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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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을 뒤흔들어놓을 만큼 파괴력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앤 드묄미스터를 통해서 깨달았다. 32년 동안 끊임없이 시를 짓듯 옷을 만든 그녀는 홀연히 은퇴를 선언했고, 지금 자신을 꼭 닮은 선물 같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1. 관능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2011 F/W 컬렉션.2. 드라마틱한 드레스로 섬세한 감성을 폭발적으로 드러낸 2010 S/S 컬렉션.3. 과감한 가죽 커팅으로 건축적인 룩을 선보인 2012 F/W 컬렉션.

1. 관능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2011 F/W 컬렉션.
2. 드라마틱한 드레스로 섬세한 감성을 폭발적으로 드러낸 2010 S/S 컬렉션.
3. 과감한 가죽 커팅으로 건축적인 룩을 선보인 2012 F/W 컬렉션.

유치한 이야기지만 지난 11월 돌연 은퇴를 선언한 앤 드묄미스터의 소식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생각한 연인에게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받은 것에 버금가는 충격이었다. 그리고 좀 더 일찍 그녀를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도 밀려왔다. 1987년 앤트워프6로 주목받던 시절, 앤 드묄미스터를 알고 향유하기엔 너무 어렸으니까. 결정적으로 그녀가 내 인생에 들어온 건 2007년, 패션에 대한 환상과 설렘으로 가득 찬 패션 꿈나무 시절이었다. 우연히 접한 그녀의 아주 사적인 인터뷰를 읽고서 그녀를 내 인생의 언니이자 멘토로 조심스럽게 임명했다. 물론 지금도 역시 그렇고.

살면서 누군가가 당신과 같은 철학을 갖고 어디선가 살고 있음을 인지하는 그 기묘한 순간의 기분을 느껴보았는지. 그녀에게서 받은 기분은 언제나 내 편이어줄 누군가가 생긴 느낌이었고, 언제나 뒤에서 고요히, 묵묵히 지켜봐주는 사람을 얻은 듯 했다. 그 시절 나를 동하게 했던 대목은 많지만 정리하자면 대략 이렇다. 물론 그녀의 남성적이기도, 여성적이기도 하며, 철학적인 옷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건 그녀가 산책을 좋아하고, 조용하지만 예민하진 않다는 점이다. 그건 음울한 음유시인이라는 닉네임을 무색하게 만들어버 리는 것이었으니까. 시적인 긴장감이 흐르고, 어둠의 기운이 묻어 있는 옷을 만드는 이 여리디여린 여자가 예민함과는 거리가 멀고, 심지어 숲을 좋아한다? 그 독특한 정신세계가 무척 흥미로웠다.

리졸리 북에서 출판하는 앤 드묄미스터의 아카이브 북. 

리졸리 북에서 출판하는 앤 드묄미스터의 아카이브 북.

두 번째로 그녀는 모든 인간은 섬세하고 여성적이며 유약한 면과 남성적인 강인한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상반된 두 요소가 어느 부분에서든 조화를 이루는 순간, 매력이 배가된다고 정의하는 생각에 깊이 동의했다. 그녀에게 완벽히 충성을 맹세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그녀가 정형화된 이미지를 거부하고 늘 무언가의 룰을 깨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래야만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는 얇고 새하얀 코튼에 갈기갈기 조각 낸 가죽을 조합하는 룩과 깃털과 가죽 같은 소재를 절묘하게 믹스하는 디자인에서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그 글을 읽는 순간은 조용한 숲에서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에 맞장구를 치듯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당시 패션을 어떤 잣대로 바라봐야 할지 고민하던 시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흩어져 있던 생각의 조각을 단단하게 엮어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마음을 소중히 간직한 채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지난겨울 그녀의 2014 S/S 룩으로 화보를 찍었는데, 그 옷이 그녀의 손길이 닿은 마지막 컬렉션이었다는 사실은 내겐 충격인 동시에 아쉬움이었다. 한편으로 그녀와 나 사이에 또 하나의 비밀스러운 에피소드가 생겼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운명처럼 그녀의 32년 역사를 한데 묶은 책 발간 소식을 전하고 있다.

더없이 간결하고 깔끔한 책.

더없이 간결하고 깔끔한 책.

1. 1987년-1988년 WWD에서 1987년 여름 앤트워프 6로 불리는 벨기에 디자이너를 대서 특필했다. 당시의 앤 드묄미스터의 룩들.2. 1992년 86년 앤트워프 6로 주목받았던 시절, 런던에서 첫 쇼를 선보인 그녀는 1992년 파리로 넘어가 당컬렉션을 선보였다. 이때부터 깃털은 그녀의 아이코닉한 소재가 되었다.3. 1991년-1992년 90년대 초반 사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인 룩.4. 1997년 그녀의 룩은 패티 스미스의 첫 앨범 ‘호시스’를 연상시킨다.

1. 1987년-1988년 WWD에서 1987년 여름 앤트워프 6로 불리는 벨기에 디자이너를 대서 특필했다. 당시의 앤 드묄미스터의 룩들.

2. 1992년 86년 앤트워프 6로 주목받았던 시절, 런던에서 첫 쇼를 선보인 그녀는 1992년 파리로 넘어가 당컬렉션을 선보였다. 이때부터 깃털은 그녀의 아이코닉한 소재가 되었다.

3. 1991년-1992년 90년대 초반 사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인 룩.

4. 1997년 그녀의 룩은 패티 스미스의 첫 앨범 ‘호시스’를 연상시킨다.

1982년부터 204년까지 자신을 자극시킨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스토리는 총 1천여 장의 이미지로 구성되었다.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심지어 더 현대적이기까지 한 룩을 보고 있으면 그저 감탄을 반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진가이자 남편인 패트릭 로빈이 찍은 80년대 초반의 사진에서는 푸릇한 그녀의 모습과 사진이 주는 감도 높은 퀄리티를 동시에 느낄 수 있고 말이다. 책도 그녀답다. 글이라고는 솔메이트인 패티 스미스가 쓴 감동스러운 서문이 전부. 아무것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마저 그녀가 그토록 전하려 애썼던 앤 드묄미스터다운 무드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1990년 앤 드묄미스터의 남편 패트릭 로빈이 찍은 그녀의 포트레이트 사진.

1990년 앤 드묄미스터의 남편 패트릭 로빈이 찍은 그녀의 포트레이트 사진.

이 원고를 쓰기 전 들은 반가운 소식 하나를 더 전하자면, 그녀가 며칠 전 뉴욕, 런던에서의 책 발간 기념 투어를 마치고 한국, 일본을 거치는 아시아 투어를 결정했는 것이다. 11월 25일, 청담동 10 꼬르소 꼬모에 그녀가 온다. 운명처럼 그녀가 내게 온다. 하지만 또 그녀답게 모든 인터뷰는 사절했고, 오직 자신의 팬들만 만나고 조용히 가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그날 앤 드묄미스터와의 또 한 번의 스토리가 생길 것이다. 그날만큼은 기자로서가 아닌, 어린 시절부터 흠모했던 록스타를 만나는 두근거림을 가지고, 만나러 갈 생각이다. 아주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정이지만, 그날은 꼭 비가 오거나, 짙은 안개가 끼었으면 한다. 그저 지극히 아주 소박한 바람이다.

1. 2000년 패티 스미스와 추상화가 짐 다인과의 협업 작품. 패티 스미스의 시는 수를 놓았고, 짐 다인의 그림은 고스란히 프린팅했다.2. 2008년 상하이에서 남편이 우연히 구입한 중고 레코드 판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컬렉션. 체제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마르생 뒤샹의 생각에 그녀만의 방식대로 존경을 표했다.3. 2009년 앤 드묄미스터의 남성복 쇼의 모델은 바로 멋진 노인이었다. 4. 2014년 검은색 일색이던 그녀의 쇼 중 가장 과감하게 빨간색과 현란한 프린트를 넣었던 마지막 컬렉션.

1. 2000년 패티 스미스와 추상화가 짐 다인과의 협업 작품. 패티 스미스의 시는 수를 놓았고, 짐 다인의 그림은 고스란히 프린팅했다.

2. 2008년 상하이에서 남편이 우연히 구입한 중고 레코드 판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컬렉션. 체제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마르생 뒤샹의 생각에 그녀만의 방식대로 존경을 표했다.

3. 2009년 앤 드묄미스터의 남성복 쇼의 모델은 바로 멋진 노인이었다.

4. 2014년 검은색 일색이던 그녀의 쇼 중 가장 과감하게 빨간색과 현란한 프린트를 넣었던 마지막 컬렉션.

에디터
김신(Kim Shin)
COURTESY
ANN DEMEULEMEESTER, RIZZOLI NEW YORK,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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