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비단 올림픽에서 울리는 애국가뿐일까? 세계 무대의 중심에서 형형히 빛나는 K-모델 역시 우리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드높이는 존재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이들의 승전보는 K-패션의 세계화를 완성하는 퍼즐 조각임에 틀림없다.

 


Hye Park

“중간에 2년간 쉬었는데 갑자기 발맹과 이자벨 마랑에서 저를 캐스팅한 거예요. 두 쇼 모두 동양인 모델이 런웨이에 오른 건 제가 처음이었죠. 그렇게 컴백을 하고 나니 일이 재미있더라고요. ‛내가 미쳤었구나! 이 재미있는 걸 왜 안 하려고 했지?’했다니까요.”

격자무늬 터틀넥과 폭이 넓은 팬츠, 벨트, 가죽 장갑, 모자는 모두 Tod’s 제품.

격자무늬 터틀넥과 폭이 넓은 팬츠, 벨트, 가죽 장갑, 모자는 모두 Tod’s 제품. 

W Korea 최근 미국에서 바나나 리퍼블릭과 뷰티 제품 등의 광고 캠페인을 찍었고 미국에 본거지를 두는데 한국 활동을 병행하는 이유가 있나요?
혜박 오래전부터 오고 싶었어요. 특히 서울 컬렉션에 서보고 싶은데 4대 도시 패션위크 끝나면 바로 화보나 광고 촬영 스케줄이 잡혀서 올 수가 없었죠. 최근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방송 활동도 꽤 재미있었어요. 무엇보다 한국 사람들과 일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요.

혜박 씨는 한국계 모델로 세계 무대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잖아요. 특히 2006~2008년은 눈부신 활약을 보였는데 갑자기 활동을 중단했던 걸로 기억해요. 다시 돌아온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2008년부터 2년 정도 쉬었어요. 그땐 뭘 해도 재미있지도 않고, 내가 마치 기계처럼 느껴졌어요. 무엇보다 집을 떠나 항상 어딘가로 가는 게 힘들었거든요. 그렇게 쉬면서 모델 일을 안 하게 되는 줄 알았죠. 그런데 파리 <보그>의 편집장인 에마뉘엘 알트의 추천으로 발맹과 이자벨 마랑에서 저를 익스클루시브로 캐스팅한 거예요. 두 쇼 모두 동양인 모델이 런웨이에 오른 건 처음이었죠. 그렇게 컴백을 하고 나니 일이 재미있더라고요. “내가 미쳤었구나! 이 재미있는 걸 왜 안 하려고 했지? ” 했다니까요.

패션계는 인맥이 중요하잖아요. 인맥이 곧 성공으로 이어지고요. 인맥을 쌓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솔직히 그 점에 대해선 무척 부족한 편이에요. 저랑 함께 활동한 혜진 언니랑 코리아 타운에서 술 마시는 게 더 즐거웠죠. 부커들이 파티장에 좀 가라고 해도 졸려서 안 간다고 했어요. 저랑 혜진 언니는 일을 할 때 최선을 다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도 운 좋게도 절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도움을 받았죠. 미국 <보그> 에디터였던 앙드레 레옹 탈리를 통해 알게 된 오스카 드 라 렌타가 특히 절 예뻐했어요. 그러고 보면 제가 데뷔할 당시 데렉 램, 알렉산더 왕 등의 디자이너들 역시 신인이었는데 그때는 모델들에게 페이를 제대로 주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같은 동양인이고 나도 신인이니까 기꺼이 런웨이에 섰어요. 그 후 그들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모두 유명해져서 날 다시 찾더라고요.

해외 진출을 앞둔 후배 모델들에게 조언한다면?
밥 잘 먹고 다니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데 너무 굶으면 더 우울해지거든요. 거식과 폭식을 오갈 수도 있고요. 또 “난 디올 쇼에 서야지, 샤넬은 꼭 해야지” 이런 생각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대치가 크면 그만큼 힘드니까요.

 


 

Sung Hee Kim

“워낙 옷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서양인이 보면 다 비슷해 보이는 동양 모델들 사이에서 눈에 띄려면 스타일에 신경을 써야 하죠. 한느 가비 오딜르처럼 화보 스타일링까지 맡는 수준은 아니어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데님 소재의 체인 장식 스커트 수트는 Moschino Collection, 진주 네크리스와 체인 네크리스, 장갑, 체인 벨트는 모두 Chanel, 왼손에 착용한 반지는 모두 Numbering 제품.

데님 소재의 체인 장식 스커트 수트는 Moschino Collection, 진주 네크리스와 체인 네크리스, 장갑, 체인 벨트는 모두 Chanel, 왼손에 착용한 반지는 모두 Numbering 제품. 

W Korea 최근 벌써 해외 진출한 지 2년이 넘었죠?
김성희 처음 뉴욕에 간 건 3년 전이에요. 윌레미나 에이전시랑 계약하고 돌아와서 한 시즌을 한국에서 보낸 후 다시 돌아가 첫 시즌에 2012 F/W 헬무트 랭 쇼를 시작했어요.

해외에 나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솔직히 전 해외 진출을 하기 전엔 그다지 인지도가 높은 모델이 아니었어요. 당시 모델 일을 계속 해야 할지 고민할 시점에 나이도 있고 이때가 아니면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결심을 굳혔죠.

확실히 가기 전과 지금, 소위 말하는 ‘대우’가 다르죠?
맞아요. 가기 전엔 지금과 같은 상황은 상상치도 못했으니까요. 특히 미우미우와 프라다 광고를 찍고 나선 해외나 한국에서 제 인지도가 급상승하는 걸 느낄 수 있었죠. 사실은 제가 잡지와 광고에서만 보던 모델들 사이에서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정말 나가길 잘했다 싶어요. 한국에 돌아오고 싶다가도 남들은 정말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일이라는 생각에 꾹 참아내죠.

스타일링 감각이 무척 뛰어난 걸로도 유명한데, 자신의 스타일이 커리어에 도움이 되나요?
직접적이진 않아도 저란 존재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긴 해요. 스트리트 포토그래퍼들이 제 이름을 부르며 반겨주고, 스타일리스트들이 칭찬을 건네기도 하죠. 워낙 옷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비슷비슷한 모습의 모델들 사이에서 절 각인시키려면 옷에 신경을 써야 해요. 한느 가비 오딜르처럼 화보 스타일링까지 맡는 수준은 아니어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한계에 부딪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나요?
언어와 인맥. 이 두 가지는 함께 가요. 한국에서 자란 모델은 아무래도 언어 부분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물론 이전에 비하면 많이 늘긴 했지만 깊은 인맥을 형성하기엔 아직 부족해요. 또 하나 한국 모델들끼리 흔히 하는 얘기가 있어요. ‘대륙의 힘이 대단하다’고. 사실 중국이 아시안 마켓 셀링을 지배하는 만큼 중국 모델들의 입지가 넓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솔직히 한국 모델이 옷도 더 잘 입고, 친화력이 뛰어나도 결정적인 순간에 국적 때문에 밀리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중국 잡지에선 절 무척 좋아해요. 누군가 그러는데 웨이보에서 ‘성희는 중국 모델보다 중국 잡지에 더 많이 나온다’라고 했대요. 거의 매달 찍고 있긴 하거든요.

이제 해외 진출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자신의 존재를 기억시키는 것. 캐스팅에 가보면 죄다 블랙 스키니 진에 회색 티나 흰색 탱크톱 차림이에요. 하물며 동양 모델이 얼마나 비슷해 보이겠어요. 제가 스타일링에 신경을 쓰는 것도 예쁘게 입어야 날 기억하고 한 번 더 봐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죠.

 


 

Ji Hye Park

“2년 동안 꾸준히 활동을 하니까 이제 ‘지혜’ 라는 모델의 존재를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것 같아요. 이게 앞으로 뉴욕에서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금빛이 감도는 베이지색 레이스 드레스, 레이스업 부티, 회화 프린트의 울 스카프는 모두 Burberry Prorsum 제품.

금빛이 감도는 베이지색 레이스 드레스, 레이스업 부티, 회화 프린트의 울 스카프는 모두 Burberry Prorsum 제품.

W Korea 첫 번째 패션위크였던 2013 S/S 시즌부터 소위 ‘대박’을 터트렸잖아요. 당시에 어떤 기분이 들었어요?
박지혜 뉴욕에 간 게 2012년 8월인데 당시 뉴욕 진출에 대해 의미를 크게 둔 건 아니고 그냥 가볍게 경험을 쌓는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정신없이 첫 시즌을 보낸 거예요. 뉴욕에 가자마자 알렉산더 왕을 시작으로 마크 제이콥스, 돌체&가바나, 루이 비통까지 꽤 많은 빅쇼에 섰는데 돌이켜보면 사실 말도 안 되는 거거든요. 두 번째 시즌을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난 정말 운이 좋았구나, 잘한거구나, 라고 깨달았어요.

역시 가장 기쁜 순간은 알렉산더 왕 쇼에 섰을 때였나요?
아니요. 오히려 뉴욕에서 처음 에이전시와 계약했을 때예요. “나도 이제 외국에 에이전시가 있어!”라는 생각에 얼마나 기뻤던지. 어떤 쇼를 하는 것보다 첫발을 내디뎠다는 사실만으로 감동한 거죠.

이젠 그야말로 글로벌한 톱모델이 되었는데 해외 진출 전의 박지혜와 지금의 박지혜는 어떻게 다른가요?
솔직히 한국에만 있었을 땐 내가 괜찮은 모델이라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이젠 나 자신을 좀 더 알게 되고 많이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2년 동안 활동하니까 이제 ‘지혜’라는 모델의 존재를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것 같아요. 이게 앞으로 뉴욕에서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낯선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려니 힘들 때도 많죠?
두 번째 시즌을 보낼 때 가장 힘들었어요. 첫 시즌을 워낙 잘 치러서 두 번째 시즌에 더 기대했던 모양이에요. 사실 조금 더 일이 많았는데도 꽤 힘들더라고요. 오랫동안 가족, 친구 등과 떨어져 살다 보니 잘 버텨내다가도 가끔 무너져내릴 때가 있어요. 그래도 꽤 잘 참아내는 편이긴 해요.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칭찬은 뭐예요?
목이 길고 메이크업하기 좋은 얼굴이라고도 얘기해요. 머릿결도 좋은 편이라고 하고요. 심지어 네일 아티스트들이 손도 예쁘다고…(웃음) 민망하게도 그들은 끊임없이 제가 좋은 모델이라고 확인시켜줘요.

앞으로 해외 진출을 계획하는 후배 모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즐기듯이, 마음을 편히 먹길 바라요. 말처럼 쉽지 않은 건 알지만 정말 중요해요. 예민하게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우리들을 흔히 ‘옵션 인생’이라고 얘기하는데요,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또 안 되려다가도 되기도 해요. 쇼 들어가기 직전까지 결과를 모르는 일이 허다한걸요.

 


 

Sora Choi

“캐스팅장에서 니콜라 제스키에르를 만났는데 제가 루이 비통 크루즈 의상을 입고 나오자마자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이건 네 옷이야. 정말 잘 어울려! ’ 루이 비통에 계신 한국 디자이너 분도 제게 다가오더니 분위기가 좋다고 귀띔했어요. 그때 됐구나 싶었죠.”

시퀸 장식을 더한 아코디언 주름 스커트, 페이턴트 가죽 소재의 지퍼 장식 톱, 페이턴트 소재 벨트와 트렁크 모티프의 펜던트 네크리스는 모두 Louis Vuitton, 오른손에 착용한 볼드한 반지는 모두 Calvin Klein Watch & Jewerly 제품.

시퀸 장식을 더한 아코디언 주름 스커트, 페이턴트 가죽 소재의 지퍼 장식 톱, 페이턴트 소재 벨트와 트렁크 모티프의 펜던트 네크리스는 모두 Louis Vuitton, 오른손에 착용한 볼드한 반지는 모두 Calvin Klein Watch & Jewerly 제품.

W Korea 데뷔쇼가 루이 비통 크루즈 컬렉션이라고 알고 있어요. 첫 쇼가 루이 비통이라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최소라 루이 비통 쇼를 시작으로 해외 활동을 한 지 고작 2달 남짓 되었어요. 해외 진출에 대한 얘기는 한 1년 전부터 나눴는데, 유야무야되는가 싶더니 갑자기 회사에서 루이 비통 쇼의 옵션이 걸려 있다고 떠나기 4일 전에 통고를 하는 거예요. 회사에서 파리 에이전시 쪽에 제 프로필을 넣어놓았는데 연락이 온 거더라고요. “모험으로라도 가볼래?”라는 권유에 용기를 냈고 바로 파리로 떠났죠. 그리고 쇼 하기 3일 전, 씻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부커에게 급한 전화가 왔어요. 당장 루이 비통으로 날아가라고. 쏜살같이 달려간 자리에 모델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그 자리에서 니콜라 제스키에르를 만나고 최종 오디션을 봤어요. 그리고 확정!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반응이 궁금해요.
제가 크루즈 쇼에서 입었던 그 옷을 입고 나오자마자 그러더라고요. “이건 네 옷이야. 정말 잘 어울려!” 친절하고 유머러스한 사람 같았어요. 내가 영어를 잘 못 알아들으니까 쉬운 단어로 천천히 이야기를 하면서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혹시 의상이 더 돋보이도록 머리를 단발로 잘라줄 수 있겠느냐고 묻더라고요. 당연히 ‘Yes!’ 루이 비통에 계신 한국 디자이너 분도 제게 오더니 제스키에르가 저에 대해 칭찬을 했다고, 분위기가 좋다고 귀띔해 주셨어요. 그때 됐구나 싶었죠.

루이 비통 쇼에 서고 나니 확실히 반응이 다르죠?
아무래도 루이 비통 쇼에 섰던 경력 때문인지 부커가 브랜드에 ‘루이 비통 쇼에 선 모델’이라고 말하면 “ 아 그래? 한번 와봐”라고 하더라고요. 잡지와 쇼를 포함해서 총 10개 정도 캐스팅을 봤는데 우선 오트 쿠튀르는 디올, 율리아나 세르젠코, 장 폴 고티에 쇼에 올랐어요. 이후에 해외 잡지 화보 촬영도 했고요. 특히 디올은 제가 꼭 한 번 서보고 싶던 쇼였는데 런웨이에 오르다니 감격적이었어요. 무엇보다 우리나라 잡지에서도 절 더 많이 찾더라고요. 예전보다 화보의 단독 모델로 캐스팅하는 경우도 늘었고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우선 곧 런던과 파리에서 옵션이 걸린 촬영이 있어서 유럽에 들렀다가 뉴욕으로 떠나요. 생애 첫 뉴욕행이죠. 지금 에이전시 두 군데 중에서 어디로 갈지 조율 중이에요. 이제 본격적으로 패션위크에 도전하는 거죠. 굉장히 떨리고, 기대돼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프레스와 모델들은 소위 패션의 메카라고 불리는 도시에서 열리는 패션위크에 가면 자국의 위상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겠지만 프레스의 경우 자국의 시장 규모와 매체력에 따라 명백하게 계급이 나눠지는 것을 목도한다. 모델의 경우라면? 아직까지도 백호주의가 만연한 패션계지만 예전에 비한다면 동양 모델을 가로막은 성벽은 꽤 낮아진 편. 2005년경부터 아시안 모델들이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면서 ‘동양 모델은 쇼의 구색 맞추기’ 정도로 여겨지던 풍토가 옅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혜박과 한혜진, 효니, 김다울 등 해외 진출 1세대 모델들의 역할이 꽤 컸다고 볼 수 있다. 바람직한 건 강소영, 이혜정, 박지혜, 김성희, 수주로 꾸준히 이어지는 2세대의 등장으로 소위 K-뷰티의 명맥이 이어진다는 사실.

8~9년 전 마크 제이콥스, 루이 비통, 샤넬 등 메가톤급쇼에서 처음 한국 모델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들의 대단한 업적(?)에 한국 패션 매거진이 들썩였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 냉혹한 패션의 중심에서 펼치는 그들의 활약에 엉덩이라도 ‘팡팡’ 두드려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물론 정작 세계 패션을 쥐락펴락하는 이들에게 모델의 국적은 안중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즌마다 쏟아지는 중국 모델들의 인해전술 속에서도 우리 모델들이 꿋꿋이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면서 한국 모델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김성희의 증언에 따르면 많은 스태프들이 ‘패셔너블 K-뷰티’라는 단어로 한국 모델들을 표현한다고. 그도 그럴 것이 런웨이, 광고 캠페인, 화보를 종횡무진 오가는 성희, 지혜, 수주 3인방은 모두 런웨이 밖 거리에서조차 세련된 패션 감각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다. 더욱이 세계를 하나로 묶는 SNS 시대에 돌입하면서 이른바 옷 잘 입는 한국 모델에 대한 호의는 인사이더를 넘어선 지 오래다. 실제로 모델들의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에는 영어권, 중국어권 팬들의 ‘좋아요’와 찬사가 넘실거린다. 이렇듯 전 지구적 인기를 누리는 선배 모델들의 활약상이 후배 모델들의 귀감이 되면서 해외 진출을 노리는 모델이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

곧 다가올 2015 S/S 시즌을 겨냥해 출격 준비를 마친 모델은 최준영, 유지안, 이수진 등. 그 중 가장 큰 기대를 모으는 루키는 역시 최소라다. 얼마 전 루이 비통 크루즈 컬렉션에 올라 훨씬 유리한 고지에서 본격적인 데뷔전을 치르게 된 것. 영어권에서 자란 한국계 모델이 아니고서야 이역만리에서 홀로 고군분투할 생각을 하면 겁이 덜컥 날 만도 하건만, 대한민국의 모델이라면 대부분 해외 진출의 꿈을 품는다. 물론 실제로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앞으로 점점 더 그 숫자가 늘어날 전망. 그렇다고 모델 에이전시가 모든 모델의 해외 진출을 응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능성과 의지를 두루 판단하는 편이지만 대부분은 본인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꽤 큰 비용을 감수해야 하고 영어 공부,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따라야 하는 만큼 제 아무리 천상의 외모를 타고났어도 무쇠 같은 의지가 없으면 넘어서기 어려운 일이 너무 많으니까.

그렇다면 해외 무대에서 성공하기 위한 열쇠는 무엇일까? 당연한 얘기지만 영어 실력은 필수. 에스팀의 해외 담당 매니저인 김수연은 뉴욕 부커로부터 ‘제발 영어 공부 좀 시켜라’라는 이야기를 숱하게 듣는다고 말한다. 단순히 그들의 말을 알아듣고 대답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과 불만 사항 등을 똑바로 전달하고 집, 세금 등의 생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영어 문제는 피해갈 수 없다. 이제 곧 뉴욕으로 떠나는 최소라는 촬영장에서 필요한 필수 생활 영어 문장과 단어를 빼곡히 정리한 서류를 항시 갖고 다니며 외운다. 영어 실력은 곧 인맥을 쌓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언어적 핸디캡이 전혀 없는 혜박과 수주가 카린 로이펠드, 스티븐 마이젤, 칼 라거펠트 등과 교감을 나눔으로써 자신의 활동에 날개를 단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 실제로 뉴욕을 비롯한 패션계는 실력과 인맥이 한 몸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사실이다. 카라 델레바인, 릴리 맥미너미, 조지아 메이 재거처럼 금쪽같은 인맥을 타고난 이들이 더 빠르고 단단하게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억울하지만 한국 모델들과는 아예 출발선이 다른 셈이다.

영어 실력도, 인맥도 미약하다면 성격과 자신만의 캐릭터 구축을 필살기로 삼아야 한다. 박지혜의 경우 영어가 유창하진 않지만 특유의 쿨하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부커들의 총애를 받는다고. 그러고 보니 이혜정도 파리에서 활동할 당시 피팅을 기다리는 중에도 함께 기다리는 낯선 모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말을 건네는 등 푸근한 넉살을 발휘, 주변의 호감을 샀다. 수없이 많은 좌절과 고민이 실타래처럼 이어지는 것이 해외 활동인 만큼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적극성은 해외에 진출한 모델에겐 서바이벌 키트 같은 존재일 터. 더불어 영어와 성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개성이라고 입을 모은다. 외모와 개성은 모두 타고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수주처럼 파격적인 헤어 컬러와 근사한 패션 감각이 그녀의 커리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수주는 “금발로 염색한 이유 중 하나는 평범한 아시안 모델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예요. 백인, 황인, 흑인 인종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만의 모습으로 다가서기 위해서죠”라고 말한다. 성희 역시 스타일을 곧 자신을 알리는 수단으로 삼은 모델로 유명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매력적인 외모, 위에 언급한 조건을 두루 갖추더라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해외 무대. 특히 요즘엔 중국 모델들의 위세에 한국 모델들이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광고 모델 옵션이 들어왔는데 광고주가 제게 중국 모델이냐고 묻더라고요. 한국 모델이라고 답했더니 ‘중국에서 많이 팔아야 하는 옷이라 중국 모델을 써야 한다’고 하더군요.” 혜박의 ‘웃픈’ 경험담이다. 가뜩이나 치열한 패션계에서 대륙의 엄청난 위력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니, 이 와중에도 눈부신 활약을 보이는 한국 모델들이 더욱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렇게까지 해외 활동에 목을 매야 하느냐고. 우선 모델이라면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경험을 넘어서 해외 활동은 모델에게 꽤 오랫동안 커리어에 직간접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실제로 한혜진, 혜박, 송경아, 이현이, 이혜정 등 해외 활동을 경험한 모델들은 ‘글로벌한 모델’이라는 이미지를 거머쥐지 않았나. 일례로 이혜정은 작년 예능 프로그램 <우리동네 예체능>에 출연 당시, 방송을 통해 그녀의 이력을 알게 된 최인선 감독으로부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또 김성희도 미우미우와 프라다의 월드와이드 캠페인을 찍은 모델이라고 하면 보는 눈부터가 달라지는 걸 느낀다고 말한다. 물론 해외 진출이 K-패션·뷰티를 알리는, 유일한 창구는 아니다. 일례로 아이돌급 인기를 구가하는 모델 아이린은 해외 런웨이에 오르진 않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국위 선양에 일조한다. 한국의 문화와 스타일을 알리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아시아에 두터운 팬층을 거느린 것. 실제로 블로거의 자격으로 패션위크에 나서는 아이린은 한국 디자이너의 의상을 감각적으로 스타일링, K-패션 홍보대사의 역할을 맡고 있다.

이쯤 되면 그들이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혈혈단신 해외에 나가 까칠한 패션 피플을 상대하고 대륙의 힘을 과시하는 중국 모델 틈바구니에서 고독과 체력의 한계와 싸우는 데 청춘을 불사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 피와 땀이 있기에 그들은 모델 인생에 두 번 오지 않을 인생의 값진 열매를 따고, 이들의 활약상을 지켜보는 우리마저 흐뭇하긴 하지만. 과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빌보드 차트에 오르는 것만이 국위 선양일까? K-모델의 활약에 무한한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