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연말결산 Part.1

W

기억을 털어내 올해의 순간들을 우수수 흩뜨려봅니다. 밝거나 어두운, 새롭거나 익숙한, 다양한 색깔의 조각들이 모인 복잡한 콜라주로 2014년은 기억되겠죠.

Film & Televison

렛잇고 혹은 레리꼬 신드롬

“요즘 팝 시장이 어렵죠?” 올봄 해외 음반사 관계자를 만났을 때 이렇게 묻자 그가 답했다. “<겨울왕국> OST가 저희 음원이에요.” 전폭적 지지를 보낸 한국 어린이들의 발음대로 ‘레리꼬’라고 적어야 할 것 같은 이 노래는 가장 강력한 뮤직비디오를 가진 올해 최대의 디바송으로, 다양한 커버 및 패러디 버전이 유튜브에 넘실대며 히트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제곡이 인기를 얻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놔버려, 사람들이 뭐라건 신경 안 써, 폭풍도 추위도 거슬리지 않아’ 하는 드라마틱한 각성의 장면, 고음을 내지르는 이 곡에서 많은 이들이 희열을 얻은 건 분명하다. 특히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많은 어린이들이.

격정 멜로, 걱정 흥행

무르익은 남자 배우(송승헌과 정우성)와 풋풋한 여배우(임지연과 이솜)의 캐스팅 조합, ‘치정 혹은 격정 멜로’를 표방한 장르, 수위 높은 베드신, 네 글자 두 단어로 이루어진 제목. 각기 상반기와 하반기에 개봉한 두 편의 한국 영화 <인간중독>과 <마담 뺑덕>은 공통점이 많았다. 불행하게도 흥행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결과까지. 멋진 남자 배우가 몸을 아끼지 않은 연기를 펼쳐도, 주 타깃인 여성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기에는 힘이 부쳤다. 치정 혹은 격정과 멜로를 잇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그려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 <그녀>2. <비긴 어게인>3.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1. <그녀>

2. <비긴 어게인>
3.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다양성 영화의 다양화

11월 11일 현재, 존 카니의 <비긴 어게인>은 누적 관객수 342만 명으로 2014년 국내 흥행 순위에서 17위를 기록 중이다. 이른바 다양성 영화로는 역대 최고의 기록이다. 다양성 영화란 예술영화 전용관 상영 기회를 부여받거나 등급 심사 비용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저예산 작품을 뜻한다. 지난 2007년부터 영화진흥위원회가 심사를 거쳐 해당작을 선정하고 있다. 올해의 경우, <비긴 어게인> 외에도 작은 영화들의 선전이 두드려졌던 편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7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웨스 앤더슨의 만만치 않은 티켓 파워를 확인시켰다.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와 실 뱅 쇼메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또한 각각 35만 명과 14만 명이라는 준수한 스코어를 거뒀다. 이렇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아트버스터(아트 무비+블록 버스터)라는 신조어까지 출현했다. 물론 작지만 좋은 영화가 충분한 관심을 받는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 축제 분위기에도 약간의 잡음은 섞인다. 할리우드 기준에서는 ‘소박한’ 규모가 맞지만 사실 <비긴 어게인>은 봉준호의 <설국열차> 이상의 제작비로 완성된 프로젝트다. 이런 작품들이 다양성 영화 시장의 크지 않은 파이마저 가져간다면 국내의 독립영화인들은 더욱 설 자리가 좁아진다는 게 일각의 우려다. 과연 한국 영화계는 모두가 만족할 만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대표적인 극장 프랜 차이즈인 CGV는 최근 CGV아트하우스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기존의 무비꼴라쥬 프로그램을 보다 발전시킨 형태라고 하겠다. 압구정 지점의 3개 전용관 중 한 곳은 한국 독립영화만을 위한 공간으로 운영할 계획이라는데, 생산자와 소비자의 요구를 두루 고려한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양성 영화 시장은 더 다양해져야 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뉴스룸의 방식

11월 11일, 세월호 수중 수색 중단 결정이 발표되었다. 4월 16일 참사로부터 210 일 만의 일이었다. 이 소식을 전한 JTBC 뉴스룸은 말미에 이승열의 ‘기다림’을 선곡했다. 공중파 취재진이 하나 둘씩 팽목항을 떠나도 김관 기자와 서복현 기자는 까맣게 말라가는 얼굴로 현장을 지켰고, 침몰 100일째인 7월 25일에는 손석희 앵커가 진도로 직접 내려가 방송을 진행했다. 정치색이 어떤 시청자건 간에, 뭔가를 제대로 해내는 직업적 성실함을 느끼게 해준 언론이 JTBC 보도국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다.

1. 드라마 <미생>2. 영화 <카트>

1. 드라마 <미생>

2. 영화 <카트>

회사에서 생긴 일

드라마 <미생>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한다. 프로 입단에 실패한 장그래는 한 종합무역상사에 인턴으로 입사하면서 냉정한 현실을 깨닫는다. 두려움과 실망, 그리고 귀한 위로가 수시로 교차하는 신입 사원의 고군분투는 허황한 판타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청자들을 몰입시킨다. 만화가 윤태호의 동명 만화를 각색한 이 케이블 드라마는 이미 최고 시청률 5%를 돌파하며 하반기의 화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한창 연재 중인 최규석의 첫 웹툰 <송곳>은 대형 마트의 과장으로 일하는 군인 출신의 남자가 노조에 가입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좇는다. 노동 문제를 깊고 날카롭게 파헤치는 이 작품은 열혈 독자들을 이끌며 묵직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개봉한 부지영 감독의 <카트> 역시 대형 마트를 무대로 한다. 하루아침에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투쟁을 벌인다는 내용. 하나 같이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세상의 이면에 대한 정직한 발언들이다. 점점 고단해져가는 현실이 픽션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전지현 립스틱’으로 화제가 된 입생로랑 틴트

‘전지현 립스틱’으로 화제가 된 입생로랑 틴트

TV 때문에 떴소 

해를 거듭할수록 TV 속 간접 광고는 힘이 세지고 있다. 백화점 매장뿐 아니라 전세계 면세점 품절 사태를 낳은 별그대 전지현의 ‘입생로랑 틴트 52’는 단연 올해의 아이템이었다. 드라마 속 전지현이 입은 한 코트 제품은 각종 매체가 인터넷 쇼핑에서 액티브X가 일으키는 문제를 보도하는 데에 헤드라인으로 쓰이기도 했다. 한편 값싼 호스텔 방을 찾으러 다닐 때부터 마추픽추에 도착했을 때까지 늘 윤상, 유희열, 이적과 함께였던 ‘셀카봉’은 광고비 ‘0원’으로 전국의 셀카봉 제조업자들이 대박을 터뜨리는 데에 엄청난 공을 세웠다.

<EBS 다큐프라임-데스 3부작>의 내용이 담긴 책 <죽음>

<EBS 다큐프라임-데스 3부작>의 내용이 담긴 책 <죽음>

EBS 다큐프라임- 데스 3부작

아직도 EBS가 고루한 ‘교육방송’이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 요즘 EBS에서 기획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은 두고 두고 소장하고 싶을 만큼 재미있고 훌륭하다. 특히 11월에 첫 회를 선보인 은 EBS 다큐의 진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데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불편한 주제로 여겨지는 ‘죽음’에 대해 쉽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어느 해보다 사건 사고가 많았던 2014년, 죽음은 우리가 꼭 한 번 다시 생각해봐야 할 주제임이 분명하다.

Music

영화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OST

영화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OST

카세트테이프의 재발견

음악 마니아들의 시간은 거꾸로 가나? 바이닐이 나름의 시장을 확보했나 싶더니 언젠가부터 카세트테이프가 새삼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미 작년에 그린데이의 빌리 조 암스트롱은 노라 존스와 함께 에벌리 브라더스의 앨범을 통째로 리메이크하면서, 조이 드샤넬과 엠 워드의 밴드인 쉬앤힘은 3집을 발표하면서 카세트테이프 발매를 시도한 바 있다. 올해 들어서는 가요계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목격됐다. 김광석 탄생 50주년 헌정 앨범과 브라운아이드소울 4집 등이 이 구식의 아날로그 매체로 소개된 것. 그리고 마블의 블록버스터인 <가디 언스 오브 갤럭시>가 있었다. 주인공인 스타로드는 워크맨과 1970~80년대의 히트곡이 담긴 컴필레이션 카세트테이프를 목숨처럼 지니고 다닌다.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OST 앨범까지 높은 판매고를 올리자 아예 관계자들은 극 중에 등장한 것과 똑같은 한정판을 추가 제작하기로 했다. 이 버전은 11월의 레코드스토어데이 기간 중 행사에 참여한 독립 소매상을 통해서만 판매됐다. 또 하나의 복고풍 유행이라고? 지금의 젊은 음악 팬들에게 카세트테이프는 가장 새로운 미디어다.

지금은 힙합 시대

작년 힙합계가 ‘컨트롤 비트 다운받았다’라는 말로 요약되는 디스전으로 떠들썩해진 이후 올해는 <쇼미더머니>가 성공적인 세 번째 시즌을 마무리하며 힙합 열풍을 이어갔다. 특히 이번 시즌 결승에 오른 바비와 아이언의 무대는 한동안 SNS를 뜨겁게 달궜다. 바비가 부른 ‘연결고리’의 도입부인 ‘너와! 나의! 연결! 고리! 이건! 우리! 안의! 소리!’는 수 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1. 재결성 앨범과 함께 돌아온 플라이 투 더 스카이2. 올해 성공적으로 컴백한 god의 콘서트 포스터

1. 재결성 앨범과 함께 돌아온 플라이 투 더 스카이

2. 올해 성공적으로 컴백한 god의 콘서트 포스터

응답하라 오빠들

플라이 투 더 스카이와 지오디, 두 팀이 각각 데뷔 15주년을 기념한 재결성 음반을 내고 리유니온 콘서트를 열었다. 몇 달 걸러 새로운 아이돌들이 나오고 잊혀지는 지금, 15년 만에 다시 모여 공연을 하고 또 그걸 보러 간 팬들이 여전히 같은 색의 풍선을 흔드는 장면이 벌어졌다. 지오디 공연에는 ‘오래오래 함께 가요’라 적힌 화환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발신자는, 1년 먼저 데뷔해서 작년에 15주년 공연을 한 신화였다.

1. 정기고와 소유의 ‘썸’2. 산이와 레이나의 ‘한 여름밤의 꿀’3. 정인과 개리의 ‘사람냄새’4. 윤하와 정준영의 ‘달리 함께’

1. 정기고와 소유의 ‘썸’

2. 산이와 레이나의 ‘한 여름밤의 꿀’

3. 정인과 개리의 ‘사람냄새’

4. 윤하와 정준영의 ‘달리 함께’

함께 해요

정기고와 소유의 ‘썸’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현상이었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2010년대 식 표현인 ‘썸 탄다’는 이 곡 의 성공 이후 젊은 세대만의 속어로 넘기기는 어려울 만큼 널리 알려지게 됐다. 무난하게 귀에 꽂히는 예쁜 멜로디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영리하게 짚은 가사의 시너지는 기대 이상이었다. 두 뮤지션 역시 실력 있는 재야의 아티스트, 혹은 씨스타의 멤버 정도였던 이전의 입지로부터 한 단계 더 올라선 느낌이다. 컬래버레이션이야 이미 음악계에서도 낯설지 않은 방법론이지 만 ‘썸’의 성공은 새삼스러운 자극이 됐을 것이다. 산이와 레이나(‘한여름밤의 꿀’), 효린과 매드클라운(‘견딜 만해’), 개리와 정인(‘사람냄새’), 윤하와 정준영(‘달리 함께’) 등 숱한 남녀 뮤지션들이 로맨틱하게 헤쳐 모였다.

에디터
피쳐 에디터 / 황선우, 정준화, 이채린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