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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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시장은 음악의 순위 다툼인 것만큼이나 이미지 경쟁의 장이기도 하다. SM엔터테인먼트의 비주얼&아트 디렉터인 민희진은 지금의 업계에서 비주얼 전략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가장 정확한 답을 줄 수 있는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픽 디자인뿐만 아니라 이제는 사진으로까지 활동 영역을 넓힌 멀티플레이어가 미공개 B컷들을 건네며 창작자로서 품고 있던 생각들을 밝혔다.

SM엔터테인먼트의 비주얼&아트 디렉터 민희진. f(x)의 크리스탈이 찍어서 선물한 사진이다.

SM엔터테인먼트의 비주얼&아트 디렉터 민희진. f(x)의 크리스탈이 찍어서 선물한 사진이다.

장르 아닌 장르인 K팝은 귀보다 눈으로 먼저 경험하게 되는 음악이다. 음원 공개 전, 티저 사진과 영상으로 다가올 무대에 대한 힌트를 흘리는 건 이미 한국 음반 시장에서는 당연해진 공식이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든 대중음악은 듣는 것만큼 보는 게 중요한 엔터테인먼트였다. 하지만 지금의 K 팝은 그중에서도 유난한 사례처럼 느껴진다. 비주얼에 대한 투자가 상당하 고 그 활용 방식 또한 적극적이며 공격적이다. 당대의 트렌디한 사운드를 엇비슷하게 공유하는 아이돌 밴드의 정체성은 곡보다는 각각의 이미지 전략을 통해 완성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러 기획사 중에서도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는 음악을 ‘보여주는’ 데 특히 앞선 행보를 보여왔다. 영화 홍보전처럼 티저 예고를 제작하고, 음반 디자인에 정교한 이야기를 담는 시도를 처음 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SM의 비주얼&아트 디렉터인 민희진은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며 일련의 과정에 남다른 청사진을 제시해온 인물이다. 앨범 디자인은 물론이고 스타일링과 메이크업, 무대 연출, 뮤직 비디오 등 아티스트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모든 과정이 그의 꼼꼼한 조율을 거친다. 그 결과물들은 안전하게 예쁘장하지만은 않아서 더욱 시선을 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도발적이고 난해하기까지 한 취향은 K팝 신에 흥미로운 균열을 일으켰다. f(x)의 정규 3집인 <Red Light>는 최근의 대표적인 예다. 한쪽 눈에만 진한 화장을 한 채 몽롱하게 서성대는 소녀들의 모습에는 피터 위어의 <행잉록에서의 소풍>을 연상시키는 불편한 아름다움이 있다. <Red Light>와 막 공개된 샤이니 태민의 첫 번째 솔로 앨범인 <Ace>는 민희진이 직접 사진가로 나선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탈락한 B컷들을 더블유 지면에 공개하기로 했다. “일정이 빠듯해서 다른 누군가를 섭외할 겨를이 없더라고요.” 얼버무리는 말꼬리를 붙잡고 새로운 작업으로부터 얻은 자극과 한류의 중심에 선 연예 기획사의 비주얼&아트 디렉터로서 맡은 역할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청해봤다. 한국 대중음악 산업의 지금을 읽는 데 이 멀티플레이어의 대답이 중요한 단서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로 프로젝트인 <Ace>를 발표한 샤이니의 태민. 공식 티저 이미지 중 마지막 순간에 탈락한 B컷들이다.

솔로 프로젝트인 <Ace>를 발표한 샤이니의 태민. 공식 티저 이미지 중 마지막 순간에 탈락한 B컷들이다.

f(x)의 정규 3집과 태민의 솔로 앨범 디자인을 하며 연달아 직접 카메라를 잡았다.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었나?
민희진 최근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내 머릿속의 콘셉트를 다른 작업자에게 정확히 전달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사진까지 찍게 됐다고 답했다. 맞는 말인데 또 그게 전부는 아니다. 디자인을 할수록 이상하게 뭔가를 자꾸 빼게 된다. 경력이 쌓이면 건축가들이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까? 정수만 남기고 싶은 욕심이 들고 가끔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정말 멋있는 디자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한 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것만으로 완성품이 되는 디자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그런 이유로 찍게 됐다. 나는 사진가가 되고 싶은게 아니다. 넓은 의미의 그래픽 디자인으로서 사진에 접근했을 뿐이다.

그전에도 개인적으로 사진을 꾸준히 찍어온 건가?
f(x)의 <피노키오> 앨범 때 약간의 경험을 해봤고 지금도 개인적으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긴 하다. 작업이 꾸준했다기보다 관심과 흥미를 늘 유지하고 있는 정도다.

그렇다면 앨범을 위한 촬영을 하며 기술적인 부분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일부러 툴을 배우는 성격은 아니다. 사진 작업도 비슷했다. 그동안 디렉터로서 현장을 경험하며 나름대로 수학했다고 생각한다. 상황 연출, 포즈 디렉션뿐 아니라 스타일링을 생각에 맞게 바꾸고 앵글을 주도 했으며 사진의 톤을 의논하고 촬영 당시 컷의 분위기를 끌어낼 만한 음악 선곡까지 맡았다. 디렉터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고, 그 과정을 통해 충분한 단련이 됐다고 생각한다. 기술적인 부분을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걸 저지르는 데 두려움이 없는 편인가 보다.
없다. 기본적인 조작법만 숙지하고 시작했다. 카메라도 사람이 만든 기계인데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그림을 그려서 빛에 대한 이해는 있으니 조명을 조절해가며 그 순간에 맞는 느낌을 찾으려고 했다. 사진을 대하는 방식이나 생각이 사진가들과는 다를지도 모르겠다. 메커니즘은 잘 모르지만 새로운 사진을 찍고 싶었다. 어떤 면에서는 모르는 데서 시작하는 게 더 유리하다는 생각도 했 다. 어차피 내 목적은 기술적으로 완벽한 포트레이트가 아니라 미묘한 정서의 표현이다. 앨범 커버용 사진은 그래야 한다고 본다. 즐거운 경험이었다. 사전에 계산은 했지만 찍다 보니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그 매력을 알게 됐다. 원래 남한테 묻어가기보다는 모르는 데서 공식을 찾아가는 쪽을 선호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뻔한 이미지가 싫다.

확실히 이번 사진들이 보여주는 태민은 샤이니의 멤버 태민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런가? 내가 줄곧 보고 그려온 태민은 이런 이미지다. 지난 앨범들 속 태민의 이미지를 찬찬히 보다 보면 이런 뉘앙스가 느껴질 거다. 첫 솔로 음반이니까 뭔가 더하지 않은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과한 설정을 피한 채 섬세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상황 연출에 특히 신경을 썼다.

본인이 알던 태민을 더욱 강조하고 부각시킨 이미지일 수 도 있겠다.
피사체 본연의 강렬함에 보는 이들이 예쁜 꿈을 꿀 수 있는 이미지를 더하려고 했다. 누구든 보는 순간 머릿속이 파스텔 빛이 되는. 그 느낌을 찾는 순간 여자들의 머릿속에서는 각자 자기만의 상상이 피어난다.

기존의 아이돌 앨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과감한 디자인을 종종 시도해왔다. 메이저 기획사의 뮤지션을 난해한 비주얼과 충돌시키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시너지가 발생한 것 같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과 비슷한 작업을 했다면 그 정도로 재미있게 느껴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입사할 때 계산 아닌 계산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래전부터 제 3세계 뮤지션의 음악을 즐겨 들어왔다.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이 조직에서 효과적인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회사가 내 아이디어를 받아들여줘야 한다는 현실적인 전제가 충족되어야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찾기 힘들어 외로움도 많았고, 그 부분에 있어 어느 정도 포기도 하고 나름대로 단련을 해온 편이다. 그래서 개인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별다른 편견 없이 지금의 회사에 입사한 것일 수도 있다. 뭐든 의외의 조합이 더 재미있는 법이다.

f(x) 멤버인 설리의 낯선 모습을 포착한 컷들.

f(x) 멤버인 설리의 낯선 모습을 포착한 컷들.

f(x)의 정규 3집 <Red Light>를 위해 촬영한 크리스탈의 이미지.

f(x)의 정규 3집 <Red Light>를 위해 촬영한 크리스탈의 이미지.

처음으로 비주얼 콘셉트를 제안하고 구체화한 프로젝트는 어떤 것이었나?
당시 전체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소녀시대 의 ‘다시 만난 세계’에 관해 구체적인 제안을 하면서 업무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가수들을 예쁘게만 꾸며서 보여주는 데 그치는 팀이 많았다. 그런 방식은 영 지루하게 느껴졌다. 소녀시대의 경우, 삭막한 연예계에서 단연 돋보일 수 있는 건강하고 청량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싶었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좋아할 만한 깨끗한 느낌이라고 할까. 앨범 커버 역시 그런 이미지가 잘 구현되도 록 개성 강한 자매들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이야기인 <작은 아씨들>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구차하게 스토리텔링을 고민하지는 않았다. 보여주려는 것만 명확하면 스토리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니까 억지로 만들 필요가 없다. 그 이후에는 보는 이들의 상상에 맡기는 거다. 그런 게 진짜 콘셉트라고 생각한다.

샤이니와 f(x)의 앨범이나 티저 이미지 작업에서는 특히 과감한 시도가 많았다.
멤버들에게 단편적인 이미지를 주입하기보다는 결성 초기부터 나름의 정체성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팀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초반에 많은 설명을 하고 이야기도 나눴다. 몇 년 전 어느 촬영장에서 태민이 불쑥 그런 말을 했다. 예전에 내가 왜 그렇게 많은 걸 보여주려고 했는지 그 의도가 지금은 이해된다고. 순간 찡한 마음이 들었다. 음악 산업에서는 늘 ‘넥스트 제너레이션’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 좋거나 거창한 걸 찾는다기보다 이전과 ‘다르게’ 새로운 걸 찾을 뿐이다. 샤이니와 f(x)의 비주얼 역시 그 결과였다.

그렇다면 SM의 가장 새로운 세대를 위한 구상은 무엇이었나? 예를 들어 EXO는 다른 팀들과 어떻게 다른 접근을 했는지 궁금하다.
뮤지션의 성격,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음반 작업에 있어 심벌 하나를 정해 로고워크를 하는 작업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 팀에는 그게 필요하다고 봤다. EXO의 기본 콘셉트, 즉 미지의 행성에서 온 초능력자는 재미있는 설정이지만 여러 정황을 계산했을 때, 내게는 현실적으로 까다로울 수 있는 숙제였다. 그래서 콘셉트를 명확히 구현한 심벌을 만들어서 이야기를 정리하고 설득력도 실어주는 해결안을 떠올렸다. 특히나 이 심벌을 일정하게 반복하기보다 다양하게 응용하면 그 이야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으리란 계산이 있었다. 결과물을 보면 그 자체로 엑소 멤버와 행성을 상징하는 운석의 모양이고 타이포그래피까지 들어간다. 이 이상의 대안은 없다고 봤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특히 지향하거나 혹은 피하게 되는 바가 있을까?
요즘은 디자인으로 브랜딩을 하려는 시도가 자주 눈에 띈다. 의도는 합당하나 표현에 있어 그 방식이 지나칠 정도로 시스템화된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디자인은 늘 아트와 비즈니스의 경계에서 춤을 춘다. 치밀함과 느슨함 사이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구멍 없이 꽉 채워진 작업은 오히려 매력이 덜하다. 자연스러운 게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늘 숨구멍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브랜딩이란 철학과 목적을 자연스럽게 반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해진 알고리즘을 적용하는 대신 다소 추상적인 접근을 하는 편이다. 맹목적인 공식을 따르기보다는 작업 하나하나가 변화무쌍하면서도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를 가졌으면 한다. 뮤지션의 콘셉트나 음반 디자인에서도 추상적으로 표현한 이미지를 나열해가면 새롭고도 재미있는 브랜딩 작업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올해 IF 디자인 어워드와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앨범 디자인으로 연달아 수상을 하기도 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도 격려가 되는 소식 아니었을까?
음반의 경우, 어찌 됐든 음악이 먼저고 디자인은 그다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경쟁을 붙여 상을 주고받는다는 게 내 기준에는 다소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음반 디자인은 제아무리 조악한 것이라 해도 음악을 들을 당시의 정서와 추억이 포개지면 느낌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난 어릴 때부터 예쁘지 않은 물건에는 돈을 못 썼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영화 <라 붐>에 반해서 OST를 구입하기 위해 음반 가게에 들른 적이 있다. 그런데 앨범 커버가 영 아니었기 때문에 구매를 포기하고 돌아온 기억이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OST의 경우, 전곡이 마음에 들어서 어쩔 수 없이 장만했지만 디자인은 도대체가 눈에 차질 않았다. 그런데 그 음악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났더니 추억에 필터링이 된 탓인지 그 커버가 다르게 보이는 거다. 이후 더 세련되게 리디자인된 음반을 봤지만 중학생 때 산 내 ‘안 예쁜’ 앨범과 바꿀 수는 없었다. 조악함마저 애틋해졌다고 할까?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음반 디자인이 갖는 태생적 특징은 가끔 이렇게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아무튼 수상은 감사한 일이지만 도취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한국 음악 산업에 있어 디자인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그 의미가 더 크다. 대단한 마스터피스를 만들기보다는 재미있는 움직임을 일으키고 싶었다. 특히나 음반 디자인에 있어 왕도는 없다고 생각하니까. 수상 자체보다 이런 움직임에 대한 노력과 열정이 알려지는게 더 기쁘다.

한국 음악 산업에서 비주얼 디렉팅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로 커졌다고 생각하나?
중요한 걸 이야기하는 자체가 구차하게 느껴질 정도로 중요해졌다. 아예 당연한 과정이 되었다고 할까? 그 부분을 깊게 고민하지 않으면 비집고 들어서기가 힘들게 됐으니까.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포토그래퍼
민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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