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패션계에 감지되고 있는 흥미로운 코드는 바로 ‘유머’. 패션계에는 패션과 펀의 합성어인 ‘Fashun’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을 정도다. 해피 바이러스에 기꺼이 감염된 패션계는 즐겁고 유쾌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왼쪽부터 OLYMIA LE-TAN, ROKSANDA ILINCIC, JEREMY SCOTT, HENRY HOLLAND, MIU MIU, 

왼쪽부터 OLYMIA LE-TAN, ROKSANDA ILINCIC, JEREMY SCOTT, HENRY HOLLAND, MIU MIU,

 

 

한때 패션계 사람들은 까칠하고 내성적인 부류라는 오해를 받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은색을 숭배했던 그들은 레지스탕스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둠으로 무장했으며, 등을 수그리고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쇼장에 출몰했으니까. 그러곤 킬힐에 밀어넣은 다리를 꼬고 도도하게 앉아 냉랭한 표정으로 런웨이를 응시하다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이러한 일련의 애티튜드와 행위가 세련된 패션 에디터가 갖춰야 할 미덕이라 믿은 탓이다.오죽하면 무신경한 옷차림과 태도를 일컫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Effortless Chic)’라는 표현이 패션계 사람들이 지향하는 슬로건이 되었겠나. 하지만 오늘날의 패션계는 그동안의 심각하고 무거운 패션 신을 비꼬기라도 하듯 유쾌하고 즐거운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유머와 위트로 무장한 긍정적 기운이 샘솟는 패션계에 패션(Fashion)과 펀(Fun)의 합성어인 ‘Fashun’이라는 용어가 신조어로 등장했을 정도다. 이제 패션 피플들은 황홀할 정도로 화려하고 개성 넘치는 옷차림에 젤리곰 클러치나 샤넬 페이크 아이폰 케이스를 매치한 키치한 스타일을 과시하며 길거리 사진가들에게 둘러싸여 플래시 세례를 받는 것을 즐기고, 지퍼라도 단 듯 입을 단단히 걸어 잠근 채 차가운 얼굴로 일관했던 프런트로의 셀렙들은 함박웃음을 머금고 셀피 찍기에 여념이 없다. 실제로 이번 시즌 미우미우 컬렉션에 초대된 할리우드의 신성 루피타 니옹고는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며 옆자리에 앉은 엘리자베스 올슨, 엘르 패닝, 레아 세이두, 마고 로비, 리애나와 함께 쉴 새 없이 휴대폰을 치켜들어 셀피를 찍었는가 하면,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자일스 런웨이에 등장한 모델 카라 델레바인은 캣워크 도중 멈춰 서서 셀피를 촬영하는 익살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간 진지한 자세로 일관했던 모델들 역시 백스테이지에서의 괴짜스럽고 장난기 넘치는 모습을 런웨이에서도 가감 없이 보여주었는데, H&M의 런웨이를 걷던 조단 던은 길거리에서 친구를 마주친 듯 프런트로에 앉아 있던 조안 스몰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가 하이파이브를 나누었고, 정갈하고 단정한 젠틀 우먼을 상징하는 스텔라 매카트니의 피날레에서는 편안한 니트 원피스를 입은 모델들이 즐겁게 춤을 추며 우르르 뛰어 나오기도 했다.

 

1. 쉬림프 페이크 퍼 재킷을 입은 케이트 폴리. 2. 원하는 문구를 넣을 수 있는 에디 파커 클러치. 3. 비스킷 패키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아냐 힌드마치의 미니 백. 4. ‘미니 마트’라고 불리는 팝업 스토어를 오픈한 아냐 힌드마치.

1. 쉬림프 페이크 퍼 재킷을 입은 케이트 폴리. 2. 원하는 문구를 넣을 수 있는 에디 파커 클러치. 3. 비스킷 패키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아냐 힌드마치의 미니 백. 4. ‘미니 마트’라고 불리는 팝업 스토어를 오픈한 아냐 힌드마치.

 

 

5. 사탕 모양의 로고로 장식된 샤넬의 뱅글. 6.  칼 라거펠트를 꼭 닮은 펜디의 칼리토를 들고 포즈를 취한 카라 델레바인. 7. 신나게 춤을 추며 피날레를 장식한 스텔라 매카트니의 모델들.

5. 사탕 모양의 로고로 장식된 샤넬의 뱅글. 6.  칼 라거펠트를 꼭 닮은 펜디의 칼리토를 들고 포즈를 취한 카라 델레바인. 7. 신나게 춤을 추며 피날레를 장식한 스텔라 매카트니의 모델들.

 

 

왼쪽부터 | CHANEL, ASHISH, MOSCHINO

왼쪽부터 | CHANEL, ASHISH, MOSCHINO

 

 

패션계가 내뿜는 해피 바이러스는 콧대 높았던 하이패션 디자이너에게도 전파되었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에 감염된 패션계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물꼬를 튼 이는 모스키노 수장 자리를 꿰찬 패션계의 악동 제레미 스콧. 맥도날드, 허쉬 초콜렛, 하리보 젤리, 치토스 등의 정크푸드와 스폰지밥 같은 키치한 캐릭터를 패러디한 데뷔쇼는 메가 히트를 기록했고, 패스트 패션쇼라는 명성에 걸맞게 쇼가 끝난 직후부터 매장에서 옷을 판매했는데, 모스키노 쇼가 열린 밀라노 패션위크 기간 패션 피플들은 맥도날드의 직원이라도 된 양 모스키노의 맥도날드 티셔츠를 유니폼처럼 입고 다녔을 정도다. 아냐 힌드마치 역시 패스트푸드를 패러디한 쇼로 일명 대박을 쳤는데, 주디 갈런드의 ‘Get Happy’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런웨이에 등장한 캘로그 콘플레이크, 코코팝스 같은 시리얼과 다이제스트 비스킷 패키지를 활용한 귀여운 액세서리들은 쇼윈도에 전시될 틈도 없이 솔드아웃을 기록했다. ‘패션은 행복해지기 위한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는 그녀의 신념은 ‘미니 마트’라고 불리는 아기자기한 형태의 팝업 스토어로 이어졌는데, 이와 같이 슈퍼마켓에서 누릴 수 있는 쇼핑의 즐거움은 이번 시즌 그랑팔레에 펼쳐진 대형 샤넬 쇼핑센터에서 폭발했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 육류를 비롯하여 초콜릿, 캔디 등의 핑거 푸드,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샤넬의 CC 로고로 패키징된 10만여 개의 아이템으로 채운 거대한 마트로 꾸민 런웨이에서 모델들은 카트를 끌고 쇼핑을 하듯 여유롭게 거닐었다. 지금까지의 하이패션이 환상적인 세상의 판타지를 실제로 구현해내는 것이었다면, 칼 라거펠트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시대상에 맞게 럭셔리에 대한 개념을 재정의하고 싶 었다고 밝혔다. 그 결과는? 가장 일상적이고도 친근한 공간인 슈퍼마켓을 배경으로 한 재치 넘치는 쇼에 관객들은 열광했고, 쇼가 끝나자 무대로 돌진해 정신없이 샤넬 마켓을 털기 시작했다(물론 쇼장 출구 에서 가드들이 샤넬 마켓에서 집어 온 모든 물건을 수거해 가긴 했지만!). 패션계에 다크호스로 떠오른 유머 코드는 곳곳에 행복감을 퍼트리고 있는데, 쇼장에 뭉게구름을 두둥실 띄운 마크 제이콥스 쇼에선 제시카 랭의 ‘행복한 날들이 다시 왔네(Happy Days Are Here Again)’가 울려 퍼졌고, 벨기에를 여행하고 돌아온 움베르토&캐롤 듀오의 오프닝 세레모니 쇼장 안에는 따스하고 달콤한 벨기에 초콜릿 이 벽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가하면 펜디 런웨이에는 칼리토라 명명된 칼 라거펠트를 쏙 빼닮은 모피 액세서리가 출현해 눈길을 끌었다. 그뿐이 아니다. 로다테 쇼에는 <스타워즈>의 캐릭터 루크 스카이워커와 C-3PO, R2-D2를 프린트한 드레스가 등장해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모든 패션을 유머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유를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이브 생 로랑의 믿음처럼 이번 시즌 우리가 할 일은 패션 센스와 함께 유머 감각을 갖추는 것이다. 심각하고 어두웠던 패션은 잊고 재미있고 유쾌한 액세서리로 기분 전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행복하고 위트 있는 감성을 회복시켜줄, 이보다 강력한 처방전은 없을 테니까!

 

8. 장난감 같은 키치한 분위기의 디올 슈즈. 9. 그랑팔레를 거대한 쇼핑센터로 둔갑시킨 샤넬 컬렉션. 10. 카툰 패턴으로 짜여진 니트 원피스를 입은 패션 피플. 11. 언제나 컬러풀하고 위트 있는 믹스 매치를 보여주는 수지 버블.

8. 장난감 같은 키치한 분위기의 디올 슈즈. 9. 그랑팔레를 거대한 쇼핑센터로 둔갑시킨 샤넬 컬렉션. 10. 카툰 패턴으로 짜여진 니트 원피스를 입은 패션 피플. 11. 언제나 컬러풀하고 위트 있는 믹스 매치를 보여주는 수지 버블.

 

 

12. 샤넬 향수병을 패러디한 니트 톱을 입은 패션 피플. 13. 입술 프린트의 코트로 이목을 끈 패션 피플의 스타일링. 14. 컬러풀하고 키치한 룩으로 치장한 패션 피플들

12. 샤넬 향수병을 패러디한 니트 톱을 입은 패션 피플. 13. 입술 프린트의 코트로 이목을 끈 패션 피플의 스타일링. 14. 컬러풀하고 키치한 룩으로 치장한 패션 피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