번째 이코노클라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요 스토어를 크리에이터에게 온전히 맡겨 변신시킨다는 골자는 그대로지만 참여하는 사람들의 면면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아리안느 필립스, 밀레나 카노네로, 마이클 윌킨슨&팀 마틴 듀오. 이들은 모두 영화계에서는 레전드급으로 불리는 코스튬 디자이너들로, 이들이 참여한 작품을 읊으면 지난 몇 년간의 박스오피스 상위권의 블록버스터 흥행작을 다 언급하는 셈이 될 정도다. 먼저 런던의 올드 본드 스트리트 매장을 맡은 아리안느 필립스는 17년간 마돈나와 작업하면서 5장의 앨범 커버와 20개가 넘는 뮤직비디오의 비주얼 디렉팅을 맡았으며, 한국에서도 크게 흥행한 영화 <킹스맨>을 비롯해 톰 포드가 감독을 맡은 <싱글맨>, 그리고 <헤드윅>, <처음 만나는 자유>, <나이트 앤 데이> 등의 코스튬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파리 포부르 생토노레 매장을 맡은 코스튬 디자이너 밀레나 카노네로는 최근 프라다의 비전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인물이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3>, 소피아 코폴라의 <마리 앙투와네트>를 비롯해 최근 프라다와 몇 개의 프로젝트 영상 작업을 함께한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뉴욕 브로드웨이 매장을 맡은 마이클 윌킨슨과 팀 마틴 듀오는 미국인 팀답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이미지를 폭발시키는 작품을 주로 해왔다. <300> <아메리칸 허슬> <맨 오브 스틸>, 곧 개봉 예정인 화제작 <배트맨VS슈퍼맨>도 이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아리안느 필립스 Arianne Phillips마돈나와 음반 커버, 뮤직비디오 작업을 오래 해왔으며, 영화 <싱글맨>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 등의 히트작을 남긴아리안느 필립스는 이코노클라스트 작업에 착수하면서 먼저 패션필름을 만들고, 여기에 기반한 아이디어들을 매장으로옮겨오는 방법을 택했다.

아리안느 필립스 Arianne Phillips
마돈나와 음반 커버, 뮤직비디오 작업을 오래 해왔으며, 영화 <싱글맨>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 등의 히트작을 남긴
아리안느 필립스는 이코노클라스트 작업에 착수하면서 먼저 패션필름을 만들고, 여기에 기반한 아이디어들을 매장으로
옮겨오는 방법을 택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영화계의 저명한 코스튬 디자이너들을 초대하면서 ‘우리 매장을 기한 한정으로 맡아서 꾸며볼 생각이 있느냐’는 간단한 메일만 보냈다고 한다. 여기에 붙은 조건은 단 하나였다.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대로 할 것. 이 환상적인 제안에세 팀의 코스튬 디자이너들은 세계 각지로 날아가 각자의 감각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영화적이고 드라마틱한 스타일을 매장 구석구석에 부려놓았다. 이 비상한 결과물을 패션위크 기간, 밀라노와 런던, 파리라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만 볼 수 있는 점이 안타까웠는데, 이 작업이 그대로 중국 베이징에 위치한 3개의 스토어에 다시 설치되면서 그 면모를 한 자리에서 지켜볼 기회가 생겼다. 밀레나 카노네로의 작업이 설치된 IN88 매장은 들어서는 순간 마치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듯하다. 물속에 잠겨 있는 바다 속 인어 같은 여인, 짧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스니커를 신은 신랑, 베레모를 쓰고 거수 경례를 하고 있는 비밀 요원 같은 트렌치코트의 여인들, 서커스 단원처럼 애크러배틱한 포즈를 보여주는 광대 여자 등 영화 속의 인상적인 장면들이 스틸 사진으로 뽑아낸 듯 그대로 섬세한 포즈와 표정을 한 마네킹에 적용되어 매장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었다. 카노네로는 물, 불, 공기, 지구, 여기에 인간적인 사랑이라는 5개 요소를 넣어 영화 같은 상황으로 프라다 컬렉션을 재해석하는 콘셉트로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영화 속 인물의 연기보다 더 실감나는 포즈와 표정 표현을 위해 전 세계 프라다 소속 베테랑 디스플레이어들이 며칠을 달라붙어 마네킹을 새로 제작했음은 물론이고 헤어와 메이크업까지 공들여 그려냈음은 물론이다.

차이나 월드 몰을 맡은 마이클 윌킨슨과 팀 마틴은 현대미술에 가까운 영역에서 일해온 팀답게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비전을 구현했다. 즉, 아카이브를 가져다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고, 이들이 입을 의상과 액세서리까지 아예 새롭게 디자인한 것. 프라다 여사가 이들의 작품 <아메리칸 허슬>의 팬이라는 점에 착안해 모든 인간 군상을 아우를 수 있는 1970년대 스타일에 기반해 작업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밑단이 풀려 있는 거친 듯한 소재, 파티 다음 날이면 볼 수 있는 깨진 거울과 타일, 반짝이는 시퀸과 엠브로이더리, 펑키한 가발 등이 주요 모티프로 등장했다. 마네킹들이 입고 있는 익숙한 디자인의 옷들은 지난 컬렉션에서 등장한 것 중 28개를 재해석한 아트피스인데, 밀라노의 프라다 여성복 디자인 팀이 직접 제작한 것이다. 프라다 여사는 여성스러운 브로케이드 소재의 옷을 매니시하게 바꾼 아이디어를 특히 좋아했다고. 과장된 펑키한 가발과 반짝이는 시퀸 메이크업이 인상적인 마네킹은 총 72개가 사용되었고, 뉴욕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의 윈도 디스플레이 스태프들이 셋업에 투입된 대규모 작업이었다.

 

마이클 윌킨슨 + 팀 마틴 Michael Wilkinson +Tim Martin<아메리칸 허슬> <300>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주로 맡아온 코스튬 디자이너 듀오는 70년대를 주제로 잡고 아카이브 의상 중 인상적이었던 피스들을 직접 다시 디자인하여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화려한 시퀸으로 이루어진 메이크업과 펑키한 가발이 시선을 사로잡는 가운데 실제 파티를 즐기는 듯한 마네킹 세팅이 인상적이다.

마이클 윌킨슨 + 팀 마틴 Michael Wilkinson +Tim Martin
<아메리칸 허슬> <300>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주로 맡아온 코스튬 디자이너 듀오는 70년대를 주제로 잡고 아카이브 의상 중 인상적이었던 피스들을 직접 다시 디자인하여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화려한 시퀸으로 이루어진 메이크업과 펑키한 가발이 시선을 사로잡는 가운데 실제 파티를 즐기는 듯한 마네킹 세팅이 인상적이다.

 

 

SKP 매장을 담당한 아리안느 필립스는 앞의 두 코스튬 디자이너와는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 코스튬 디자이너의 역할은 ‘스토리를 전달하고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기에 그는 먼저 프라다의 2015 S/S 컬렉션에서 영감을 받은 짧은 패션 필름을 제작하고, 이 영화속의 모티프를 가져와 매장 곳곳에 설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라는 제목의 이 필름은 철학적이고 콘셉추얼하지만 규정되지 않은 날것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먼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없는 사막을 배경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소녀(외계인일지도 모른다)가 등장한다. 공허하지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두 소녀는 유리 진열장 앞에 서는데 이 안에는 사막의 배경과 상반되는 환상적인 생명체가 등장한다. 런웨이 쇼가 보라색 모래로 꾸며진 것에서 영감을 받아 영상 속에서도 라벤더빛의 파우더리한 색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콘셉트로 꾸민 매장에도 보라색 카펫이 깔렸고, 영화 속에 등장한 정체 모를 두 소녀는 얼굴 없는 마네킹이 되어 매장 구석진 곳에 존재감을 숨기며 서 있었다. 영화 속에 등장한 신비로운 동물과 초현실적인 식물은 유리 케이스 속에 담겨 고가의 가방과 액세서리가 자리 잡아야 할 매장 중앙에 설치되었다. 필름 속에는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제작한 수트케이스와 가방이 등장하는데, 미지의 부족을 의미하는 독특한 심벌이 프린트되어 있는 것으로 베이징 프라다 매장에서 스페셜 에디션으로 판매된다고 한다.

코스튬 디자이너들이 재창조한 공간은 프라다와는 상관이 없는 곳인 듯도 했고, 또 지극히 프라다스러운 공간이기도 했다. 아카이브에서 가져왔거나, 또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새롭게 만든 단 하나의 작품이 대부분이기에 당장 살 수 있는 제품은 거의 없다 해도 프라다라는 브랜드를 매력적이고 새롭게 느끼게 하는 유혹적인 에너지만큼은 더없이 팽배했다. 아리안느 필립스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에디터들과 함께 자신이 창조한 공간을 투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코스튬 디자이너로 일할 때에는 감독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이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코노클라스트는 내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프로젝트였다. 내가 감독이 되고 보니 비로소 예술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동기 부여는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라고. 모든 패션 디자이너가 그렇겠지만, 미우치아 프라다조차도 매 컬렉션을 발표하거나, 패션계의 누구도 생각지 않았던 프로젝트를 착수할 때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를 자양분 삼아 거침없는 결단을 감행하면 그 창조성은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팔아야 할 물건 대신 환상과 아이디어로 가득한 이코노클라스트, 프라다의 이름이 더욱 빛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