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는 <여인의 향기>보다는 <에반게리온>에 가까운 탱고를 들려준다. 그의 첫 정규 앨범 <Maycgre 1.0>에서 일단 귀를 잡아채는 건 예상치 못한 박진감이다.

<W Korea> 첫 번째 정규 앨범 발매를 앞두고 있다. <Maycgre 1.0(마이크그레 1.0)>이라는 제목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이름을 조합해 완성했다고 들었다.

고상지 대부분의 뮤지션은 사랑이나 인생에 관한 노래를 쓴다. 누구나 관심을 갖는 주제고 그래서 듣는 이들도 쉽게 공감한다. 하지만 나는 연애 상대나 아름다운 풍경보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에서 어떤 감정을 느낄 때가 많다. 약간은 걱정도 된다. 다양한 사람과의 교감이 어려울 수도 있을 듯해서.

 

선공개된 두 곡 중 ‘출격’에서는 특히나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음악 같은 박진감과 호쾌함이 느껴진다. 뮤직비디오 역시 반도네온 형태를 한 머신을 타고 전투에 임하는 파일럿의 계기판 영상처럼 만들어졌다. 어떻게 쓰여진 곡인가?

도쿄를 거쳐 2010년쯤 아르헨티나에 머물며 반도네온을 공부할 때 만들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무척 고풍스러운 도시인지라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막연하게 서울이나 도쿄 같은 대도시를 그리워했다. 그러다 문득 <에반게리온 : 파>의 예고편을 보게 됐는데 그 애니메이션의 팬이 아닌데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무척 우울한 작품인데 그 영상은 희한할 만큼 유쾌하게 느껴졌다. 그 감상을 발전시켜 완성한 곡이다.

 

반도네온은 탱고의 악기다.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아르헨티나의 춤곡이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조합은 아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내 음악은 탱고의 틀을 깬 파격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에서는 <여인의 향기>나 <해피 투게더> 같은 영화들, 그리고 피아솔라의 몇 가지 레퍼토리 정도로 탱고를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본토에서 이 장르는 훨씬 다양하고 넓은 감성을 아우른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탱고의 특정한 사운드를 내 식으로 풀어낸 것뿐이다.

 

탱고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가 있었나?

너무나 유명한 피아솔라의 레퍼토리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리베르탱고’를 처음 접했을 때 RPG 게임의 전투 음악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공통점은 코드 진행에 있다. 가요나 팝에서는 좀처럼 쓰이지 않는 멜로디와 구성이다. 그러니까 나는 애니메이션 음악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뭔가 새로운 탱고를 선보이려는 게 아니다. 애초부터 두 장르 사이에는 미묘한 연결고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선공개된 두 곡 외 새 앨범의 다른 트랙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앞서 발표한 ‘출격’이나 ‘Chivalry’는 한국 사람 들이 익히 알고 있는 탱고의 감성에서 살짝 비껴가는 곡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앨범의 모든 트랙이 그런 건 아니다. 좀 더 편안하고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탱고도 함께 담으려고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애니메이션풍의 선공개 곡이 좀 더 내가 만들고 싶은 음악에 가깝긴 하다. 하지만 나는 아티스트보다는 많이 쓰이는 뮤지션이 되고 싶다. 개성을 죽여가면서까지 남의 취향에 맞출 생각은 없지만 그걸 아예 무시하는 것도 곤란하다고 본다. 듣는 사람과 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

 

국내에는 반도네온 연주자가 드문 편이다. 희소해서 누리는 장점과 생소하기 때문에 겪는 단점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한가?

기타나 건반 등 다른 악기를 먼저 접했는데 내 실력 정도로는 먹고살기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걸 어린 나이에도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정말 잘하는 사람만으로도 이미 시장이 포화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반도네온은 희소성 덕분에 시작하자마자 길이 보였다. 그때는 연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마냥 신기하고 기뻤다.

 

그렇다면 프로페셔널 연주자로서 반도네온을 택하게 된 데는 실용적인 이유가 컸던 건가?

철저히 실용적인 이유였다. 물론 어려움도 많다. 반도네온은 대가의 연주를 직접 볼 기회가 적고 같이 고민할 동료 역시 부족하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음악 작업을 하거나 들려주기에 앞서 ‘탱고는 이런 것이다’부터 설명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출격’의 경우처럼 애니메이션의 전투 장면에서 아이디 어를 얻어 곡을 쓰기도 하고 견자단 영화를 본 뒤에는 짧게 영춘권을 배우기도 했다. 그런 취향 덕분에 탱고의 공격적인 느낌을 특히 예민하게 포착한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부분의 동료 뮤지션들은 어디 가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좋아한다는 이야기 좀 하지 마라고 늘 당부한다. 나는 마니아를 공략하고 싶은 거라고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대답이 이렇다. ‘0.000001퍼센트의 마니아를 위해 나머지 사람을 포기할 셈이야?’ 다른 의견을 들려준 건 딱 두 명뿐이다. 유희열 씨와 이적 씨는 그냥 밀고 나가라는 쪽이다. 이렇게 인지도도 높고 천재적인 대선배님들께서 하신 말씀이니 이번 앨범에서는 그냥 마음 놓고 내 취향을 내세우기로 했다. 잘하고 있는 건지 아직 확신은 안 들지만.

 

첫 독집 앨범이다. 완성한 뒤 나름의 감회가 있었을 듯 하다.

반도네온 연주자로서의 삶에 딱히 자부심을 느껴거나 만족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악기를 통해 음악으로 먹고살 길이 열렸기 때문에 ‘지금껏 힘내줘서 고맙다’ 정도의 감정을 느낀다. 그런데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반도네온보다는 탱고다. 가끔은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가 거슬려서 피아노나 기타만으로 이루어진 곡을 더 자주 듣게 될 때도 있다. 다만 이 악기를 이만큼 공부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곡이 생기긴 했다. 이번 앨범에서 는 반도네온 덕분에 알게 된 편곡이나 작곡적인 아이디 어를 보여주고 싶었다. 반도네온 연주자보다는 탱고 뮤지션의 결과물에 더 가까운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10월 25일에는 첫 단독 콘서트도 계획하고 있다. 페스 티벌 무대에 서거나 다른 뮤지션의 공연에 세션으로 참 여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 느낌인가?

지금껏 자작곡을 공연에서 적극적으로 선보인 적이 없는데 아무래도 이제는 해야 할 시기가 된 듯하다. 나름 걱정이 많다. 레코딩 과정에서도 편곡이나 편성이 까다로웠기 때문에 한정된 예산으로 라이브에서 재현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