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에게 입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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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기에게로 오기 전에도 그들은 이미 별이었다. 그러나 정윤기가 옷을 입혀주자 비로소 그들의 스타일에서도 빛이 나기 시작했다. 스타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인물,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위해 대본을 분석하기도 하지만 스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자주 통화하고 만나며 가까워져야 좋은 스타일이 나옵니다. 물론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죠.”

“인물,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위해 대본을 분석하기도 하지만 스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자주 통화하고 만나며 가까워져야 좋은 스타일이 나옵니다. 물론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죠.”

스타일리스트 정윤기의 명함은 한번 받으면 절대 잊을 수 없게 생겼다. “체격이 크니까, 뭐라도 작았으면 해서요.” 보통 명함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작은 사이즈만큼 인상적인 건, 종이 위에 촘촘하게 박힌 8개의 금색 별이다. 그가 별 마크를 자신의 시그너처로 삼은 건 20년도 더 된 일이다. “필립 플레인이나 에디 슬리먼 같은 디자이너들이 별무늬를 즐겨 쓰기 한참 전부터 별이라는 상징이 근사하고 위대해 보였어요.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일링을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명함 디자인에 별을 넣었죠.” 하필 8개인 이유는, 88올림픽 때부터 8이라는 숫자가 그에게 우연한 행운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여덟개의 별이 이끈 운명이었는지 우연한 행운이었는지, 지금 그는 굵직한 스타들과 함께 일하는 데다 8을 유독 좋아하는 중국과의 인연 또한 신뢰를 바탕으로 견실해지고 있다.
얼마 전의 백상예술대상에서 정윤기의 이름은 여러 차례 호명되었다. 상을 받은 전지현과 김희애가 수상 소감에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감사의 뜻을 표한 것이다. 물론 그가 골라준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하지원과 윤아, 고소영과 김혜수, 정우성, 이정재, 차승원 등 많은 스타들이 정윤기를 파트너로 선택해, 그가 스타일링한 옷차림을 드라마 속이나 레드 카펫에서 보여줬다.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가 살아 숨 쉬는 캐릭터가 된 건 배우의 연기 덕분이었지만 천송이가 입고 나온 의상과 소품은 그 인물에 구체성을 보태는 일을 했다. 여러 겹의 파장으로 번져가고 있는 한류의 물결 가운데 패션과 스타일의 한 흐름은 분명 정윤기로부터 나온다. 별들의 뒤에서, 조금 작은 존재로 함께 일하며 스스로를 각인시키는 사람으로서 정윤기의 포지션은 마치 그의 명함으로 형상화된 듯하다.

톱스타들과 오래 함께 일해온 비결을 묻자 정윤기는 사람을 진실성 있게 대하고 일은 성실하게 준비하는 태도라고 답했다 .

톱스타들과 오래 함께 일해온 비결을 묻자 정윤기는 사람을 진실성 있게 대하고 일은 성실하게 준비하는 태도라고 답했다 .

행운의 8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88년에는 뭘 하고 지냈나?
옷을 좋아하는 고등학생이었다. 80년대에는 대중문화가 꽃을 피웠는데 청춘 영화가 유독 많았다. 박중훈과 강수연이 나온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같은 영화를 보면 진이 크게 유행했던 걸 알 수 있다. 일부러 빈티지하게 리폼해서 입곤 했다. 그리고 옷만큼이나 음악을 좋아했다. 가요 공개방송 프로그램 녹화를 많이 쫓아다녔는데, 그때 처음 만난 사람이 당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이덕화 씨와 함께 MC를 본 김희애 씨다. 팬들이 너무 몰려서 다투다가 겨우 두 번째 시도에서 사인을 받는 데 성공했다. 이후 드라마 <아내>에서 다시 만나 일하면서 김희애 씨가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나 역시 지금까지 신기하다.

팬과 연예인으로 처음 만났다가 지금은 같이 일하고 있다는 스토리를 반갑게 여길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요즘은 스타를 좋아하는 만큼 스타를 만드는 산업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큰 에너지다. 나 또한 처음엔 팬심으로 스타일링하다가 이렇게 많은 작업을 하게 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대한민국을 넘어서 아시아권에서 스타가 된 게 뿌듯하다. 함께 일해온 스타들이 워낙 쟁쟁하다. 일하면서 발견한 그들의 진면모에 대해 언급해준다면? 김희애는 말 한마디를 건네도 따뜻하게 한다. 현명한 여자, 지혜로운 사람이다. 예의 바르면서 철저히 프로페셔널한 여배우, 전지현. 그리고 연기에 대해 진지해서 배우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하지원. 시대의 아이콘 고소영, 영원한 젠틀맨인 장동건은 새로운 틀을 만들어줬다. 그리고 20년지기 친구 같은 차승원, 끊임없이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멋진 남자 이정재와 정우성. ‘플러스 유’와 다양한 레드 카펫 룩으로 변신한 김혜수의 유연함…. 요즘은 어린 스타들과 이야기하고 친해지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최시원, 임슬옹, 동해, 소녀시대 윤아, 제시카, 티파니, 헨리, 운동선수 박태환, 손연재. 이런 어린 친구들이 발전하려는 모습,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걸 보면서 자극을 받는다.

이런 톱스타들과 오랫동안 파트너십을 유지한 비결은 뭘까?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게 스타들과 일할 때의 내 생각이다. 일하는 동안 언제나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실성 있게 대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눈보라가 쳐도 철저하게, 오래 일찍 준비하는데 이런 걸 싫어하는 클라이언트는 없다. 최대한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고 맞춰주려 노력하지만 일방적으로 심부름꾼 같은 역할은 하지 않는다. 끝까지 대화하고 끝없이 타협하면서도 전문가적 관점을 놓치지 않는 게, 스타와 스타일리스트의 관계여야 한다고 본다. 그들 대신 싸워줘야 하다 보니 욕도 많이 먹고. 물론 투자도 많이 한다. 소품비는 아끼지 않으며 신발 같은 걸 배우들에 맞게끔 준비하는데 이런 부분을 신뢰하는 것 같다. 베스트 워스트 룩은 한 끝 차이로 결정된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스타들은 고민없이 내가 가져온 옷을 믿어줘서, 고마움을 느낀다.

스타와 스타일리스트는 개인적으로도 친밀한 경우가 많다.
인물,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위해 대본을 분석하기도 하지만, 스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자주 통화하고 만나며 가까워져야 좋은 스타일링이 나온다. 하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김희애씨는 친해지는 데 5년 걸렸고, 고소영 씨도 마찬가지다. 김혜수 씨, 정우성 씨와는 아직 서로 존칭을 쓴다.

클라이언트와 인간적으로도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스스로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는다. 오래 일한 선배 같아도 막상 만나보면 속이 다 보이는 사람이다. 눈물도 많고 솔직해서,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그렇다. 간혹 편애한다고 욕을 먹기도 하지만 뭐든지 좋다는 건 거짓말일 것 같다. 대신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더 열심히 한다. 그리고 내가 철이 없는 편이다. 여전히 미키마우스, 스누피 같은 캐릭터를 좋아하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즐긴다. 이렇게 어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옷을 입힐 수 있는 것 같다. 20대 초중반 스타들과 코드가 더 잘 맞기도 한다. 실장님 선생님 대표님 하다가 호칭이 형으로 금세 바뀌곤 한다. 언젠가 철이 들게 되면 이 일을 그만둘 것 같기도 하다.

“할리우드 스타들은 이름만 호명해도 떠오르는 인상적인 사진들이 있잖아요. 우리 셀렙들도 어떤 시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가 있으면 좋겠어요.”

“할리우드 스타들은 이름만 호명해도 떠오르는 인상적인 사진들이 있잖아요. 우리 셀렙들도 어떤 시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가 있으면 좋겠어요.”

일하면서 괴롭고 힘든 점도 있을 것이다.
몇몇 스타들에게 상처받은 적도 있다. 각자의 색깔이 다르다고 생각해서 스타일링해도, 다른 배우를 더 신경 써준다고 생각하며 예민하게 반응할 때 그렇다. 본인이 셀프 코디를 했는데 워스트 드레서로 뽑히자, 왜 말리지 않았느냐는 원망도 한다. 잘 드러내진 않지만 사실 내가 울보다. 인터넷 댓글로 인신공격을 당할 때마다 직업에 회의를 느낀다. 특히 외모에 대한 인신공격 같은 걸 당할 때면 가슴 한쪽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악플은 사람을 물리적이 아닌 정신적으로 구타하는 행위 같다. 그만큼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기운을 얻기도 하지만. 낯가림이 점점 심해진다, 요즘.

시상식이 한 번 있고 나면 바로 베스트/워스트 드레서에 대한 품평이 올라온다. 베스트 룩으로 자주 언급되는 편이지만 간혹 워스트로 꼽힐 때의 좌절감은 어떤가?
속상한 한편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객관적인 눈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계기가 된다.

드라마나 레드 카펫, 그리고 가수 스타일링은 어떻게 다른가?
최근에 헨리, 은혁, 비스트 등 뮤지션과 작업을 했다. 가수 스타일링은 무대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어서 어려우면서도 재밌다. 가수와의 스타일링이 단시간에 쏟아부어야 하는 백미터 달리기라면 배우와 드라마를 하는 건 오래달리기다. 쉬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이달 더블유와의 화보에서 하지원과 윤아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우선 지원 씨는 황후로서의 기품을 콘셉트로 해 럭셔리하고 모던하게 풀었다. 윤아는 늘 예쁜 소녀지만 이번에는 시크하고 매스큘린한 멋을 보여주려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배우들의 이미지를 오래 간직할 만한 화보 사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마릴린 먼로, 제임스 딘 이런 할리우드 스타들은 이름만 호명해도 떠오르는 인상적인 사진들이 있지 않나. 우리 셀렙들도 그렇게 각인되는 이미지, 그 스타의 어떤 시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가 있으면 좋겠다.

아시아권에서 한국 드라마의 인기, 한류 스타들의 힘이 커지면서 당신도 영향력이 커진 경험을 할 것 같다.
홍콩이나 중국, 대만에 가면 현지 팬들이 스타들만 보는 게 아니라 패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킹을 좋아하면서 킹메이커에 대한 관심도 커진다고 할까. 중국에서도 일이 들어온다. 대한민국 브랜드를 알려야겠다는 책임감도 느껴서, 기왕이면 질이 좋은 우리나라 제품들로 스타일링하는 편이다. <별에서 온 그대>에서도 디디에두보 주얼리나 루즈&라운지 백을 등장시켰고, 한국 브랜드를 알릴 수 있어 뿌듯했다. <신사의 품격> 때 장동건, <최고의 사랑>에서 차승원에게는 우영미 선생님의 옷을 많이 입혔다. 앞으로도 대한민국 브랜드의 위상이 높이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스타일링의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나?
패션 에디터들처럼 매 시즌 컬렉션에 간다. 요즘은 스트리트 스타일이 가장 영감을 준다. 평범한 사람들의 옷 입는 방식이 재미있다. 그리고 만화영화를 좋아해서 의상을 눈여겨보는데 그 속에 퓨처리즘이 있고 영감의 소재가 있다. 지방시 같은 브랜드에서 밤비 캐릭터를 사용한 것도 그렇게 내 감성과 닿아서 캐치를 했다.

당신만의 스타일링 원칙이 있다면?

어떤 기준이 서려면 많이 경험해야 한다. 많이 보고 느끼고, 그런 다음 새로운 시도를 했을 때 변화가 있다. 요즘 스타일링 강의를 다니며 늘 이야기하는 점은 베이식한 아이템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밀회>에서 김희애의 셔츠 코디네이션도 그렇게 나온 것이다. 또, 이유있는 사치를 했으면 좋겠다. 오래 두고 쓸 수 있는 건 제값을 투자해 좋은 것으로 구매하고, 가벼운 티셔츠 같은 건 시장이나 스파 브랜드를 섞는다. 특히 신발은 정말 중요하다. 네이비, 그레이, 화이트, 블랙 4가지 컬러만 코디네이션하면 실패할 확률이 적다.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열정이 남아 있을 때 일에 다 쏟아부은 이후에는 고깃집 하고 싶다(웃음). 먹는 것에 관심이 많다.

지금 당신과 함께 일하는 스타들이 안 놔주지 않을까?
10년 정도는 더 해야겠지?(웃음) 한국 패션 셀레브리티들을 알리는 조력자 역할, 국내 브랜드를 알리는 홍보 역할은 충분히 더 하고 싶다

에디터
황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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