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엔 소매가 길수록 좋다. 반항기 넘치는 십대 소녀의 긴소매가 이토록 독특한 우아함으로 탄생했으니.

비늘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스팽글 장식이 더해진 니트는 McQ 제품.

비늘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스팽글 장식이 더해진 니트는 McQ 제품.

 

 

겨울을 맞아 허전한 손을 달래줄 장갑이나 액세서리를 장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희소식이 하나 있다. 이미 숱한 디자이너들과 패션 피플들이 선보인 바 있기에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이번 시즌 패션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손을 꿀꺽 집어삼킨 듯한 긴소매다. 2014년 가을/겨울 컬렉션을 보면 손끝만 겨우 찾아볼 수 있거나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디자이너들이 단체로 손 공포증에라도 걸린 모양이다. 대표주자는 단연 셀린의 피비 파일로. 이전부터 손을 가리는 옷을 심심치 않게 선보인 그녀는 이번 시즌 넉넉한 트위드 코트와 깅엄 셔츠의 소매를 쭉 늘여 링귀니 면을 떠올리게 하는 새로운 길이를 선보였다. 긴 팔을 휘적거리며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을 보면 팔의 끝이 어디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 밖에 더로우스텔라 매카트니, 캘빈 클라인도 모두 큼직한 스웨터 속에 모델들의 가녀린 손을 감췄다. 마크 제이콥스의 쇼에서는 타이트한 스웨터를 입은 모델의 팔이 함께 매치한 팬츠만큼 길어 보였고, 아크네는 무릎까지 소매를 길게 늘어뜨려 이번 시즌 소매가 가장 긴 니트를 선보였다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이러한 트렌드는 아우터에도 적용돼 프라다알투자라, 사카이는 서로 맞추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긴소매 코트를 선보이며 소매가 길수록 좋다는 새로운 트렌드 공식을 제안했다.

 

사실 손목을 가리는 트렌드는 갑자기 생겨난 건 아니다. 남자친구의 옷을 빌려 입은 듯한 보이프렌드 룩과 리얼 웨이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루스 핏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옷 좀 입는다는 여자들이 아우터를 어깨에 ‘툭’ 걸쳐 소매를 자유롭게 펄럭인 모습은 또 어떤가. ‘팔 실종 사태’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하나같이 팔을 숨긴 그녀들을 보면 아주 낯선 현상은 아니다.

 

“무언가 익숙지 않은 신선한 요소가 여러 쇼에 등장하는 걸 보면 참 재미있어요. 그들은 도대체 왜 소매를 늘린 걸까요?” 마이테레사닷컴의 바잉 디렉터 저스틴 오셰어가 말했다. “릭 오웬스나 마르지엘라같이 콘셉추얼한 디자이너의 경우라면 그나마 이해가 가죠. 그러나 패션계의 강력한 트리오 셀린과 아크네, 마크 제이콥스의 컬렉션에 등장한 거잖아요. 당연히 무언가 숨겨진 메시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토록 긴소매는 마크 제이콥스가 페리 엘리스의 1993 S/S 그런지 컬렉션에서 선보인 이후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 무려 20년만에 런웨이에 화려하게 복귀한 셈. “길게 나부끼던 소매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90년대에 불안한 십대 시절을 보내고 있던 제게 중요한 요소였거든요.” 스타일밥의 패션 디렉터 레일라야 바리가 회상하며 말했다. “90년대 옷들은 아주 편하고 주로 겹쳐 입기 마련이어서 딱딱한 테일러링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큼직한 니트와 플란넬 소재의 옷, 커다란 밀리터리 재킷이 유행이었거든요. 길게 늘어진 소매의 끝은 닳아 해졌고, 심지어 엄지손가락으로 구멍을 만들어 반항적이고 불안한 심리 상태를 표출하기도 했죠. 찢어진 진과 매치한 그런지한 룩은 타이트 한 옷을 포함한 80년대의 잔해와 매스 마켓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어요.” 야바리는 90년대의 긴소매가 패션의 영역을 넘어 음악과 정치, 안티 스타일 등 당시의 하위문화를 반영하는 애티튜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지는 현재 럭셔리 패션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어요. 드레스업하기 위해 일부러 간편히 입는 트렌드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거든요.” 오셰어가 언급한 이 무심한 듯 우아한 룩을 입은 여자들은 소매 끝이 정확히 손목뼈 부분에 닿는지 따위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쿨한 애티튜드는 전체적인 룩을 한층 더 패셔너블하게 보이도록 한다. 단순히 멋진 옷을 입거나 매치를 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닌, 입는 사람의 애티튜드가 스타일을 결정짓는 패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물론 실용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커다란 소매 끝을 접거나 묶는 등 어떻게든 처치하지 않으면 질질 끌릴 정도로 긴소매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테니까. 운전이나 화장할 때뿐만 아니라 펜을 집거나 전화를 받을 때, 이메일을 보낼 때, 심지어 친구에게 손을 흔들 때도 불편할 것이다. 피비 파일로는 이런 점을 보완 하기 위해 소매에 심플한 슬릿을 넣기도 한다(밥 먹을 때 음식이 묻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나이프나 포크를 집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테니!).

 

이런 불편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와 패션 피플들이 긴 소매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어떤 옷보다 팔을 길고 가늘어 보이게 해주는 마법 같은 기능성 때문일 것이다. 크고 긴 옷이 선사하는 여리여리해 보이는 핏을 마다할 여자는 없을 터. 또, 옷에 파묻힌 듯한 기분 덕분에 스스로 여성스러움을 만끽할 수도 있다. “오버사이즈 핏을 정말 좋아해요. 커다란 옷을 입으면 무언가 더 보호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입는 사람이 스스로 여성스럽다고 느끼게끔 만들어주는 거죠.” 채프먼도 긴소매 옷이 제공하는 페미닌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스러움이라는 공통된 특성을 가졌지만 긴소매 옷이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무조건 따라 하기보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스스로 편하고 자신감을 얻을 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해봐야 하죠. 이 과정에는 무언가 매력적인 면이 있어요.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스트리트의 멋쟁이들도 모두 이런 면에 매혹된 게 분명 하고요.” 야바리의 말대로 숱한 패션 피플들은 자신만의 리얼웨이 긴소매 룩을 선보이고 있다. 어깨부터 손끝까지 타이트한 니트 톱에 스포티한 팬츠를 매치해 경쾌한 룩을 연출하거나 미니멀한 니트의 길고 넉넉한 소매 끝을 흩날리며 여성미를 뽐내기도 하고, 긴소매 맨투맨을 코트와 함께 입어 감각적인 룩을 연출하기도 한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긴소매 옷을 입은 여자들, 솔직히 정말 쿨해 보이지 않나요? 애써 꾸미지 않아도 너무 매력적이잖아요.” 야바리는 21세기형 버전이 과거 그런지한 긴소매 룩에 비해 퀄리티가 높고 럭셔리하다고 말한다. 또, 십대 소녀들의 불안감의 상징이었던 엄지 구멍도 더는 필수 요소가 아니다. 대신 펄럭거리는 셔츠나 축 늘어진 니트 소매까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며 쿨한 애티튜드까지 장착해, 소녀들은 물론 언니들까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불편함이야 감수할 수 있지 않을까. 쭉쭉 뻗은 듯한 착시 효과를 주는 것은 물론 장신구 하나 없이 우아한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긴소매 옷은 그야말로 올겨울 최고의 액세서리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