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즌 런웨이는 올리브색의 향연이라 할 만하다.
실용주의와 활동성 그리고 쿨한 분위기로 무장한
유틸리티 룩의 다양한 변주는 ‘밀리터리 클래식’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카키색 블루종과 스커트는 사카이, 레깅스 팬츠는 파코라반, 페이턴트 앵클부츠는 생로랑 제품.

카키색 블루종과 스커트는 사카이, 레깅스 팬츠는 파코라반, 페이턴트 앵클부츠는 생로랑 제품.

 

 

찰스 디킨스가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말한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라는 표현을 인용하자면, 이번 시즌 패션계에는 충돌하는 두 여인이 등장한다. 하나는 부서질 듯 연약한 여성스러움을, 또 하나는 강렬한 실용주의를 상징하는 페르소나다. 이 상반된 두 가지 트렌드는 봄을 향한 빛과 어둠으로 작용한다. 언제나 그렇듯 패션계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흑백과 화려한 색채의 공존, 미래주의와 그 반대선상에 있는 민속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역설적인 트렌드의 대립, 혹은 하늘거리는 시폰 드레스 룩에 파워풀한 바이커 재킷을 매치하는 등 시각적으로 어긋나는 요소들로 재미를 더한다. 2015 S/S 시즌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다른 섹슈얼리티를 투영한 여성들이 캣워크를 점령했는데, 바쁜 세상을 보다 파워풀하고 실용적으로 수용하려는 유틸리티 스타일이 지배적인 흐름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많은 디자이너들은 이번 시즌 트렌드인 1970년대와 히피, 스포티즘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코드로 유틸리티 무드를 꼽았다. “이제 밀리터리 룩은 하나의 패션 양식으로 자리 잡았어요.” 마크 제이콥스의 말처럼 밀리터리는 현대의 클래식으로 분류될 수 있을 정도로 웨어러블해졌는데, 이번 시즌 마크는 유니폼만으로 쇼를 이끌어나갔다. 파란색의 병원 수술복과 올리브색의 군복에 커다란 카고 포켓과 반짝이는 버튼, 카보숑 컷의 주얼이 장식됐고, 때론 이 룩들은 푸프 스커트와 페이퍼돌 시프트 드레스, 맥시 드레스와 오버올 스타일로 변주됐다. 사실 19세기 중반까지 밀리터리 룩은 밝고 경쾌한 색상(1987년 스테판 스프라우스의 캔디 컬러 카무플라주 패턴이 탄생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을 주로 사용했다. 우리가 흔히 밀리터리 컬러로 알고 있는 카키색은 모래 폭풍 속에서 군인들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전략으로 처음 등장한 것이다.

1996 F/W 시즌 밀리터리 룩이 트렌드로 올랐을 때 수지 멘키스는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고 평했지만, 글래스톤베리나 코첼라 같은 록 페스티벌과 케이트 모스의 파파라치 룩, 그리고 모델들의 오프듀티 스타일 덕택에 밀리터리 재킷은 동시대의 베스트셀링 아이템으로 등극했다. 이번 시즌 저마다의 감성을 담은 밀리터리 유니폼의 변주는 매우 흥미롭다. 랄프 로렌은 작업복과 유니폼을 시작점으로 올리브색의 카고 팬츠와 사선으로 드레이핑된 사리 스타일의 보랏빛 실크 톱을 내보냈고, 푸크시아 핑크, 오렌지, 옐로 등 비비드한 컬러 팔레트와 함께 메탈릭한 오간자 소재의 유틸리티 셔츠와 사파리 재킷, 조드퍼 팬츠, 점프수트와 클래식한 악어 백이 어우러졌는데, 피날레에 나온 사막의 모래 돌풍을 연상시키는 유틸리티 태피터 가운은 사파리 쿠튀르의 정점을 제시했다.

페미니스트들의 힘찬 행진을 보여준 샤넬의 런웨이에도 올리브색으로 무장한 유틸리티 군단이 등장했고, 1970년대 레트로 룩을 재조명한 구찌 쇼 역시 밀리터리 무드를 가미한 견장 장식 트렌치코트와 데님 소재의 유틸리티 재킷이 히피 무드의 드레스와 조화를 이뤘다. 그런가 하면 랙&본 쇼에는 면, 실크, 캔버스 같은 자연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아노락, 트레이닝 쇼츠 같은 산뜻하고 가볍게 입을 수 있는 유틸리티 룩이 등장해 안락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더했는데, 이는 도시인들의 지친 심신을 달래줄 것만 같은 스포티 힐링 룩이었다. “유니폼은 언제나 저에게 영감을 주죠.” 쇼 직전 백스테이지에서 간단한 코멘트를 남긴 빅토리아 베컴도 밀리터리 터치가 가미된 유니폼 드레싱을 선보였는데, 견장과 패치 포켓이 장식된 부드러운 베이지 톤의 코트 드레스와 미디스커트가 매치된 니트 앙상블은 그녀의 데일리 룩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슬림했으며 세련미가 넘쳐흘렀다.

 

파리의 여성 트로이카, 셀린의 피비 파일로와 스텔라 매카트니, 끌로에의 클레어 웨이트 켈러 그리고 여기에 새롭게 합류한 소니아 리키엘의 줄리 드 리브랑 역시 유틸리티 룩을 우아하게 소화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유틸리티 룩을 좀 더 캐주얼하고 트렌디하게 소화하고 싶다면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No.21의 알레산드로 델라쿠아가 제시한 룩이 그 해답이 되어준다. 인디고 데님 소재의 포켓 장식 재킷, 무릎길이의 버뮤다 팬츠, 여기에 앵클부츠를 매치한 루이 비통의 룩은 이번 시즌의 키 스타일링으로 떠올랐으며, 카고 재킷을 원피스로 활용하고, 매끈한 새틴 소재 리본 슈즈를 더한 No.21의 룩은 실용적이면서도 사랑스러웠다. No.21의 룩처럼 활동성과 내구성을 내세운 유틸리티 트렌드 역시 로맨틱하게 연출할 수 있다. 파워풀한 밀리터리 코트 안에 시폰으로 물결치는 드레스를 매치해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경계를 넘나들던 사카이 쇼를 떠올려보자. 로다테 런웨이에서도 장식적인 이브닝 가운과 기능성 패치 포켓을 단 밀리터리 재킷이 만났다.

 

“우린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두 모드를 절충해 혼합하는 걸 좋아해요.” 로다테의 로라&케이트 멀리비의 코멘트다. 

 

“이번 컬렉션은 서로 다른 두 테마를 내포하죠. 유틸리티 룩 역시 시적인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깃털이 장식된 개버딘 재킷과 데님 버뮤다 팬츠는 루이 비통 제품.

깃털이 장식된 개버딘 재킷과 데님 버뮤다 팬츠는 루이 비통 제품.

 

 

이처럼 다양한 유틸리티 코드가 도처에 출몰하는 까닭은 활동적이고 세련된 분위기가 자유로움과 도취감을 주기 때문! 올봄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밀리터리 식의 젠틀우먼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