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언 플린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나를 찾아줘>가 개봉하고 나면 로자먼드 파이크의 입지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신작 스릴러에서 이 배우는 안전하게 우아한 금발 미녀의 이미지 아래 감춰두고 있었던 어둡고 섬뜩한 얼굴을 드러낼 예정이다.

드레스는 발렌티노, 반지는 반 클리프 & 아펠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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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힘든 상황을 즐기는 편이에요.” 산타모니카의 박스 앤 번(Box’ N Burn) 체육관에서 세계 5위권의 웰터급 여성 권투선수이자 트레이너인 홀리 로손의 도움을 받아 손에 테이핑을 하면서 로자먼드 파이크가 말했다. 몇 달 전의 화창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많은 배우들이 탐낸 <나를 찾아줘(원제 Gone Girl)>의 에이미 던 역할을 맡기면서 데이비드 핀처가 권투를 배우도록 권했다고 했다. 길리언 플린의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이 작품은 결혼 5주년 기념일에 행방이 묘연해진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남편이 그녀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의심하지만 그 내막에는 어두운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예전에는 액션 신을 찍을 때마다 제가 소녀처럼 뛰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죠.” 로손이 35세의 배우에게 주먹 쥐는 법을 시연해 보인다. “이제 준비됐죠?” 그녀가 체육관 구석의 링에 올라선 파이크에게 묻는다. “자, 시작 해요!” 신이 난 듯한 목소리가 유쾌하게 대답을 한다.

 

로손이 다소 어려운 동작을 가르쳐주는 동안 파이크는 다부진 자세를 유지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재미란 투지와 격렬함, 그리고 탁월함을 수반하는 것이다. 20여 분쯤 꽤 힘이 실린 펀치를 날린 뒤 배우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이렇게 말했다. “마치 위험한 팬터마임 같아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로자먼드 파이크는 그레이스 켈리나 티피 헤드런 같은 금발의 클래식 할리우드 스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들이 그랬듯 그녀에게도 우아한 외모는 일종의 위장이다. 이면에 영악함을 감추고 있는 에이미 캐릭터를 소화하는 데는 더없는 조건인 셈이다. 10월 개봉을 앞둔 <나를 찾아 줘>의 시나리오는 원작자 길리언 플린이 직접 각색했는데, 책과는 다소 다른 결말을 취할 거라고 한다(물론 주연 배우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귀띔할 수가 없었다). 로 자먼드 파이크는 행복한 모습부터 사악한 모습까지, 그리고 사랑에 빠진 모습부터 살기를 띤 모습까지, 대단히 변화무쌍한 에이미의 10년간을 묘사한다.

 

“사람들이 로자먼드라는 연기자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좋았어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할리우드 레드 스튜디오에 위치한 <나를 찾아줘>의 로스앤젤레스 세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이트 클럽>부터 <소셜 네트워크>에 이르는 그의 모든 작품이 그랬듯 이 영화의 세트 역시 거의 진짜처럼 보인다. 던 가족의 평범한 주방 찬장에는 실제 음식이 채워져 있고, 에이미의 사무실 역시 제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다. “연기를 하던 중 캐릭터에게 클립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요? 바로 옆을 보면 그게 놓여 있을 거예요.” 파이크의 설명이다. 핀처는 스타를 탄생시키는 캐스팅으로 유명하다. 3년 전, 그는 사실상 무명이었던 루니 마라를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리스베트 살란데르로 변신시키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나탈리 포 트먼과 샤를리즈 테론과 같은 쟁쟁한 스타들이 <나를 찾아줘>에 관심을 보였음에도 그는 그보다 덜 알려진 배우가 에이미 역할을 맡기를 원했다. “저는 영화 속 로자먼드의 모습을 항상 좋아했어요. 그녀를 실제로 알진 못했지만요.” 핀처가 덧붙였다. “그 때문에 더욱 흥미를 느낀 것 같아요.”

 

파이크의 필모그래피에는 꽤나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2000년에 그녀는 생애 첫 오디션을 통해 20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인 <어나더 데이>의 미란다 프로스트 역할을 따냈다. “본드걸로 캐스팅되기 전까지는 007 시리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운동을 마친 배우는 체육관 근처에 자리한 레스토랑에서 터키 버거를 해치우는 중이다. “오디션은 이상한 경험이었어요. 중국에서 막 돌아온 저는 책가방 같은 히피풍 배낭을 메고 있었죠. 그런데 캐스팅 디렉터를 만나기 위해 모여든 다른 늘씬한 여자들은 모두 가죽 옷을 입었더군요. 저요? 무척 두툼하고 털이 북슬북슬한 차림이었어요. 그냥 망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짐작과 달리 로자먼드 파이크를 마음에 들어한 제작진은 다음에는 드레스를 가져오라고 당부했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어머니의 옷장을 뒤졌다. “제가 생각하는 드레스는 오페라 공연 의상에 가까운 것이었어요.” 결국 챙긴 건 할머니가 직접 만든, 커다란 실크 장미로 장식하고 옷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코스튬이었다. “두 번째 오디션에서 그걸 자랑스럽게 꺼내 보였죠. 모두가 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더라고요. 그들은 조심스럽게 제임스 본드 영화의 여자들은 몸에 딱 붙는 드레스를 입는다고 가르쳐줬어요.”

 

순진한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는 아름다운 본드걸 역할에 캐스팅된다(최 종 오디션에서는 스태프들이 적절한 드레스를 빌려줬다고 한다). “그 영화는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서커스처럼 혼란스러운 세계로 절 튕겨내버린 비상 탈출 좌석이었어요.” 파이크가 잠시 그때를 회상한다. “모든 게 어려웠죠. 고작 스물한 살이었는데 실제의 저보다 훨씬 고상해 보여야 했어요. 또한 제가 여성이며 하나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죠. 처음으로 스스로를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봤다고 할까요? 냉정한 현실 세계를 몰랐던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경험일 수밖에 없어요.” 3년 뒤 파이크는 런던에서 연극 <히치콕 블론드>에 출연했는데, 신기하게도 <나를 찾아줘>와 쌍둥이처럼 닮은 이야기였다. <싸이코>에서 재닛 리의 대역을 연기한 배우가 자신의 남편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민다는 내용이다. 로자먼드 파이크는 남자를 유혹하고 속이는 히치콕 영화의 금발이나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같은 역할에 매력을 느낀다. 욕망의 대상으로서 자신이 지닌 힘에 이끌리는 여자들이다. “<히치 콕 블론드>에서 저는 10분 길이의 누드 신을 소화해야 했어요. 하이힐까지 벗은 채 완전한 나체로 무대에 섰죠. 그 연극은 남성의 시선과 기대, 그리고 여성의 권력과 그것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그 여자는 어두운 비밀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받고 싶어 하죠. 에이미만큼이나 복합적인 캐릭터였어요.”

 

지금껏 로자먼드 파이크는 여러 작품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오만과 편견>에서는 자매 중 가장 아름다운 맏이였고, <언 애듀케이션>에서는 세련된 도둑의 근사한 여 자친구였다. 그리고 <잭 리처>에서 톰 크루즈의 상대역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 여 름, <나를 찾아줘>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고지대에서 코미디 를 찍고 있었다. 데이비드 핀처가 일단 스카이프를 통해 대화를 하자고 제안했기 때 문에 이 배우는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는 글래스고 인근의 체육관에 등록해야 했 다. 몇 주간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감독은 촬영 장소 헌팅이 진행 중인 세인트루이 스까지 날아올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제가 대답했죠. 원하신다면 그곳까지 헤엄 쳐서 갈 수도 있다고요.” 그녀가 감자튀김을 하나 입으로 가져간다. “우리는 그곳에 서 이틀간 미팅을 했어요.” 남자답고 겉보기보다 훨씬 영리한 남편인 닉 던 역할을 맡은 벤 애플렉 외에는 캐스팅된 배우가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스코틀랜드로 돌아 온 몇 주 후 파이크는 핀처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그 역할은 당신 거예요.’ 하 지만 실수로 그걸 삭제해버렸다고 한다. “에이미 역할을 따냈다는 유일한 증거는 비 오는 산속에서 팔짝팔짝 뛰는 저를 찍은 휴대전화 사진뿐이에요. 행복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표정이죠.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멋진 캐릭터를 맡게 됐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어요.” 그녀는 여기까지 말한 뒤 잠시 조용해졌다. “전 상당한 노 력파예요. 이번 기회에 저를 과소평가하거나 외모만으로 결론짓던 사람들의 생각 을 바꿔놓고 싶어요.”

 

<나를 찾아줘>의 제작자 중 한 명이자 데이비드 핀처의 오랜 연인인 신 샤핀은 파이 크에게 가족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올 것을 권했다. 감독은 배우의 모습에도 변화를 주고 싶어 했다. 결국 그녀는 앞부분은 부드럽지만 뒷머리에는 섬세하게 층 이 나 있는 도로시 해밀(1970년대의 세계 챔피언이었던 스케이터)풍 단발을 시도했 다. 배역과 마찬가지로 헤어스타일 역시 다소 기만적인 셈이다. 어떤 각도에서는 평 범하게 매력적이지만 다른 쪽에서는 파격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신 샤핀은 저희가 나흘 안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하길 바랐어요.” 재킷을 걸치며 파이크가 이야기했다. “진행이 빨라서 오히려 다행스럽더군요. 패닉에 빠져 있을 여 유가 없었거든요. 감독님께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제 안에 이 인물이 있다는 사 실을 알고 계신다는 걸 알아요.’ ” 그분 앞에서는 엑스레이를 찍는 기분이에요. 다른 사람은 몰랐으면 하는 부분까지도 꿰뚫어보시거든요. 이제는 그의 선택이 옳았다 는 걸 제가 증명해야 해요. 감독님의 생각처럼 제게 어두운 면이 있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