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짙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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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클라인 언더웨어 광고 모델에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주인공으로,
제이미 도넌은 여자들의 은밀한 꿈속에서 현실로 소환된 인물이자,
지금 가장 주목받는 남자 신데렐라다.

배우 제이미 도넌과의 인터뷰를 2주 앞둔 시점에서 이메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 마이 갓. 나 가서 구경해도 돼?” “그는 지구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야.”

가장 간결한 메일은 이거였다.

“운도 좋은 년.”

이런 일은 흔치 않다. 인터뷰 당일, 필요 이상의 에디터들이 몰려와 촬영에 ‘참관’한 것도 이례적이었다. 이 모든 욕망의 초점이 된 사람은 무척이나 수더분한 남자였다. 도넌은 면도도 하지 않고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나타나 조용히, 공손하게 스태프 전부와 악수를 했다. 그의 체격은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 광고에 나온 모습만 보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다부지다. 이목구비는 섬세하고 눈동자 색깔은 짙다. 생각에 잠긴 듯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그를 구름처럼 감싸고 있다.거기에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지역의 진한 억양이 더해져, 건장하다기보다 소년에 가까운 인상은 좀체 드러나지 않는다. 도넌은 넋 놓고 쳐다볼 수밖에 없는 외모를 지녔다. 포토그래퍼의 요청으로 길게 자란 여름 잔디 위에 누워 얼굴을 찡그릴 때, 특허를 내도 좋을 그만의 표정이 나온다. 눈썹을 세우고 응시하는 모습.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 뒤에 숨은 깊이를 암시하는 눈빛. 디올, 아르마니 캠페인에 나온 그를 본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표정. 그가 몇 년 전 패션업계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그 찡그린 얼굴이 그를 가장 성공적인 남자 모델 중 하나로 만들어주었다.



작년에 도넌은 BBC의 히트 드라마 <더 폴>에 처자식을 둔 사별 카운슬러 폴 스펙터로 출연해서 그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스펙터는 저녁이면 벨파스트 가정의 침실로 숨어 들어가 무력한 여자들을 살해하는 인물이다. 곧 공개될 <더폴>의 두 번째 시즌에도 스펙터가 등장한다. 스펙터로서 도넌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연쇄살인범이다. 멋진 근육에, 속옷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추잡함까지 가졌다. 이 캐릭터는 질리언 앤더슨이 맡은 똑똑하고 매력적인 형사 스텔라 깁슨을 완벽하게 돋보이게 했으며, 도넌에게는 그의 커리어를 결정지은 역이었다. 영국 아카데미 후보에도 올랐고, 더 큰 역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2014년 초 그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영화판에 주인공인 크리스천 그레이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더 폴>은 제 인생을 바꿔놨어요. 과장이 아니라 진짜 그래요.”

도넌이 연기한 스펙터는 많은 사람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는 여성 시청자 대부분을 갈등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런 의문을 품게 만든 것이다. “연쇄살인범을 좋아해도 되나?” 감독이자 배우인 레나 던햄은 트위터에다 이렇게 썼다. “난 제이미 도넌(@JamieDornan1) 의 엄청난 팬이야. 섹스 살인범을 연기했기 때문에 <더 폴>에선 그를 좋아하면 안 됐었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내겐 큰 기회라고 할 수 있어. 잠깐, 크리스천 그레이는 살인범 아니지?” 질리언 앤더슨도 비슷한 지적을 한다. “도넌이 매력적이기 때문에 스펙터가 저지르는 일이 더욱 불편해요. 스펙터가 하는 짓이 갑자기 덜 끔찍해지거나, 변태적으로나마 호감이 간다면 어이없는 일이잖아요?” 하지만 그녀조차 도넌의 매력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정말, 정말 재미있고 노래할 때 목소리가 정말 좋고, 내가 보기엔, 실생활에서 그는 딸과 아내와 친구들을 엄청나게 아껴요. 정말이에요! 난 그의 결점을 찾아보려고 무척 애썼다니까요.”

인터뷰는 촬영 로케이션에서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카페 창가 바에 앉아서 진행되었다. 인터뷰 내내 창밖을 바라보고 있게 된 도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팔을 문질렀다 한다. 그는 잘 웃고 늘 상냥하지만 대화는 조심스럽게 한다. 어떤 표현을 쓸지 조심스럽게 고려하고 문장 중간에 말을 한참이나 멈추곤 해서, 나는 끼어들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쉽게 사회에 적응한 연쇄살인범이 많았어요.

지적이고, 말을 잘하고,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도 이루고, 비교적…” (끊었다가)

“… 남들의 말이지만 잘생겼다는 말을 듣는.

내가 그 캐릭터를 연기함으로써 우린 이런 게 존재할 수 있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려 했어요.” 

그러나 그 역은 본래 그가 맡을 역이 아니었다. “난 오디션을 잘 못 봐요. 내 자신을 파는 솜씨가 부족하거든요. <더 폴>의 오디션에서도 잘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작가인 앨런 커빗이 내게서 뭔가를 본 것 같아요. 아마도 그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느라 고생 좀 했겠죠.”

실제로 만나보니 도넌을 캐스팅한 것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물론 도넌에게서 사이코패스 성향이 느껴진다는 뜻은 아니다. 초기 에피소드에서 나온 것처럼 그가 오렌지 껍질을 한 번도 끊어지지 않게 벗길 수 있다는 것- 연쇄살인범의 필수적인 스킬이다 – 때문도 아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깊이 생각에 잠기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만의 특징이지만, 아주 전형적인 북아일랜드 사람다움이기도 하다. 이런 점이 연쇄살인범 캐릭터에 필요한 위협적인 면모를 부여한다.

“난 제이미의 매력이 옷만 밝히는 골빈 멋쟁이들의 번지르르함과는 다른, 말론 브랜도에 가까운 마성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남성성과 여성성이 섬세하고도 짜릿하게 아주 잘 섞여 있어요. 진짜 주연 남자 배우가 되려면 어둠과 위험함도 좀 있어야 하고요.”

커빗이 나타나기 전까지 배우로서 도넌의 커리어는 소피아 코폴라의 <마리 앙투아네트>, 미국 판타지 시리즈 <원스 어폰 어 타임>의 작지만 근사한 역할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가 모델로서 거둔 성공이 그의 배우 생활을 막은 걸까? “조금은 그럴지도 몰라요. 앞으로도 그럴 수 있고요. 내 인생의 최근 10년 동안 나는 모델이었어요. 난 그 기간의 내 자신을 늘 비교적 성공한 모델이었다기보다는 실패한 배우였다고 기억할 거예요. 매주 실패했거든요.”

 

나는 제이미와 조금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2001년에 내 남편 벤이 만든 채널 4 리얼리티 쇼 <모델 비해비어>에 도넌이 지원해서 경쟁자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도넌은 런던편에서 탈락했지만(이틀 버틴 다음에 제작진이 “OK, 어이, 그만하면 됐어. 잘 가” 했던 것 같다) 후에 셀렉트와 모델 계약을 맺었다. 그는 런던으로 옮기고서도 벤과 친하게 지냈고, 가끔 월요일 밤 리그에서 같이 축구를 했다. 내가 도넌과 마주칠 때면 그는 운동하다가 다친 상처가 있을 때가 많았다. 한번은 눈가에 시퍼렇게 멍이 든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디올 옴므 향수 캠페인 촬영을 불과 며칠 앞둔 날에도 그는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에이전트에게 내가 럭비를 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게 됐어요.” (그는 티셔츠를 걷어 근육질 어깨에 난 혈관이 터져 생긴 반점들을 보여준다. 오후 내내 클레이 사격을 해서 생긴 것이다.)

모델로서 가장 잘나갈 때, 브루스 웨버, 스티븐 마이젤, 에디 슬리먼 등의 사진가에게서 콜을 받을 때도 도넌의 행동이나 성격에서는 <주랜더>에 나오는 열심히 치장하는 남자 모델들과 비교할 만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 업계에는 그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친구들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잖아요?” 20대 때 도넌은 눈썹을 뽑거나(실제로 뽑지는 않는다) 허리선을 걱정하기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펍에 놀러 가는 데에 관심이 더 많았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사귄 2년 동안 그를 따라다닌 명성을 즐기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난 패션업계를 아주 리스펙트해요. 하지만 뜯어놓고 보면, 전체적으로 다 좀 우스꽝스러워요.” 내가 벤과 2010년 여름에 했던 게임을 이야기하자 그는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즈음 런던의 모든 버스에는 캘빈 클라인 속옷만 입고 몸에 기름을 잔뜩 바른 도넌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도넌과 마찬가지로 기름칠을 한, 거의 다 벗다시피 한 에바 멘데스와 엉켜 있는 그를 찾아내는 이 게임의 이름은 ‘제이미 카운트’였다. 최고 점수는 반나절에 버스 여덟 대. “정말 끔찍한 여름이었죠! 팬티만 입은내 모습을 보고 구역질이 나다니.”



“모델 출신 배우라는 것에 따라붙는 오명이 있어요. 하지만 난 늘 언제나 모델 일 하기를 주저했고, 그래서 에이전트는 화를 냈죠. 모델을 하는 걸 아주 즐겨본 적은 없고, 묘하게도 많이 하지도 않았어요. 내가 찍은 광고들이 버스에 붙는 그런 광고이긴 했지만, 그게 내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는 않았어요. 캣워크 쇼는 평생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는 모델에서 벗어났다는 게 행복할까? “은혜를 모르는 건 아니에요. 같이 일하는 게 즐거운 포토그래퍼들도 있구요. 하지만 잔뜩 분위기 잡고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손가락 하나를 입 주위에 대고 몇 장 찍어볼까?’ 이러는 건…그보다는 축구를 할래요.”

결정론적인 이야기지만, 재미있게도 그는 벨파스트 근처의 할리우드(Holywood)라는 마을에서 자랐다. “80년대의 벨파스트는 시시한 동네였어요. 하지만 난 결코 내 고향을 다른 곳으로 바꾸고 싶지 않아요. 난 벨파스트의 학교를 다녔고, 내 친구들은 전부 거기 출신이에요. 비교적 안전한 동네에서 자랐고, 거친 도시에서 최악의 모습을 본 척할 생각은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그땐 분명히 있었어요.” 그는 자라면서 자신의 외모를 의식했을까? “아뇨. 학교에서 여자애들이랑 별로 잘되지 않았어요. 수줍음이 아주 많았거든요. 뭐, 내 외모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도넌의 아버지는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다. 어머니는 그가 16세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가 의학계에 진출할 생각을 한 적은 없었을까? “맙소사, 없었어요.” 그는 웃음을 터뜨린다. 그의 아버지 역시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는 18세 때 영국왕립연극학교 입학 허가를 받으셨지만, 할아버지가 ‘안 돼, 의대에 가라’ 하셨대요.”

<더 폴>로 영국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을 때 연기 학교에 가지 않기로 한

도넌 본인의 선택이(“내 생각에 연기는 본능적인 거예요”)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네! 그 얘기를 해보죠!” 그가 카페 바를 두드리며 말한다. “난 지기 싫어하는 놈이에요. 레드 카펫에서는 ‘후보에 올라서 정말 기뻐요’라고 말했지만, 들어가고 나서는 ‘젠장, 이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죠. 못 이기면 실제로 좀 우울해요.” 그가 웃으며 말한다.

그는 2013년에 뮤지션이자 배우인 아멜리아 워너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다. “꿈과 같은 아이예요. 끝내줘요. 난 아버지가 된 게 정말 좋아요. 최근 몇 년 동안은 참 대단했지만 우린 즐기고 있어요.” 도넌은 워너가 만삭일 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크리스천 그레이 역을 따냈다. “캐스팅되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우린 영화의 촬영지인 토론토로 가야 했어요. 아이가 곧 태어날 예정이었거든요. 이제야 그 시기가 얼마나 정신없었는지 실감이 나요. 촬영, 아이, 그 역을 맡게 되었던 과정…” 그는 이 역을 거부한 찰리 허냄 대신으로 막판에 캐스팅되었다.

그는 ‘50가지 그림자’ 영화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받았다. 샘 테일러-존슨 감독의 이 영화는 2015년 밸런타인데이에 영미권 개봉 예정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나눌 수 있다. 1억 권이 팔린 책을 영화화하는 부담 같은 것 말이다. “사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일이에요. 엄청난 사랑을 받는 책이죠. 하지만 어쨌거나 그냥 책이고, 우린 그저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그는 이 영화가 그의 인생에 가져올 높은 관심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게 준비를 해둘 수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영화 이후 내 삶이 악몽 같아진다면 외몽골 같은 데로 가서 유르트에서 살 거예요.” 그는 웃는다.

“32세가 되어서야 드디어 정신을 좀 차렸어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이때, 

내가 준비가 되어 있어서 다행이에요.”

크리스천 그레이와 폴 스펙터의 S&M적인 유사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둘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죠. 하지만 내가 똑같은 연기를 두 번 하지는 않았길 빌어요. 억양이 다르거든요.” 그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던진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에게 레나 던햄 이야기를 전했다.

“던햄이 <더 폴>의 팬이라는 사실이 정말 좋아요.

세상에서 제일 쿨한 일인 것 같아요. 진심이에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걸스>와 던햄의 영향력 이야기로 넘어간다. “난 던햄과 일하고 싶어요.” 러브신도 찍을 것인지에 대한 그의 대답은 강력하고 단호하다. “옷은 안 벗어요. 지겨워요. 신물이 나요.”

에디터
글 / 샬롯 싱클레어(Charlotte Sinclair), 황선우
포토그래퍼
부 조지(Boo George)
헤어, 메이크업
Larry King
스타일 에디터
Nura 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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