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한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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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덜 북적거리는 곳을 찾는 사람들이 선택한 동네는 성수동, 문래동이다. 비싸기만 한 음식점이 줄지어 들어오고 발레파킹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찾아가봤다.

11월의 어느 날 저녁, 낮에만 해도 작업복을 입은 중년 아저씨들이 분주히 왔다갔다하던 성수동에 커다란 검은색 쇼핑백을 들고 가는 20, 30대 젊은이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이 낯선 풍경의 원인은 바로 그날 대림창고에서 열린 H&M과 알렉산더 왕의 컬래버레이션 컬렉션 오프닝 행사였다. 자동차 정비 업체와 구두 공장이 밀집해 있는 성수동이 얼마 전부터 각종 패션 브랜드 관계자들의 러브콜을 받게 된 데에는 대림창고의 역할이 컸다. 몇십 년간 단순히 물건을 쌓아두던 창고로 쓰이 던 공간이 명품 브랜드들의 행사장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매체들은 앞다투어 성수동을 재조명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물론 대림창고 하나만 갖고 성수동을 논할 수는 없다. 화려한 행사는 일주일 내내 열리지 않고 평소의 대림창고는 그저 예전처럼 묵묵히 창고의 기능을 다하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성수동의 진짜 이야기는 300여 개의 공장이 만드는 수제화에서 시작된다. 성동구청은 2012년 지역 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이곳을 수제화 산업 특화 지역으로 지정했다. 오래된 구두 공장과 손님들의 발길이 드문 가게들이 있던 동네는 몇 년간에 걸쳐 새 단장을 마쳤다. 낡고 지저분한 벽은 젊은 아티스트들의 그림으로 채워졌고, 성수역 내부에 작은 전시관을 마련했으며 주말에는 구두 장터인 슈슈마켓을 운영했다. 안타깝게도 지역 활성화 전략의 완성본이 그렇듯 몇몇 벽화는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고 슈슈마켓의 인기는 경리단길 플리마켓에 비교도 안 될 만큼 미미하다. 그럼에도 아직 수제화 타운에 희망이 보이는 것은 ‘From SS’가 있기 때문이다. 2013년에 출시된 수제화 업체 공동 브랜드인 From SS는 구청에 상표를 등록하고 우수한 평가를 받으면 브랜드 사용권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성수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작지만 깔끔한 구두 가게들이 역사 밑에 쭉 이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포털사이트에서 성수역 구두 거리를 검색하면 꼭 나오는 성수동의 실질적 마스코트, ‘부츠 위에 앉은 고양이’ 조형물이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특히 어린이용 사이즈가 나오는 브랜드 숍에 기웃거려야 하는 서러움을 겪어본 적이 있는 작은 발 소유자들은 (비슷한 맥락으로 왕발 소유자들도 포함) 원하는 디자인의 구두를 맞춰 신을 수 있는 이곳의 단골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나 그래도 ‘굳이 왜 거기까지?’라고 되 묻는 사람을 성수동으로 유혹할 수 있는 카드는 숨은 맛집이다. 성수동이 초행이라면 스마트폰 앱에 의지해야 찾아갈 수 있을 우콘카레에서는 5500원으로 홍대 맛집에 버금가는 훌륭한 카레를 맛볼 수 있다. 감각적인 조명 디자인으로 이름을 알린 정강화 교수가 인쇄 공장을 개조해 만든 갤러리형 카페, 자그마치도 한 번쯤 성수동을 찾을 이유가 된다.

왼쪽 | 성수역 외부 벽면을 채운 구두 벽화.오른쪽 | 성수동 From SS 건물 앞에 있는 ‘부츠 위에 앉은 고양이’.

왼쪽 | 성수역 외부 벽면을 채운 구두 벽화.
오른쪽 | 성수동 From SS 건물 앞에 있는 ‘부츠 위에 앉은 고양이’.

문래동 곳곳에 있는 알록달록한 벽화와 문래동을 대표하는 철제 조형물.

문래동 곳곳에 있는 알록달록한 벽화와 문래동을 대표하는 철제 조형물.

성수동 곳곳을 둘러본 후에 낯선 동네 탐방에 조금 더 호기심이 생겼다면 문래동에서 조금 더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테다. 몇십 년 동안 공장과 철공소가 모여 있던 문래동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든 건 10년 전쯤부터다.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귀를 긁는 용접 소리와 멀쩡한 눈코가 따가워지는 먼지로 가득한 이곳과 예술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하지만 90년대부터 이 곳의 철공소들이 서울 곳곳으로 흩어졌고 값싼 월세로 얻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예술가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갔다. 최근에는 철강촌과 예술촌의 독특한 만남을 궁금해한 사진동호회 사람들과 블로거들이 찾아오면서 ‘문래예술촌’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입소문을 타게 됐다. 단, 사전에 철저히 검색을 마치지 않고서는 예술촌은커녕 공장 하나도 제대로 구경 못하고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먼저 문래역 7번 출구로 나와 2분 정도 걷다 보면 문래동에 왔음을 실감하게 하는 각종 철공소들이 보인다. 거기서 멈추지 말고 100m 정도를 더 걸어 ‘카페 수다’라는 카페를 중심으로 움직이면 길을 찾는 데에 드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아낄 수 있다. 그 카페가 위치한 건물 사이로 보이는 좁은 길로 들어가야 철강촌 사이에 위치한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업실이 하나둘 나타난다. 가격 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향초를 살 수 있는 숍부터 물레를 돌리며 그릇을 빚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도예공방, 옆 철강소에서 얻어온 남은 철제를 이용해 무언가를 분주하게 만드는 것 같은 작업실까지, 누구도 찾아오지 않 을 것 같던 좁은 길목에는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독특한 풍경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작은 작업실 사이사이로 식당과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 이곳에 위치한 ‘쉼표말랑’은 문래동 특유의 투박한 분위기를 잃지 않고 차별화 된 가정식 메뉴를 선보이며 최근 먹스타그램 유저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메뉴는 매달 조금씩 달라지는데 예를 들면 북엇국에 감자수 제비를 넣어 만든 요리나 돼지고기 생강조림처럼 톡톡 튀는 음식이 대부분이다. 모든 메뉴가 1만원을 넘지 않는 셰프스 마켓이나 노란 간판이 눈에 띄는 마마라는 인도 음식점도 문래동에 숨어 있는 보물이다. 영화 <프랭크>의 우스꽝스러운 인형 탈 그림이 걸려 있는 우쿨렐레 가게나 이제는 문래동을 대표하는 카페가 된 ‘북카페 치포리’도 괜히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

다만, 포털사이트에 ‘문래동 예술촌’을 검색하고 블로그에 담긴 몇십 장의 사진만 보고 이곳으로 향한다면 헛걸음했다는 생각이 들 가능성이 다분하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낯선 동네를 산책할 여유가 있고 뜻밖에 마주친 가게나 작업실, 벽화나 조형물의 가치를 알아줄 자신이 있다면 문래동에 충분히 만족하고 돌아올 수 있다. 성수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새로운 동네를 찾아 떠난 사람들이 허황된 기대 대신 챙겨야 할 준비물은 낯선 곳으로 향하는 설레는 마음 그리고 처음 마주친 풍경 그 자체를 즐기는 자세일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가득한 사진과 글로만 성수동과 문래동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금물. 다만 그 동네 탐방을 마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이야기는 이것 하나뿐이다. 일단 가보시라고.

육계장부터 문어숙회까지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문래동 ‘방앗간’.

육계장부터 문어숙회까지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문래동 ‘방앗간’.

정갈한 가정식이 가득한 문래동 ‘쉼표말랑’

정갈한 가정식이 가득한 문래동 ‘쉼표말랑’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이채린
포토그래퍼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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