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털어내 올해의 순간들을 우수수 흩뜨려봅니다. 밝거나 어두운, 새롭거나 익숙한, 다양한 색깔의 조각들이 모인 복잡한 콜라주로 2014년은 기억되겠죠.

Books

스트레스를 칠해버려라

<비밀의 정원> <나의 동물원>… 동화 같지만 색칠용 밑그림 책의 제목이다. 사용자가 직접 색을 칠해 넣어 완성하는 이런 컬러링 북이 ‘안티 스트레스’라는 타이틀을 걸고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한때 색칠 ‘공부’라 불렸고 거의 ‘킬링 타임’용으로 취급되던 이런 아이템이 이제는 ‘힐링 타임’으로 위상이 바뀐 셈.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멈추어서 주변을 둘러보라고 말하던 힐링의 시대를 거쳐 이제 아예 글자조차 없는 책이 이 고도의 피로사회를 다독이고 있다.

 

극장에서 읽은 소설
올해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과 만난 소설들, 그리고 각색 과정에서 달라진 것들.

존 그린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조쉬 분의 <안녕, 헤이즐>은 착실하지만 한편으로는 밋밋한 각색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두 주연 배우인 셰일린 우들리와 앤설 엘고트의 매력이 부족한 부분을 메워준다.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준수한 각색이고 좋은 상업 영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텐데, 10대 화자의 조숙하면서도 위트 있는 문장들이 스크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휘발된 건 다소 아쉽다.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

소설을 경제적이고 효과적으로 스크린에 옮겨왔다. 원작자 길리언 플린이 직접 각색을 맡은 덕도 크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도 데이비드 핀처는 이야기 밑에 깔려 있던 뒤틀린 유머를 제대로 부각시켰다.

사쿠라자카 히로시 <엣지 오브 투모로우>

할리우드 제작진은 원작 라이트노벨에서 큰 아이디어만 취한 뒤 디테일은 거의 새로 갈아 끼우는 대대적인 각색 방식을 취했다. 결과는 날렵하고 근사하다. 특히 엔딩은 영화판의 손을 몇 번이라도 들어주고 싶다.

 

Design

 

올해의 건축, DDP

올해의 건축, DDP

 

 

서울의 새 랜드마크

덩치로 보나 이슈로 보나 DDP와 롯데 월드몰은 올해의 건축이었다.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에 대한 논란, 석촌호수 수위 변동과 싱크홀 발생에 대한 우려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건축은 환경이다. 일단 생겨나면,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고 이 두 건물에 대해서도 그랬다.

 

넨도가 밀라노 가구 박람회 기간에 의류 브랜드 코스와 함께 선보인 전시

넨도가 밀라노 가구 박람회 기간에 의류 브랜드 코스와 함께 선보인 전시

 

 

디자인 대세, 넨도

최근 가장 두드러진 행보를 보이는 디자인 회사들의 목록을 꼽았다면, 거기에는 넨도의 이름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일본 출신의 사토 오오키가 이끄는 이 창의적인 브랜드는 가구나 상품 패키지부터, 웹, 영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약 중이다. 과시적이지 않은 아이디어에 무릎을 치게 만드는 위트를 곁들이는 그의 작업은 굵직한 클라이언트들로 하여금 앞다투어 전화를 걸게 만들었다. 이세이 미야케와의 협업인 양배추 의자 (The Cabbage Chair)는 종이를 원통 모양으로 여러겹 겹친 게 전부다.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위쪽에 칼집을 내면 비로소 앉을 만한 자리가 생긴다. 올해 7월 국내에서도 출간된 <넨도 디자인 이야기>는 루이 비통, 스타벅스, 코카콜라, 에르메스 등이 아끼는 디자이너의 비밀을 언뜻 흘린다. 사토 오오키의 철칙은 이렇다. 첫째, 100점짜리 아이디어에 집착하기보다는 70점짜리 아이디어를 많이 내놓아서 고객과 함께 100%를 만들어가라. 둘째, 3배속으로 일하라. 그는 판매와 직결되지 않는다면 디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넨도의 야근은 앞으로도 오래 이어질 듯.

 

애플 워치와 함께 발표된 새로운 아이폰 6

애플 워치와 함께 발표된 새로운 아이폰 6

 

 

스티브 잡스의 빈자리

국내의 수많은 ‘애플덕후’들은 새벽 3시까지 잠들지 못한 지난 9월 10일을 기억할 테다. 아이폰 6와 더불어 애플 워치가 공개되는 순간부터 온라인에서는 찬양과 비판이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싸구려 제품에 사과 마크를 새기자 사람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풍자한 그림은 SNS에서 1백만 개 이상의 ‘좋아요’를 받았고, 국내에서는 잠시 잊고 있었던 삼성 갤럭시 기어의 이야기가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며칠 전, 애플 워치의 국내 출고가가 500만원이 넘을 거라는 소식과 함께 SNS 세상은 다시 한번 전쟁터가 되었다.

 

e.t.c.

 

특정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게 된 잡지 <킨포크>

특정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게 된 잡지 <킨포크>

 

 

킨포크적인 무엇

“신체 일부만 나오게 설정한다, 모델이 카메라를 봐선 안 된다, 몸에 딱 붙는 옷은 입지 말 것…” 믿어지지 않겠지만 ‘킨포크 스타일로 사진 찍기 10계명’이라는 글이 요즘 돌아다닌다. 포틀랜드에서 발행하는 매거진 <킨포크>가 표방하는 자연 친화적이고 커뮤니티 지향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유행하면서, 그것의 본질보다는 표면적인 차원을 흉내 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패션 매거진만 트렌드로 소비되는 것도 아니다.

 

아우디와 블루노트의 협업으로 한국에서 공연한 재즈 뮤지션 재키 테라슨

아우디와 블루노트의 협업으로 한국에서 공연한 재즈 뮤지션 재키 테라슨

 

 

어떤 협업

아우디 코리아는 10주년 행사 초대장을 허비 행콕 <Maiden Voyage> 앨범의 픽처 디스크 LP로 만들고, “아우디 라운지 by 블루노트” 시리즈의 첫 공연으로 재즈 피아니스트 재키 테라슨을 초청했다. 블루노트 레이블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컬래버레이션 한 일은 75년 역사 가운데 처음이었다.

 

위 | 아침 드라마의 클리셰를 패러디한 한방에다린 광고의 한 장면.아래 | 유병재, 장동민이 출연한 양반김 광고의 한 장면

위 | 아침 드라마의 클리셰를 패러디한 한방에다린 광고의 한 장면.

아래 | 유병재, 장동민이 출연한 양반김 광고의 한 장면

 

 

막장도 광고가 되나요?

SNS와 유튜브가 강력한 마케팅 채널로 주목받으면서 기존의 TV에서는 볼 수 없던 광고 캠페인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막장 드라마 패러디와 거침없는 욕설, 19금 개그까지 난무하는 바이럴 영상들은 불량식품 같은 중독적인 즐거움을 준다. 이 분야에서 최근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는 모델이라면 의 작가 겸 연기자인 유병재를 꼽아야 할 것이다. 양반김, 올레 와이브로 하이브리드 에그, 진지발리스, 초록 매실,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 등의 광고는 흥겨운 육두문자를 곁들여 그의 TV 속 이미지를 과격하게 재활용한다. 하지만 올해의 진정한 화제작은 따로 있다. 롯데칠성음료의 생활비법차 브랜드인 한방에다린은 아침 드라마의 클리셰를 흉내낸 바이럴 영상으로 업로드 5일 만에 1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차진 따귀를 주고받으며 분노를 폭발시키는 세 남녀에게 감정을 다스려주는 평온차를 권한다는 내용. 한편 전 젝스키스 멤버인 장수원을 기용한 LG유플러스나 동아제약의 소화제 베나치오는 한국적 불륜 서사의 집대성인 <사랑과 전쟁> 패러디다. 표현의 수위도 수위거니와 예전에는 기획자들이 좀처럼 채택 하지 않던 소재이기도 하다. 드라마에 이어 광고마저도 막장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한방에다린 캠페인에 참여한 대홍기획 소셜마케팅 팀의 전지연 대리는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말한다. “무조건적인 자극보다 제품에 잘 맞아떨어지는 방법론이 더 중요하니까요. 장기적으로 봤을 때 브랜드 가치에 해가 될 만한 시도는 피해야 합니다.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에요.”

 

올해 국내에 상륙한 가렛팝콘

올해 국내에 상륙한 가렛팝콘

 

 

간식 전쟁

올해의 먹방은 ‘디저트’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된다. 비행기에 오르지 않는 이상 그저 인스타그램 속 보기 좋은 떡에 불과했던 가렛팝콘, 피에르에르메, 핫삐 돌체, 레이디엠 등이 국내 매장을 오픈했고 해외 유명 베이커리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디저트 전문점도 하나둘 늘어났다. 특히 이번 여름은 설빙을 필두로 한 망고빙수 전문점들이 빙수 시장의 새로운 무한 경쟁 시대를 알렸다.

 

뒷북을 울려라 :외면받은 수작들 다시 보기

조너선 글레이저의 영화 <언더 더 스킨>

제목이 <언더 더 스킨>이긴 하나 이 영화의 진수는 이면의 메시지보다는 매혹적인 외피에 있는 듯하다.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는 이미지들이 황홀하게 이어진다. 이 서늘한 SF는 한국에서 부당할 정도로 푸대접을 받은 느낌이다. 심지어 스칼렛 요한슨의 누드신까지 등장하는데!

프랑스 애니메이션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수채화 느낌의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의 한국판 포스터를 보는 순간부터 나는 이 영화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영화를 본 이후에는 한동안 인터넷과 앱 스토어를 뒤지며 영화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할 정도였다. 작지만 호기심 많은 어린 생쥐와 때로는 무모하지만 따뜻한 아저씨 곰의 우정이라는 다소 뻔한 주제임에도 끝까지 진심 어린 감동을 선사한다.

로라 음블라의 앨범

영국의 솔 보컬리스트 로라 음블라가 작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을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다시 레코딩해서 내놓았다. 드문 시도지만 첫 트랙 ‘Make Me Lonely’를 들으면 이내 납득할 수밖에 없다.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사운드다.

웹툰 <상상고양이>

올해의 커플상은 대한민국 모든 ‘집사와 냥이’에게 주고 싶다. <상상고양이>는 참으로 복잡미묘한 두 생명체의 관계를 가장 사실적으로 그린 웹툰이다. 작가는 매화 집사와 냥이의 시점을 각각 보여주는데, 웹툰을 보면 볼수록 집사보다는 냥이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