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쉽게 지루해지지 않는 건, 예상 밖의 에너지를 지닌 새로운 재능들이지치지 않고 출현해 기존의 풍경을 흔들어놓기 때문이다.더블유가 만나고 온 이 사람들이 그랬듯이.

장콸이 입은 네이비 블라우스는 본인의 것.

장콸이 입은 네이비 블라우스는 본인의 것.

 

 

이게 나예요 – 아티스트 장콸

 

편의상 이 지면에서도 사용을 하긴 했으나 ‘아티스트’는 장콸이 딱히반기는 소개가 아니다. 자신에게는 다소 거창한 단어 같다는 이유다. 그렇다고 그를 일러스트레이터로 분류하는 것도 곤란하다. “제 직업이 일러스트레이터라면 클라이언트의 의뢰에 맞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해요. 하지만 전 그런 방식으로 작업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지금껏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하고 윤종신이나 물렁곈 같은 뮤지션의 커버 아트를 담당하기도 했지만, 죄다 자신의 개성과 색깔을 편집할 필요가 없는 프로젝트들뿐이었다. 그렇다면 스스로는 어떤 문구나 단어가 그를 설명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할까? “작가는 좀 막연한 느낌일까요? 그냥 ‘그림 그리는 사람’ 정도가 맞는 것 같아요”.

물론 ‘아티스트’ 혹은 ‘그림 그리는 사람’ 같은 수식보다 장콸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해주는 건 그의 그림이다. 서늘한 눈매를 지닌 무표정한 소녀가 환상적이고 에로틱하고 때로는 음울한 상상 속을 거니는 장면들이다. 사실 그림 속 인물은 그와 꽤 닮은 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자신을 모델로 한 캐릭터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나름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재료일 뿐이고 그래서 딱히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짐작하다시피 ‘장콸’은 필명이다. 블로그를 운영하던 중학생 시절 ‘코알라’를 줄여서 지었던 걸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쓰게 됐다. 왜 코알라였을까, 물었더니 “안경을 쓰면 비슷해 보인다”고 답한다. 요즘은 종종 멋쩍어질 때가 있어서 원래의 이름, 즉 장다혜로 돌아가
고 싶은 생각도 든다고 그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장콸은 꿈과 주변 사물에서 작업의 실마리를 찾을 때가 많다. 3~4년부터는 잠들기 전에 늘 노트를 머리맡에 둔다. 막 잠에서 깨어나 잔상이 머릿속에 확실히 머물러 있을 동안, 그 내용을 글로나마 기록해두기 위해서다. “하지만 꿈속에서 경험
하고 느낀 걸 이미지로 흡족하게 옮긴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어요.” 정물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변화다. 불과 몇 년 전의 작업만 되짚어봐도 기괴하거나 섹슈얼한 느낌이 지금보다 훨씬 직설적이었다. “호기심이었던 것 같아요. 궁금
해서 그렸던 거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흥미가 떨어지더라고요. 저를 더 잘 알게 되면서 제가 아닌 걸 그리는 일이 어색해졌어요. 그렇게 ‘나’를 파악하는 일에 집중했다가 요즘은 다시 가까운 주변으로 관심을 넓혀가는 중이에요. 죽어 있는 흔한 물건에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는 거죠. 이런 작업을 더욱 발전시키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예전에는 일단 내키는 대로 표현하면서 해소하고 봤다면, 지금은 한결 신중해질 필요를 느낀다고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이걸 그리려 하는지, 혹은 왜 이런 표현 방식을 원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물론 머릿속만 바글바글하
고 아직 정리가 된 상황은 아니에요.” 결국 그림은 장콸, 아니 장다혜가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방법이다. “오글거리는 말이긴 한데 제게는 그림이 가족보다 더 소중할지도 모르겠어요. 스트레스도 받지만 한편으로는 거기서
안정을 찾아요. 아무튼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해요, 저는”.

 

하얀색 코튼 티셔츠는 코스, 화이트 도트가 들어간 회색 팬츠는 반디에라, 검은색 슬립온은 반스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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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많습니다 – 영화감독 이병헌

 

최근 사람들 사이에서 부쩍 자주 회자되고 있는 배우와 감독은 공교롭게도 동명이인이다. 둘 중 더블유가 대화를 청한 쪽은 <스물>의 연출자인 이병헌이다. 김우빈, 이준호, 그리고 강하늘이 귀엽고 실없는 청춘을 연기한 이 코미디는 누적 관객수 3백만 명 이상을 기록하며 익숙한 이름을 지닌 낯선 감독의 존재를 확실히 알렸다. 지구력 있게 이어지는 탁월한 순발력의 농담들은 그간의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장기다. 오후 3시에 만난 이병헌은 배우 못지않은 외모였지만, 어쩐지 침대에서 막 빠져나온 오전 7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난밤에 술자리가 있었다고 했다. 3월 말에 개봉한 그의 두 번째 장편은 슬슬 극장 상영을 마무리하는 단계다. 쓰나미 같던 스케줄이 지나간 뒤에, 비로소 미뤄둔 술 약속들을 챙기는 걸까 짐작했다. 그런데 감독이 단호한 태도로 굳이 이렇게 답했다. “아니에요. 아무리 바빠도 술은 안 미루고 마시거든요.”

 

어떤 연출자들은 자기 영화를 재차 확인하는 걸 꽤나 괴로워하는데 이병헌 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당황스러울 만큼 솔직한 자기 고백인 데뷔작 <힘내세요 병헌씨>는 가끔 술을 마시며 혼자 볼 정도다. <스물>은 개봉 전후로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잠시 멀리하는 중이지만 몇 개월쯤 지나면 또 생각이 날 것 같다고 한다. “흥미롭게, 혹은 아쉽게 여겨지는 부분이 볼 때마다 바뀌거든요. 제 영화지만 여전히 정리가 끝나지 않았어요.” 규모가 소박했던 <힘내세요 병헌씨>와 달리, ‘남의 돈 써가며 만든’ 상업 영화인 두번째 작품은 고려하고 타협해야 할 부분이 컸다. “아니, 타협은 너무 무거운 단어 같아요. ‘어떻게 하면 관객이 좋아할까’를 더 고민하면서 만든 정도죠. 전 어차피 예술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대중적인 취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게 1천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코드는 아니겠지만.”

 

이병헌의 영화에는 클리셰를 비트는 개그가 특히 자주 등장한다. 분위기가 무겁거나 뭉클해지려고 할 때마다 번번이 농담을 던지며 흐름을 끊는다. 덕분에 이야기는 뻔하게 눅눅해지는 법이 없이 평균 이상의 산뜻함을 유지한다. “클리셰를 굳이 가져와 비꼬는 건 그 ‘진부함’을 어떻게든 이용하고 싶어서예요. 그렇게 우리와 가까이 있는 이야기들이 전 좋거든요. 재미있고 공감가는 재료다 보니 자주 쓰게 됐고 그래서 식상해졌을 뿐이잖아요. 제 전략은 양면 점퍼예요. 뒤집어서 한번 더 입는 거죠.” 보편적인 공감대를 의외의 방법으로 건드릴 줄 아는 재치는 이 신인 감독의 유독 돋보이는 무기다.

 

<과속스캔들>과 <써니>의 각색을 맡았으며, <오늘의 연애>에는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던 이병헌은 굳이 따지자면 이미지보다는 말로 승부하는 연출자다. 두 편의 장편 모두 대사의 힘이 곧 이야기의 추진력이 되는 작품이었다. “영상 언어에 대해서는 공부 중이에요. 함부로 덤비지 말고 천천히 고민하려고요. 지금은 단점을 보완하기보다는 장점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 같아요. 두 개를 다 하려면 아직까지는 딸려요, 제 역량이.” 그는 영화를 통해 수다를 떨고 싶은 욕심이 큰 편이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지 물었더니 오히려 과묵한 쪽에 가깝다고 답한다. “그래서 작품 안에서는 더 떠들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죠.” 스트레스도 누군가를 만나는 대신 집에 가만히 앉아 글을 쓰면서 푼다. “써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순수하게 쓰고 싶은 글을 쓰면 그렇게 재미있어요. 전 여행보다 이쪽을 더 좋아해요.” 소파 혹은 침대 위에서 기꺼이 하루 종일을 보내곤 하는 치호(김우빈)가 누구를 참고한 캐릭터인지 쉽게 짐작이 갔다. <스물>은 딱히 자전적인 작품이 아니라고 그가 여러 차례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병헌의 차기작 소식은 예상보다 빨리 들려올지도 모르겠다. 이미 구상을 마친 몇 개의 프로젝트가 있으며 그 가운데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하나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분명한 점은 <스물>이나 <힘내세요 병헌씨>와는 결이 상당히 다른 작품이 되리라는 것이다. “수다를 떨 듯 두 편을 만들고 나니 다음에는 좀 더 전통적인 ‘이야기’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정을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그래서 제가 함부로 장난을 칠 수 없는 소재나 장르도 염두에 두고 있고요.” 일단 만들고 나면 영화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는 전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건 물론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어떤 재료를 다루든 이병헌의 이야기 같다는 느낌을 주고 싶다는 게 솔직한 바람이다. “하지만 뭐,” 감독이 곧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게 바란다고 되겠어요? 결국 보는 사람들 마음이지.”

 

이인우가 입은 빈티지한 야자수 패턴 티셔츠는 리바이스,오혁이 입은 와인색 칼라 피케 셔츠는 질샌더, 연한 청색 데님 팬츠는 리바이스,임현제가 입은 인디고 블루 데님 팬츠와 큼직한 줄무늬티셔츠는 리바이스,임동건이 입은 라임색 티셔츠는 코스, 보머 데님 재킷은 겐조 옴므 제품.

이인우가 입은 빈티지한 야자수 패턴 티셔츠는 리바이스,
오혁이 입은 와인색 칼라 피케 셔츠는 질샌더, 연한 청색 데님 팬츠는 리바이스,
임현제가 입은 인디고 블루 데님 팬츠와 큼직한 줄무늬티셔츠는 리바이스,
임동건이 입은 라임색 티셔츠는 코스, 보머 데님 재킷은 겐조 옴므 제품.

 

 

비범하게 평범한 – 밴드 혁오

 

스튜디오에 들어선 밴드 혁오의 멤버들은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베이스를 맡고 있는 임동건은 혼자 도착이 늦었는데, 병원에 들러 링거 주사를 맞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발매가 코앞으로 닥친 EP의 녹음 일정에 쫓기느라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는 모양이었다. “이틀, 아니 사흘인가?” 밤을 며칠째 새운 거냐고 물었더니 보컬과 기타를 담당하는 오혁이 남의 이야기처럼 갸웃거렸다. “지난 앨범 때는 이렇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스케줄이라는 게 없었거든요. 작업을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말고 그랬죠.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첫 EP인 <20>이 발매된 게 작년 9월이니 대략 반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다. 스물셋 동갑내기 네 명이 모여 결성한 이 밴드는 이렇다할 마케팅 없이 음악의 힘만으로 수면 위를 뚫고 올랐고, 꾸준히 맹렬한 파장을 퍼뜨리는 중이다. 담백하면서도 세련된 사운드 위를 오혁의 까슬까슬한 보컬이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는 듯한 ‘위잉위잉’은 이들에게 즉각적인 팬덤을 안겨줬다. 혁오는 최근의 음악 신에서 가장 뜨겁고 흥미진진한 이름 가운데 하나다.

작업 당시의 나이를 따다 붙여 <19>와 <21>이라는 두 개의 앨범을 내놓았던 아델에게서 힌트라도 얻은 걸까? 6월이 되기 전 발매될 새 음반 타이틀은 이미 <22>로 결정한 상태다. “아직 저희의 음악이나 인성이 여물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거든요. 숫자를 붙이니까 보기에도 심플하고 그만큼의 세월 안에서 생각하고 경험한 것만 들려준다는 의미도 명확해지는 것 같아요.” 오혁의 이야기다. 그가 주도한 부분이 컸던 첫 번째 EP와 비교하면 <22>는 편곡이나 사운드 면에서 밴드라는 정체성이 한결 강조된 결과물이다. 물론 최종적인 필터링은 리더의 몫이 었지만 그 외 멤버들이 보탠 목소리 역시 결코 작지 않다. 거의 힙합에 가까운 리듬을 사용한 트랙도 있는데, 힙합 크루로 활동하다 혁오에 합류한 드러머 이인우가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곡이다.

어쩌다 보니 함께 이틀, 혹은 사흘을 내리 지새우는 사이가 되긴 했지만 네 명의 공통 분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오혁이 좋아하는 감독으로 소피아 코폴라나 줄리 델피를 언급한 데 반해 임동건은 <분노의 질주>처럼 줄곧 액션으로 몰아치고 쉬는 시간에는 은행이라도 터는 영화를 봐야 속이 후련하다. 한편 이인우는 <이스턴 프라미스>풍 누아르를, 기타의 임현제는 <브라질> <블레이드 러너>류의 1980~90년대 SF를 언급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음악적 취향마저도 제 각각이다. 얼렌드 오여부터 존 프루시안테까지 저마다 손꼽는 뮤지션들이 달라도 너무 다른 색깔이다. “그래서 좋아요. 비슷한 애들끼리만 모여 있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예상 못했던 뭔가를 서로에게서 발견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거죠.” 이들이 굳이 모여야 했던 이유는 임현제의 대답에서 찾을 수 있었다.

 

<20>의 경우, 바닥 아래로 꺼져버릴 듯 무기력하고 쓸쓸한 가사의 곡이 대부분이었다.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22>는 인간 관계를 좀 더 깊게 파고드는 내용이 될 거라고 오혁은 설명한다. “20대가 된 이후로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임현제는 자신들이 통과하고 있는 20대 초반이라는 나이가 여러모로 애매한 시기 같다고 털어놓았다. “뭔가에 대해 안다고 자신하기도 어렵고, 모른다고 빼기도 망설여지거든요.” 혁오는 신인답지 않게 세련된 사운드를 구사하면서도 그 나이만큼의 미숙함을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아는 밴드다. 비범한 동시에 평범하고, 자신만만하면서 소심하고, 무겁다가도 이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불균질함이야말로 이들의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성급한 일부는 혁오의 노래가 지금 이 순간의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목소리라고 벌써부터 단언하기도 한다. 하지만 멤버들은 누군가를 대신해서 말하고 싶은 바람도 없고 자신들이 대단히 새롭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별것아닌 이야기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방식대로 할 뿐이다. “새롭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 저희의 음악이나 프레젠테이션 방식이 전에 없던 뭔가는 아니에요. 아마도 그분들이 보기에는 아직 낯설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닐까 싶어요.”(오혁)

묻는 내용에만 짧은 몇 마디를 간신히 내놓을 정도로 과묵하던 네 사람은 얼마전 열린 폴 매카트니 내한 공연이 화제에 오르자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다. 오혁이 다른 멤버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슬쩍 믹싱 약속을 옮기며 콘서트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그가 올린 인스타그램 인증샷을 보고서야 사태 파악을 했다는 세 사람은 새삼스럽게 맹렬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가락질을 한몸에 받던 당사자는 머뭇거리면서, 하지만 꿋꿋하게 이런 말을 했다. “인터뷰 때 앞으로의 목표를 물어오면 노엘 갤러거처럼 되고 싶다고 답하곤 했거든요. 이젠 바뀌었어요. 폴 매카트니로요.” 그렇다면 다른 멤버들은 동일한 질문에 어떤 생각을 내놓을까? “달에서 라이브?” SF 팬다운 임현제에 비하면 이인우의 답은 현실적이다. “혁오라는 밴드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고 싶어요.” 한편 임동건은 호기롭게 월드투어에 대한 희망을 드러냈다. 문득 임현제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우리 공연 때문에 싸우는 사람이 생기면요? 폴 매카트니처럼 못보면 화가 나는 뮤지션이 되는 거죠. 꽤 괜찮을 것 같아요” .

 

박상우가 입은 기하학적 패턴의 화이트 셔츠는 써리얼 벗 나이스 제품.성원모가 입은 아티스틱한 프린트 티셔츠는 프레드 페리 by 라프 시몬스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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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모가 입은 아티스틱한 프린트 티셔츠는 프레드 페리 by 라프 시몬스 제품.

 

 

남들과는 다르게 – 뮤직비디오 감독 디지페디

 

“너는 금방이라도 뒤에서 스시를 꺼낼 것 같고, 나는 방금 중환자실에서 탈출한 사람 같아.” 촬영용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온 성원모 감독이 먼저 옷을 입고 기다리던 박상우 감독을 향해 이 말을 던지는 순간, 스튜디오에 있는 스태프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평소에 즐겨 입는 것과 사뭇 다른 스타일의 옷을 입은 두 사람은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리 <개그콘서트>에서 엄청 재미없는 코너 맡고 있는 개그맨 듀오 같은데?” 한술 더 떠 박상우 감독이 맞장구쳤다. 성원모(원모어타임)와 박상우(오로시)는 디지페디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뮤직비디오 감독이다. 가로 프레임 형식의 보통의 뮤직비디오와 달리 과감히 세로 프레임으로 제작해 화제가된 에픽하이의 ‘BORN HATER’나 올 상반기 최고의 인기곡, EXID의 ‘위아래’ 뮤직비디오는 모두 디지페디에 의해 탄생한 작품들이다.

7년 가까이 100여 개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초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똑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늘 함께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같이 일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둘 다 처음부터 뮤직비디오를 만들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처음 공식적으로 맡게 된 일이 영상 작업이었고, 일을 하다 보니까 뮤직비디오를 많이 만들게 됐고 덩달아 사업도 커졌죠.” 높아진 인지도만큼 들어오는 일이 훨씬 많아졌지만 지금도 디지페디 사무실에 있는 직원수는 두 사람을 포함해 고작 여섯 명이 전부다. “무작정 회사 몸집만 키우면 우리 색깔을 잃을지도 몰라요. 적당한 인원으로 최고의 완성도를 유지하는 것이 저희한테는 훨씬 중요해요.” 회사 규모가 커져서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늘 비슷한 결과물을 만드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것이 디지페디의 입장이다. 앞서 언급된 뮤직비디오나 최근 해외에서 폭발적인 유튜브 ‘좋아요’ 수를 얻은 노라조의 <니 팔자야>같이 이전 케이팝 시장에서 볼 수 없던 창작물이 나올 수 있는 배경에는 분명 그 뚝심이 있었을 테다.

 

디지페디가 뮤직비디오 연출에 뛰어들었을 시절과 비교하면 지난 몇 년간 국내 뮤직비디오 시장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몇 개의 정해진 포맷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던 뮤직비디오 시장의 표정은 훨씬 다채로워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다고 입을 모았다. “심의 문제가 가장 불만이죠. 누가 봐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떤 장면에서 배우가 술 한잔 마시거나 담배 한 모금을 내뿜으면 좋겠는데, 이것조차도 안 된다고 하니까…” 우리나라 가요계의 고질적 문제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성원모에 의하면 우리나라 걸그룹은 딱 네 개의 유형밖에 없다. 귀여운 걸그룹, 섹시한 걸그룹, 청순한 걸그룹, 이상한 걸그룹. 걸그룹만 보더라도 가요계 내 다양성의 한계가 보이는데 여기서 무언가를 다르게 만들어봤자 얼마나 독창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심지어 타이틀곡은 막판에 정해지는 경우가 허다해서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우리는 늘 시간에 쫓겨요. 가끔은 미팅 후에 전화를 걸어서 다음 주에 급하게 촬영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으니 황당할 따름이죠. 조금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해서 기획사 측에서도 배려를 해줄 필요가 있어요.” 더 나아가 저작권 문제, 수익 구조 문제, 따로 말하기도 입 아픈 표절 문제까지, 이 업계에서 디지페디가 겪은 문제들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재미있는 일을 맡겨만 주면 언제든 환영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저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짧고 강렬한 영상으로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될 수 있다는 점에 매혹되어 주로 뮤직비디오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만 이것만 할 생각은 없어요. 이런 거 저런 거 다 해보면서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